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집을 습득하셨습니다-95화 (95/294)

# 95

95화. 아라크네 (1)

병사가 신전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름다운 여자 정령이 문밖으로 나왔다.

그녀 역시 전에 지하 감옥에서 봤던 정령 이데처럼 하얀 피부에 뾰족한 귀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숲의 요정 같은 차림을 했던 이데와 달리 이 정령은 여전사처럼 갑옷에 칼을 차고 있었다.

정령이 대규에게 말했다.

“들어오시지요. 아테나 여신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규는 정령의 안내를 받으며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쿵.

들어오자마자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신전 바닥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바닥 한가운데엔 황금빛 카펫이 통로처럼 죽 늘어져 있었다.

카펫이 끝나는 지점엔 왕좌가 하나 있었다.

여신의 주둔지 지휘 사령부 천막에서 봤던 강철로 만들어진 왕좌였는데 아테나 여신은 그 왕좌에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주둔지에서 봤을 때와 사뭇 다른 차림이었다.

주둔지에서의 아테나 여신은 단단해 보이는 황금 갑주를 몸에 걸치고 어깨엔 방패같이 달린 술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쇄골과 어깨 라인에 금박이 화려하게 박혀 있는 장식과 하늘하늘한 하얀 빛의 토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 아래쪽으로 미끈하게 뻗은 그녀의 종아리와 발이 드러났는데 그곳엔 여성스러워 보이는 스트랩 샌들이 신겨져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전쟁의 여신이 아니라 미의 여신처럼 보일 정도인데.’

여신의 미모를 보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대규는 여신이 앉아 있는 왕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테나 여신은 걸어오는 대규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세미데우스 김대규, 이렇게 여신님을 알현하옵니다.”

대규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여신에게 예를 갖췄다.

“영웅이여, 고개를 들라.”

“황송하옵니다.”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여신은 온화한 목소리로 대규에게 말했다. 대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송구스럽지만, 부탁을 하나 드릴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됐습니다.”

“부탁이 뭔가? 말해 보거라.”

대규는 보관함에서 카리브디스의 이빨을 꺼내 여신 앞에 내밀었다.

거대한 이빨을 본 여신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 이빨은 판테온의 태초의 어머니 신이라 불리는 가이아(Gaia) 여신과 자신의 삼촌뻘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 카리브디스의 이빨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카리브디스는 분명 판테온의 두 번째 시련이 있는 광활한 바다 넵투누스에 갇혀 있었다.

그녀는 이빨을 바라보며 엄격한 목소리로 대규에게 말했다.

“그대는 솔직히 고하라. 이 이빨을 어디서 얻어 낸 것이냐? 이 이빨은 신성을 지닌 아이템이다.”

그러자 대규는 담담한 목소리로 여신에게 대답했다.

“판테온의 시련에 도전해서 얻어 냈습니다.”

여신의 목소리가 살짝 노기를 띠었다.

“신에게 거짓을 고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대가 정말로 판테온의 시련에 도전했단 말이냐?”

여신의 심기를 거스른 게 아닌가 두려워진 대규는 재빨리 이렇게 말했다.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극복해 냈습니다. 운명의 세 여신이 세미데우스가 된 저의 존재를 기록의 신전이란 곳에 각인시켰습니다.”

‘……!’

운명의 세 여신과 기록의 신전 얘기를 들은 아테나 여신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기록의 신전을 불러냈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기록의 신전에 각인된 존재들의 이름들이 쫘르르 떠올랐다.

그중에서 여신은 대규의 이름을 찾아냈다.

분명 판테온의 시련을 관장하는 세 여신이 운명의 천에 운명의 실과 바늘로 직접 각인시킨 이름이었다.

‘이럴 수가…….’

여신은 멍하니 각인된 이름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저 영웅이 정말로 판테온의 시련을 극복해 내고 세미데우스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레벨을 100까지 올렸는지도 모르겠고, 대체 무슨 수로 그 시련들을 통과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 저 남자는 지난 기간토마키아 전투에서 봤을 땐 인간 영웅이었다. 그것도 막 전투에 투입된 신입 인간 영웅.

