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93화. 세미데우스 (1)
‘정말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이게 정말이라면 생명력 회복 포션이 필요 없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불사의 몸이 된 걸지도?’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꺼내 자신의 팔을 살짝 베어 봤다.
“아얏!”
물론 엄청 아프다. 반신반인의 육체가 됐다 해도 고통을 줄여 주진 않는 것 같았다. 뭐, 그건 근성 스킬로 맷집을 올리면 어느 정도 해결된다.
붉은 피가 벌어진 팔의 상처 틈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곧 피가 흐르는 속도가 눈에 띌 만큼 느려지더니 출혈이 멈추고, 상처의 갈라진 틈이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2분쯤 지나자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헐. 불사의 몸이라도 된 건가?’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자가 치유 능력으로 인해 생명력이 초당 5씩 회복됩니다. 외상이나 내상 모두 회복됩니다.>
<생명력뿐만 아니라 마나 역시 초당 1씩 회복됩니다.>
‘마나까지도?’
설명을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졌다.
앞으론 마나를 많이 소모하는 스킬을 쓸 일이 많을 것이다. 당장 헤라클레스에게 배운 일격 기술, 레툼 익투스도 쿨 타임은 없다지만 단번에 마나 100을 소모한다.
게다가 라의 목걸이로 마신들의 능력을 빌려 쓸 수 있는 상급 스킬들 역시 마나 소모가 엄청나다.
아포피스의 소환은 단번에 300을 소모하니까.
‘그러고 보니 세미 데우스가 되면서 권위가 올라서 3초 더 소환할 수 있겠구나.’
그뿐만 아니라 오시리스의 정원에서 풀들도 세 뿌리 추가로 채취해 올 수 있고 아누비스의 죽음의 군대 호령 역시 30명을 더 부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직 권위가 23이라서 죽음의 지배는 쓸 수 없구나.’
유일하게 사용 불가능한 스킬, 죽음의 지배.
반신반인 세미데우스가 됐는데도 쓸 수 없다니. 어떤 스킬인지 정말 궁금했다.
‘궁금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잖아. 일단 권위를 30까지 올린 뒤에 다시 생각하자.’
대규는 어느새 상처가 완전히 다 나아 버린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 자가 치유 능력은 정말 유용할 것이다.
긴박한 전투 중엔 생명력이나 마나가 깎여 나가도 회복 포션을 마실 틈이 없었다. 특히 보스전일 경우 빈틈을 보이기라도 하면 바로 치명상을 입기 십상이다.
현재 자신의 생명력은 3,090, 마나는 875였다.
생명력의 경우 초당 5씩 회복된다면 11분이면 모두 회복된다. 그리고 마나의 경우는 15분이면 가득 차오른다.
‘물론 생명력의 경우 치명상을 당하면 안 되겠지.’
치명상을 입으면 회복될 틈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바로 즉사할 테니까. 하지만 부상 정도는 이 치유 능력으로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
‘완전 불사의 몸이라곤 할 수 없지만 그대로 이 정도면 불사에 가까운 편이지. 그런데 이거 말고 다른 능력은 없는 건가?’
대규는 자신의 새로운 육체를 내려다보았다. 몸에선 여전히 은백색의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령스러운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지만, 내일 당장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무슨 신처럼 온몸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도 아니고.’
그러자 공략집이 다시 떠올랐다.
<세미데우스의 육체에서 퍼져 나오는 기운은 일반인들이 알아보지 못합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대규는 방 한구석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았다.
은백색의 빛 말고는 딱히 외관상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얼굴이 그전보다 잘생겨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어디가 어떻게 잘생겨졌다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는데 왠지 좀 더 잘생겨진 것 같았다. 꼭 연예인들이 티 안 나는 시술을 받고 온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몸 역시 그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 같았다. 키가 쑥 커지거나 근육이 울룩불룩하게 생긴 건 아닌데 좀 더 균형 잡힌 것 같고 전체적인 비율이 좋아진 것 같달까.
‘다리가 약간 길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전보다 옷발도 훨신 잘 받겠는걸.’
이것도 반신반인 육체의 능력인 걸까.
아무래도 등급이 높아질수록 외모도 훌륭해지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봐 왔던 신들의 외모는 모두 훌륭했다. 헤르메스, 아폴론, 아테나 모두 완벽하고 수려한 미남 미녀들이었다.
헤라클레스의 경우엔 얼굴에 상처가 많지만, 찬찬히 잘 뜯어보면 남성적으로 몹시 잘생긴 외모였다. 눈썹도 진하고 안와상융기, 즉 눈 뼈도 멋지게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아이룸나 신전의 사제장들이었던 운명의 여신들 역시 아름다웠지. 이거 만약에 신이라도 되면 거의 주연 배우 수준의 외모를 갖게 되는 거 아니야?’
그건 너무 나갔나…….
자신은 이제 겨우 반신반인 세미데우스가 된 상태다.
‘겸손해지자.’
정신을 차린 뒤, 이번 판테온의 시련에서 얻어 낸 결과물을 생각했다.
우선 두 번째 시련의 카리브디스를 해치우고 녀석의 이빨을 얻어 냈다.
그리고 블랙 등급 젬스톤 3개도 얻었고.
‘게다가 세미데우스가 됐으니 이제 판테온에 마음대로 입장할 수 있다! 이게 제일 중요하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보관함에서 카리브디스의 이빨을 꺼냈다.
