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화. 세미데우스 (2)
대규는 공략집을 이용해 가게 주인의 속마음을 들어 봤다.
‘크크… 이게 웬일이냐. 딱 보니까 판테온에 처음 입성해 본 어리숙한 반신반인 녀석이로군!’
어이가 없었다.
현실이든 판테온이든 바가지를 씌우는 악덕 상인이 있는 건 어디나 똑같은가 보다.
대규는 보관함에서 그레이 젬스톤 5개만 꺼내 가게 주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에이, 손님! 젬스톤이 모자란데요.”
“제대로 드렸습니다. 이 알약의 가격은 그레이 젬스톤 5개 아닙니까.”
일부러 젬스톤 5개, 에 힘을 줘서 말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은 들창코에서 쒸익쒸익 콧김을 뿜으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봐, 이봐요! 너무한 거 아니요?”
“너무한 건 그쪽 아닙니까. 바가지나 씌워 놓고선.”
“바가지라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놔, 이거 억울해서 장사도 못 해 먹겠네.”
‘잠깐만. 이 대사, 예전에 닭고기 도매상 박 사장하고 너무 판박이인데?’
심지어 자세히 보니 생긴 것도 비슷한 것 같았다.
그냥 알약은 내려놓고 대장간이나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그때 자신이 신고 있는 헤르메스의 신발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상점가 입구의 조형물도 그렇고 이곳은 헤르메스 신의 관할 구역이지.’
지도의 설명창에도 상업 구역에 관해 그렇게 적혀 있었다.
물론 헤르메스가 상업의 신이니 그 설명을 봤을 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지.
대규는 가게 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레이 젬스톤 15개에 주세요.”
그러자 가게 주인은 팔짱을 끼면서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대규는 일부러 스킬 복제 알약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가게 주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그 가격을 하는 물건인 것 같군요. 이걸 받아 본 헤르메스 님께서도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헤르메스의 이름이 나오자 가게 주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그게 무슨?”
당황하는 가게 주인에게 대규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제가 깜빡 잊고 말씀을 안 드렸군요. 저는 헤르메스 님의 심부름을 받고 이곳에 온 겁니다. 제가 신고 있는 신발이 그 증거이지요.”
대규는 자신의 신발을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신께서는 이 신발을 신고 빨리 판테온의 상점가에 가서 전투에 필요한 아이템을 구해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반신반인밖에 안 되는 제가 신의 신발을 신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게 주인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분명 저 반신반인이 신고 있는 날개 달린 신발은 이 상업 구역을 관장하는 신 헤르메스의 신발이었다.
“어쨌든 좋은 물건을 이렇게 판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헤르메스 님께도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 상점에서 스킬 복제 알약을 그레이 젬스톤 15개의 가격에 구매했다구요. 가만있자, 상점 이름이… 차이니즈 오크의 잡화점! 똑똑히 기억해 두겠습니다.”
일부러 상점 간판에 적힌 상호명을 또박또박 말하며 정령을 쳐다봤다.
“아, 아… 저기… 잠깐만요!”
가게 주인이 절박한 목소리로 대규를 붙잡았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대규는 얼마 후 가게를 나서며 중얼거렸다.
헤르메스의 이름을 대자 가게 주인은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 같다고 황급히 사과하며 스킬 복제 알약의 가격을 제값으로 받았다.
게다가 그것 말고도 다른 아이템들도 사은품으로 받았다.
생명력을 한 전투에서만 한시적으로 두 배 높여 주는 ‘파워 업 포션’.
그리고 무기에 바르면 명중률이 높아지는 ‘크리티컬 오일’. 물론 이 오일은 일회용이다.
‘확실히 신들의 권한은 엄청나구나.’
헤르메스의 이름을 대니까 바로 깨갱, 하다니. 현실이나 판테온이나 이런 야비한 놈들은 똑같다.
그럼 이제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으로 가 볼까.