아무리 대규가 뛰어난 전사라고 하지만, 첫 기간토마키아 참전 전투에서 적장 기가스 팔라스를 무찔렀다고 하지만, 그의 실력은 분명 인간 영웅의 수준이었다.

물론 같이 참전했던 신입 영웅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여신이 보기에 그의 레벨은 당시 고작해야 40 언저리 정도였다.

아테나 여신도 여태껏 살면서 이런 영웅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간신히 잠재우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대규에게 말했다.

“방금 기록의 신전을 확인해 봤다. 그대의 말이 맞구나. 의심을 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구나. 여태 내가 살면서 그대 같은 인간 영웅… 아니 세미데우스는 본 적이 없도다.”

말을 마친 그녀는 대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예전에 첫 전투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늠름해지고 남자다워진 것 같았다.

본래 아테나는 강력하고 뛰어난 영웅에게 마음이 끌리는 여신이다.

그녀는 대규를 보자 가슴속에서 호감의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봤을 때는 단순히 튜토리얼인 타르타로스에서 남들보다 좀 더 좋은 성적을 지닌 신입 영웅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번 전투에서 적장 기가스 팔라스를 해치워 공적을 세웠던 것도 그렇고 이젠 그가 다른 영웅들에 비해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됐다.

그녀는 이 불가사의한 영웅에게 강력한 호감과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 밑의 영웅이 판테온의 시련을 통과하고 이렇게 빨리 성장한 걸 보니 기분이 좋다. 대견스럽구나. 기쁘기 그지없다.”

여신의 입가에 꽃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대규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구나. 고개를 들어 나를 보거라.”

여신은 몹시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전에 그가 기가스 팔라스를 해치우고 전공을 세워 보상을 받을 때 봤던 그 표정이었다. 살짝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눈동자.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아테나 여신이 빠른 시간에 판테온의 시련을 극복해 세미데우스가 된 당신에게 큰 주목을 하고 더욱 호감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부탁하면 아테나 여신이 수락할 확률이 상승합니다.>

“참, 부탁할 게 있다고 했지. 대체 그 이빨로 부탁할 게 무엇이냐?”

정신을 차린 대규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이 이빨로 무기를 제작하러 판테온의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 이빨을 사용해 무기를 제작하면 신화 등급의 무기가 나온다고 그러더군요. 대장장이가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를 제작하려면 판테온의 신들에게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흐음.”

“그래서 여신님께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기 위해 이렇게 찾아오게 됐습니다.”

“그랬군.”

대규는 말을 마친 뒤 여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신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화 등급의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허가증은 아무리 판테온의 신이라도 함부로 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미데우스가 된 대규의 능력과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고, 다른 신들의 불만도 잠재울 수 있는 업적을 달성해야만 한다.

때마침 자신이 거미로 만든 아라크네가 떠올랐다. 하찮은 재주로 감히 신을 조롱하고 능멸한 인간 여자였다.

벌로 거미가 됐어도 반성은커녕 판테온을 적으로 삼은 오만한 성정의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거미의 마비 독과 거미줄은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여신은 대규에게 이렇게 말했다.

“허가증을 내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냥 줄 수는 없다.”

“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네가 신화 등급의 무기를 지닐 만한 자격이 되는지 나에게 증명해 보거라. 그렇게 한다면 허가증을 내주마.”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증명을 하면 됩니까?”

대규가 묻자 여신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휴브리스(Hubris)의 숲에 가서 거대 거미, 아라크네를 잡아 오너라.”

“거미라면 거미줄을 치는 그 거미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하지만 일반 거미의 몇백 배는 커다란 녀석이지. 중요한 건 절대 녀석을 죽이지 말고 생포해 와야 한다. 녀석을 성공적으로 생포해 내 앞에 내놓으면 그대에게 기꺼이 무기를 만들 수 있는 허가증을 주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거미 아라크네가 있는 휴브리스 숲은 일전에 그대가 기간토마키아 전투를 치렀던 동부 전선, 죽음의 평원 옆에 위치해 있다. 아라크네는 그 숲의 안쪽에 있는 깊숙한 동굴 속에 있으니 거기로 가면 된다. 명심할 것은 절대 죽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여신은 절대 죽이지 말란 말을 강조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미션: 휴브리스 숲의 동굴 속에 사는 거대 거미 아라크네를 생포해 오시오.]

