# 96
96화. 아라크네 (2)
스슥.
거미줄 막이 너무 두꺼워서 칼날이 완전히 뚫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대규는 힘이여, 솟아라 스킬을 시전했다.
“어어……?”
뭔가 이상했다.
그전보다 몸에서 힘이 훨씬 많이 넘쳐흘렀고, 근육들이 거세게 펌핑됐다.
때마침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세미데우스의 육체를 지니게 돼서 보유하고 있는 공격 스킬들의 등급이 한 단계 올라갑니다.>
보유 스킬란을 확인해 보니 힘이여, 솟아라와 비산의 결계 스킬의 등급이 하급에서 중급으로 올라가 있었다.
[힘이여, 솟아라(중급): 이 스킬을 사용하면 30분 동안 근력이 20 상승합니다. 마나 소모량 50.]
[비산의 결계(중급): 이 스킬을 발동하면 사용자를 중심으로 반경 5미터의 결계가 형성되고, 결계 안의 적들에게 수백 개의 칼날이 동시에 쏟아져 내립니다. 마나 소모량 30. 쿨 타임 15분.]
힘이여, 솟아라는 한 번 시전 시 근력이 두 배나 더 상승하게 됐다.
그리고 비산의 결계는 쿨 타임이 30분에서 절반인 15분으로 줄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에게 전수받은 기술, 레툼 익투스 스킬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신화 등급 스킬이라 등급이 올라가는 기준이 좀 다른 것 같았다.
대규는 온몸에서 넘쳐흐르는 힘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거미줄 막을 향해 있는 힘껏 칼을 휘둘렀다.
서걱-
마침내 거미줄 막이 갈라졌다. 대규는 커튼을 젖히듯 거미줄 막을 양옆으로 젖힌 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동굴 속은 매우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지도창을 띄워 봤다.
‘뭐, 이렇게 생겼어?’
동굴 내부는 무지하게 복잡했다. 여태까지 갔던 동굴들은 보통 일직선 형태로 통로가 좍 나 있고, 통로의 끄트머리에 보스들이 있는 형태였는데 이 동굴의 통로들은 거의 미로 수준이었다.
게다가 동굴 곳곳에 수없이 많은 붉은 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몬스터들인가?’
하지만 붉은 점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잠이라도 든 걸까?
대규는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붉은 점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두워서 시야가 차단됐다곤 하지만 그의 전투 감각은 예전에 비해 꽤 민감해졌다. 만약 몬스터가 곁에 다가오면 청각으로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붉은 점 바로 앞까지 다가갔는데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굴은 아주 고요했다.
‘대체 뭐지?’
대규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동굴 벽에 거미줄이 거대하게 쳐져 있긴 했다.
거미줄은 어느새 대규를 둘러싸는 형태로 매우 촘촘히 쳐져 있었다. 하지만 대규를 공격하거나 하진 않았다.
가만히 거미줄을 바라보고 있는데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아라크네의 거미줄 함정
보상: 낮은 확률로 레드 등급 젬스톤 드랍
특징: 거미줄에 닿은 것을 순식간에 감싸 안아서 가둬 버린다. 그 안에 갇혀 버리면 절대로 뚫고 나올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
<거미줄 함정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거미줄 함정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거미줄 함정으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거미줄 함정의 약점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대규는 동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덩이를 들어 거미줄을 향해 던졌다.
탓.
스르륵-
돌덩이가 닿자마자 넓게 퍼진 거미줄이 빠른 속도로 돌덩이를 감쌌다. 얼마 후, 거미줄은 단단한 고치로 변해 버렸다.
‘숲에서 봤던 그 고치들이구나!’
지도창을 보니 동굴에 이 거미줄 함정들은 수없이 분포돼 있었다.
대규는 약점 영상을 재생해 봤다.
영상을 보니 일단 저 고치에 갇히면 답이 없었다. 아무리 예리한 무기를 들고 있다고 해도 온몸으로 꽉 조여드는 거미줄 때문에 칼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바로 질식해서 죽어 버린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고치에 몸이 닿지 않게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대규의 주변엔 거미줄 함정들이 잔뜩 생겨나 있었다.
칼로 직접 베려 해도 칼이 닿는 순간 거미줄은 귀신같이 그것을 감아 버린다.
결국 공격하려면 검으로 직접 하지 말고, 검광이나 검기로 해야 한다.
‘비산의 결계와 레툼 익투스는 가능하겠군.’
레툼 익투스는 비산의 결계보다 마나 소모량이 크다.
게다가 비산의 결계는 광역 공격이다.
거미줄 함정들을 한 번에 제거하는 데는 비산의 결계가 유리하다.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들고 휘두르며 스킬을 시전했다.
쿠구궁.
번쩍!
동굴의 천장에서 커다란 빛이 번쩍였고, 대규 주변 5미터 반경으로 투명한 막이 쳐졌다.
곧 수백 개의 검광들이 거미줄 함정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파바바밧.
화염 불꽃을 품은 검광들이 거미줄 함정으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화르륵-
불이 붙은 거미줄들은 순식간에 타서 없어져 버렸다.
‘휴, 이제 좀 길이 뚫렸군.’
너덜너덜해진 거미줄 조각들을 헤치며 대규는 동굴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 * *
동굴 안쪽으로 갈수록 거미줄 함정들은 많아졌다.
대규는 비산의 결계로 함정들을 제거하며 생각했다.
‘대체 거대 거미 아라크네는 어떤 존재인 걸까?’
거대 거미라지만 얼마나 클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굳이 아테나 여신이 이 거미를 자신에게 잡아 오라고 시킨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심지어 해치지도 말고 생포해 오라니.