대장간은 상업 구역의 맨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었지만, 여기까지 깡깡거리는 육중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후 대장간에 도착했다.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
가상 판테온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철제 간판이 보였다.
길가에서도 제련 과정을 다 볼 수 있는 오픈 대장간의 형태였는데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그 열기가 아주 뜨겁게 느껴졌다.
대장간 안에서는 반인 반수인 염소 인간 대장장이들이 열심히 무기들을 만들고 있었다.
‘우와…….’
다시 봐도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대장간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용광로가 있었고, 그 안에선 쇳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염소 인간 대장장이 중 한 명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용광로 앞에 달린 작은 손잡이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끼이익.
그러자 용광로 앞쪽의 쇳물받이가 앞으로 기울었고, 금형 틀을 향해 쇳물이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옆에는 보라색 화로가 있었고 화로에 무기를 넣어 달구고 있는 대장장이도 보였다.
그런데 화로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이 이상했다.
‘불꽃이 새빨갛지 않고 시퍼렇잖아. 어찌 된 일이지?’
그때 공략집이 눈앞에 떠올랐다.
<특수한 마나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화로입니다. 마나가 깃든 불로 무기를 제련하면 무기에 신비한 기운이 감돌게 됩니다.>
신기하다.
꼭 판타지 영화의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대장간의 벽에는 선반들이 길게 나열돼 있었다. 그 위에는 철을 비롯한 온갖 색의 신비한 광석들이 놓여 있었는데 무기의 제작 재료들인 것 같았다.
선반 밑의 기다란 대에는 집게 등 제작 도구들이 걸려 있었다.
‘저건 뭐지?’
대규는 대장간의 벽면에 행거로 커다랗게 걸려 있는 천을 바라보았다.
낡고 구질구질한 천이었는데 그 위에는 무기의 도면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알아볼 수 없는 꼬부랑글씨도 잔뜩 적혀 있었고.
대규는 그 글씨를 도통 읽을 수 없었다.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고대 무기 제조 기술서입니다. 헤파이스토스 신에게 대장장이의 기술을 전수한 자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군.
대규가 천 위에 그려진 무기 도면을 넋 놓고 바라보는데 마침 마나 화로에서 무기 제련을 마친 염소 인간이 무기와 집게를 물통에 넣으며 말했다.
“이봐요, 뭘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겁니까?”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거친 목소리를 지닌 남성적인 염소 인간이었다.
대규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무기를 제작하러 왔습니다. 정확히는 재조합인데요.”
“재조합이라구? 괜찮은 조합 물건을 얻었나 보군요. 내 이름은 파베르요. 이곳 헤파이스토스 대장간 판테온 지점의 수석 대장장이지.”
수석 대장장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언뜻 자부심이 엿보였다.
그것보다 이곳이 판테온 지점이라면 다른 곳에도 이 대장간이 있다는 걸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파베르가 말을 이었다.
“조합 물건의 등급과 품질에 따라 무기 제작 가격이 달라집니다. 일단 조합할 물건들을 꺼내 보쇼.”
대규는 보관함에서 카리브디스의 이빨과 자신의 체인 블레이드를 꺼냈다.
카리브디스의 이빨을 본 파베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이건…….”
“왜 그러시죠?”
“바다 괴물 카리브디스의 이빨 아니야!”
파베르가 이렇게 외치자 대장간의 다른 대장장이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이빨을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카리브디스의 이빨?”
“오, 정말이잖아…….”
“이건 거의 전설 등급 아이템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겠는걸.”
수석 대장장이 파베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규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이건 지금 당장 재조합해 줄 수 없겠소.”
“왜죠?”
그러자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불법이니까.”
“예? 그게 대체 무슨…….”
“카리브디스는 바다 괴물이라지만, 가이아와 포세이돈 신의 자식이오. 괴물이지만 신성(神性)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녀석의 이빨은 전설 등급의 재조합 아이템 중 최상위의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리고 당신이 내민 이 체인 블레이드 역시 전설 등급의 아이템. 이 둘이 조합하면 꽤나 상위급의 신화 등급 무기가 만들어질 거요.”