[보상: 신화 등급의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아테나 여신의 허가증.]

“그럼 지금 당장 출발하거라.”

여신이 손을 휘두르자 눈앞에 포탈이 생겼다.

“죽음의 평원으로 가는 포탈이다.”

여신의 말을 듣고 대규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 * *

대규가 도착한 곳은 일전에 기가스 팔라스와 전투를 치렀던 동부 전선, 죽음의 평원이었다.

그때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일어났던 황량한 평원이었는데 지금은 좀 달랐다.

아군이 이곳을 점령한 탓인지 평원엔 조금씩 풀과 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붉었던 하늘도 푸른빛으로 변해 있었다.

‘평원의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군.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휴브리스의 숲으로 가자.’

대규는 공략집의 지도창을 띄웠다.

평원 바로 옆에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손으로 눌러 보니 그곳이 휴브리스의 숲이었다.

그런데 지도창으로 봐도 숲의 규모는 꽤 컸다.

‘거의 서울시만 한 크기잖아. 무슨 아마존 밀림 같은걸.’

대규는 숲을 향해 날아가다.

숲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허어…….”

숲에는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뻗어 있었다. 하지만 생기 넘치는 느낌이라기보다 기괴하고 음울했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 있는 탓에 햇빛이라곤 전혀 들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으스스한 한기가 몸을 감쌌다.

얼마나 숲을 걸었을까.

‘저게 뭐야?!’

수풀 위에 동물 혹은 인간의 뼈 같은 게 굴러다녔다.

‘야생동물이나 몬스터가 있는 건가?’

하지만 얼마 후, 더욱 기괴한 광경이 대규의 눈을 사로잡았다.

숲의 나무마다 거대한 누에고치같이 생긴 게 잔뜩 달려 있었다.

뭔가 싶어 자세히 살펴봤다.

자세히 보니 누에고치가 아니라 거미줄로 뭔가를 칭칭 휘감은 것이었다.

‘대체 이게 뭐지?’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꺼내 고치처럼 생긴 거미줄을 갈라 봤다.

“윽……!”

갈라진 거미줄 사이에서 악취가 뿜어져 나왔고 저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거미줄 안쪽에는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썩어 버린 인간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피부는 짓무르고 뼈가 흉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것도 혹시 거대 거미 아라크네의 짓일까?’

아라크네가 산다는 동굴에 도달하려면 숲의 깊숙한 곳으로 더 들어가야 했다. 대규는 코를 틀어막고 발길을 옮겼다.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기분이 점점 묘해졌다.

숲속엔 살아 있는 몬스터나 생물은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동굴에 가까워질수록 나무들에 달려 있는 거대한 거미줄 고치들의 개수는 점점 늘어났다.

‘거미가 잡아먹으려고 이렇게 해 놓은 건가.’

고치들의 크기는 하나같이 엄청나게 컸다. 거대 거미니까 그런 거겠지.

물론 아테나 여신이 허가증을 내주는 대가로 맡긴 임무이니만큼 만만치 않은 몬스터일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걸 죽이지 말고 생포해 오라니…….’

기절이라도 시켜야 하는 걸까?

옮기는 것이야 헤르메스에게 받은 무한히 늘어나는 가방 인피니투스를 이용하면 될 것이다.

동굴 근처로 갈수록 거미줄 고치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얼마 후, 앞에 거대한 동굴이 보였다.

동굴의 입구에는 하얀 거미줄이 사방팔방 펴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꼭 두꺼운 천막으로 동굴 입구를 막아 놓은 것 같았다.

지도창을 보니 아라크네는 저 동굴의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꺼내 들고 입구를 철벽처럼 막고 있는 거미줄 막을 향해 휘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