하지만 이런 거미줄 함정을 곳곳에 설치해 놓는 걸로 봐서 지능이 떨어지는 몬스터는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대면해 보면 알겠지.’
지도창으로 보니 거미줄 함정은 대부분 제거했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발 디딜 틈 없이 거미줄 함정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비산의 결계로 제거해 나갔다.
얼마 후 지도창의 동굴 깊숙한 곳에서 반짝이는 커다란 붉은 점이 보였다.
거대 거미 아라크네 같았다.
‘거의 다 왔다.’
대규는 칼을 빼 들고 아라크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혹시 아라크네가 강력한 스킬을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판테온의 상업 구역 상점에서 산 스킬 복제 알약도 꺼내 챙겼다.
스스륵.
이번에는 분명 인기척이 들렸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세요?”
어둠 속에서 한 여성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미에게 잡혀 있는 인질이라도 있는 건가?’
대규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앳된 얼굴의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채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녀가 대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미데우스 영웅님이시군요.”
“당신은?”
“저는 이 동굴에 갇혀 있게 됐어요. 이 동굴에서 빠져나가고 싶어요. 제발 절 구해 주세요…….”
그녀는 대규를 흡사 구원자를 보듯 절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저 모습은……?’
그녀는 분명 그를 향해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데 그 모습에서 묘하게 성적인 매력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저를 구해 주시면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은 오묘한 느낌이었다.
빈틈투성이의 가녀린 약자라서 더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보다 대체 이 여자가 왜 이런 동굴에 있지? 설마 거대 거미에게 먹이로 잡혀 온 건가?’
그녀는 이제 대규의 발목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이렇게 울먹였다.
“영웅님… 제발…….”
절박하고 애절한데 묘하게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솔직히 마음이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은 우선 거대 거미부터 생포해야 한다. 성공적으로 거대 거미를 생포한 뒤 그녀를 동굴로부터 탈출시켜 주면 되지 않을까?’
‘그럼 거미를 생포할 동안 덜 위험한 다른 구석으로 피신이라도 시켜 놔야겠군.’
대규는 이렇게 마음먹은 후 그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아라크네(Arachne)
보상: 레드 등급 젬스톤 3개
특징: 아테나 여신의 노여움을 사 저주에 걸린 팔다리 8개 달린 거대 거미. 거미줄과 마비 독 공격을 함. 마비 독에 맞으면 치명적으로 중독되서 바로 전신 마비와 함께 죽음에 이름.
보유 스킬: 거미줄-마비 독이 있는 거미줄을 입으로 내뱉어 상대방을 포박한 뒤, 고치로 가두고 마비시킨다. 마나 소모량 50.
<아라크네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아라크네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아라크네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아라크네의 약점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처음엔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컴컴한 동굴이니까 그녀 뒤에 거대 거미 아라크네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소녀는 아무리 봐도 인간의 모습이다. 공략집의 설명에 나온 거미처럼 팔다리가 8개 달린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공략집이 잠잠한 걸로 봐서 그녀가 환상 마법이나 분신술을 쓴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 약점 영상을 봐 보자.’
영상을 재생한 대규의 눈동자가 커졌다.
영상 속에선 소녀였던 가녀린 그녀가 비대한 몸집의 거미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에서는 거미줄을 뿜어내며 상대방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거미줄엔 치명적인 마비 독이 발라져 있어서 몸이 닿기만 해도 전신 마비가 된다.
영상에서 알려 주는 약점은 가슴과 배 사이였다. 그곳을 베어 버리면 꾸르륵 거품을 물고 사망한다.
‘하지만 죽여 버리면 소용이 없잖아. 여신은 생포를 해 오라고 했으니까.’
게다가 공략집에 나와 있는 설명도 좀 석연치 않았다.
그녀는 원래 거대 거미 몬스터가 아니었는데 아테나 여신의 노여움을 사서 이렇게 됐다고 한다.
처음엔 거미인 그녀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불쌍한 척을 하며 구해 달라고 거짓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의 표정은…….
너무 절박하고 불쌍해 보이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것보다 자신이 이 동굴에 갇혀 있다고 했지. 설마 그녀를 가둔 게 아테나 여신인 걸까?’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은 무기 제작 허가증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녀를 생포해 가야만 한다.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들었다.
“영웅님… 대체 왜 그러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검을 들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영웅님…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소녀 아라크네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절 구해 주세요… 거미가, 거미가 절 잡으러 와요…….”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자기가 거대 거미인데 거미가 자길 잡으러 온다니.
“거미가 와요… 거미가…….”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결국, 다리가 풀려 동굴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가 공포와 두려움에 찬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그녀가 말한 거미가 온 건가? 대규가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거미줄이 한 움큼 흘러나왔다.
스르륵.
아차, 하는 사이 거미줄들은 대규의 몸을 순식간에 감싸 버렸다.
“으으으… 끄르륵… 싫어어…….”
거미줄을 토해 내며 아라크네는 괴롭다는 듯 울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의 몸이 점점 거미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팔과 다리가 각각 두 갈래로 나뉘며 총 8개의 다리가 됐고 그녀의 몸과 머리는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몸을 옥죄는 거미줄 틈 사이로 거대 거미로 변해 버린 아라크네가 보였다.
거미의 커다란 대가리 한가운데에는 방금 전에 봤던 소녀의 얼굴이 달려 있었다. 꼭 인면충(人面蟲)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선 피눈물이 흘러나왔고 입에선 거미줄과 함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끄르륵… 싫어…….”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대규는 점점 의식을 잃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