알고 있다. 그걸 기대하고 헤파이스토스의 모루에 넣었다가 안 된다니까 이곳 판테온까지 온 것이다.
파베르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를 제작하려면 신의 허가증이 필요합니다. 허가증 없이 만드는 건 불법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때 대규의 머릿속에 신들을 볼 때마다 공략집에서 봤던 정보가 떠올랐다. 최근에 아이룸나 신전에 운명의 세 여신을 봤을 때도 이렇게 떠올랐지.
<운명의 세 여신은 불사(不死)의 존재입니다.>
<운명의 세 여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심연의 결계에 봉인을 할 수는 있습니다.>
<운명의 세 여신을 심연의 결계에 봉인하려면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그녀들 말고 아폴론, 아테나, 그리고 헤라클레스를 봤을 때도 저 문구들은 떠올랐었다.
아무래도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는 신들에게조차 꽤 위력적인 무기인 것 같았다.
‘그래서 함부로 제작해 줄 수 없다고 하는 건가.’
파베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고작 반신반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신화 등급의 무기를 제조하려면 신들의 허가증이 필요합니다. 허가증은 판테온의 신들, 즉 기간토마키아의 군대를 이끄는 신 중 한 명이 발행해야 그 효력이 있습니다. 그 허가증을 재조합할 무기들과 함께 모루에 놓아야 무기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건 생각해 보지도 못했는데.
대규는 파베르를 향해 물었다.
“그럼 판테온의 신이라면 어느 신에게 허가증을 받아 오든 상관없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신에게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와 카리브디스의 이빨을 다시 보관함에 넣은 뒤 대장간을 나섰다.
‘이거 완전 허탕 쳤잖아. 어떻게 해야 하지?’
문득 자신의 군대를 이끄는 아테나 여신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한번 부탁해 볼까?
하지만 쉽게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신에게 상해를 입힐 수도 있는 무기를 제작하는 일이다. 그 어떤 신이 그걸 흔쾌히 허락해 줄까.
‘그래도 한번 가 보자. 얘기라도 꺼내 보는 거야.’
어쨌든 자신은 첫 전투에서 공적을 세워 여신의 눈에 들지 않았던가.
다가올 기간토마키아의 전투에서 적과 열심히 싸우기 위해 무기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 여신은 어디 계실까? 지휘 사령부의 천막? 아니다. 지금은 전투 중이 아니니까 그곳에 없겠지.’
대규는 지도창에서 봤던, 신전들이 모여 있던 종교 구역을 떠올렸다.
‘혹시 그곳에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지 않을까?’
더 생각하지 않고 지도창을 띄웠다.
역시 똑똑한 공략집. 지도창의 한 부분이 노란 불빛으로 반짝였다.
손끝으로 눌러 보니.
<아테나 여신의 신전>
좋았어.
대규는 지도창에 표시된 아테나 여신의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대규는 곧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 도착했다.
신전으로 향하는 통로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일렬로 자라 있었다. 나무들 틈 곳곳에는 작은 신전과 제단들도 보였다.
메인 신전은 통로 맨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색의 대리석 기둥들이 신전의 지붕을 굳건하게 떠받들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신전답게 통로 곳곳에는 무기를 든 영웅들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대규는 메인 신전으로 향했다.
신전에 다가가자 일전에 기간토마키아 전투에서 봤던 산양 카페르 족의 병사들이 그를 막아섰다.
낯익은 산양 인간들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차갑게 말했다.
“신분을 대십시오.”
자신을 못 알아보다니.
아무래도 대규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병사들이 아닌 것 같았다.
대규는 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댔다.
“아테나 여신 군대 소속인 인간 영웅… 아니 세미데우스 김대규입니다. 3군단의 코르네우스 장군과도 함께 전투한 적이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병사 중 한 명이 신전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