[카리브디스의 이빨(전설)]
[바다의 지배자 괴물 카리브디스의 송곳니. 무엇이든지 맹렬하게 먹어 치우는 이빨로 그 어떤 가공된 쇠보다도 단단하고 날카롭다.]
거대한 이빨은 다시 봐도 정말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뾰족한 부분에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뜯겨 나갈 것 같았다.
이빨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무기였다.
헤파이스토스의 모루를 이용해 같은 전설 등급 아이템인 체인 블레이드와 합치면 신화 등급 무기가 탄생할지도 몰랐다.
‘지금 해 보자.’
대규는 보관함에서 모루를 꺼내 그 위에 이빨과 체인 블레이드를 올려놓았다.
‘제1 타르타로스에서 체인 블레이드를 만들 때, 무기들을 올려놓자 성공률이 적힌 메시지창이 떴었지.’
나오는 성공률을 보고 젬스톤을 투자할지 말지를 결정하려고 했다.
그러자 모루 위에는 예상과 다른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본 모루로는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 재조합이 불가능합니다.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를 제작하려면 판테온의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으로 가야 합니다.]
‘뭐야,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그럼 판테온으로 가야 하나.’
반신반인이 됐으니 입장에는 문제가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지금 당장 가서 무기를 만들어 버려?’
어차피 판테온에서 시간을 보낸다 해도 현실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게다가 새 육체를 얻어서 그런지 정신이 쌩쌩했다.
새로운 신화 등급 무기를 만들 생각에 벌써 기대감이 차올랐다.
어차피 밤은 길다!
‘그런데 판테온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기록의 신전에 세미데우스로 등록됐기 때문에 차원의 열쇠를 이용해 판테온을 입장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판테온의 세계에 입장하시려면 차원의 열쇠를 꺼내십시오.>
‘아항, 그렇군.’
대규는 보관함에서 황금빛의 작은 열쇠를 꺼냈다. 열쇠에서 은은한 무지갯빛이 흘러나왔다.
스스슥, 파밧.
곧 오피스텔 한가운데에 포탈이 열렸고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눈을 뜨자 판테온 도시의 광장이었다.
정말 이곳에 스스로 올 수 있게 됐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주변에는 반신반인들과 신들, 그리고 정령들이 마구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대장간으로 가자.’
대규는 능숙하게 대장간을 향해 걸어갔다.
대장간은 상업 지구의 맨 끝에 있었다. 지난번 헤라클레스를 찾아가는 히든 미션을 할 때 지도창으로 봤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지도창에 따르면, 이곳 판테온은 몹시 넓은 원형 모양의 도시다.
도시는 크게 대장간이나 상점가들이 밀집해 있는 상업 구역, 신들을 모시는 신전과 제단들이 모여 있는 종교 구역, 그리고 신들과 반신반인 정령들이 살고 있는 주거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예전에 아폴론이 영웅들을 가상 판테온에 데려가 보여 줬던 곳들은 상업 구역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다.
대규는 대장간이 있는 상업 구역으로 향했다.
상업 구역의 입구에는 커다란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날개 달린 투구와 날개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는 한 남자의 거대한 석상.
바로 헤르메스 신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헤르메스는 상업의 신이라고 했지.’
아무래도 그가 이 판테온의 상업 구역을 관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상점가들은 구역 내에 일렬로 좌르륵 늘어서 있었고 정령 상인들이 진귀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대규의 호기심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대장간에 가기 전에 한번 돌아 볼까.’
대규는 느긋하게 상점가를 구경했다.
상점뿐만 아니라 식당도 있었는데 향긋하고 고소한 음식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아폴론의 연회에서 먹었던 양고기 미루스 비덴스만큼 유혹적이고 중독적인 향기였다.
‘현실의 음식 사업에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중에 꼭 들러서 한번 음식을 먹어 봐야겠다.’
상점들에는 신기한 아이템들이 많았다.
그리고 일전에 가상 판테온에서 봤던 신수 백화점도 있었다.
신수 백화점의 문 앞 가판대에는 거대한 알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드래곤의 알이라고 적혀 있었다.
‘드래곤이란 게 정말 있단 말이야?’
정령들과 세미데우스들이 드래곤의 알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고 있었다.
“저 드래곤은 아직도 부화하지 않은 거야?”
“몇백 년 만에 구한 알이라잖아. 쉽게 부화될 리가 없지.”
“정말 드래곤이 나온다면 엄청나겠는걸.”
“그것보다 저런 드래곤을 길들일 수 있는 신은 몇 명쯤 될까?”
“판테온의 신들 수준은 돼야겠지. 그중에서도 젊은 신들에겐 무리일지도 몰라.”
들어 보니 드래곤이란 것은 엔간해선 길들이기 힘든 생물인 것 같았다. 하긴 판타지 소설에서도 항상 최고 존엄으로 묘사되는 생물체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젊은 신들도 길들일 수 없다니.
자신이 봐 왔던 헤르메스나 아폴론, 아테나 모두 젊은 신들이었다.
‘그들도 길들이기 힘든 생물체라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까?’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대규는 가판대에 놓인 거대한 드래곤의 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그의 발이 한 상점 앞에서 멈췄다.
검은 알약 10개가 든 유리병.
알약은 동글동글한 게 꼭 염소똥같이 생겼는데 은은한 하얀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격표는 보이지 않았다. 알약을 바라보자 공략집이 떠올랐다.
<스킬 복제 알약 10개>
<가격: 그레이 젬스톤 5개>
<효과: 전투 중 이 알약을 하나 먹으면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스킬을 똑같이 복제해서 한 번 쓸 수 있음. 대신 그 스킬에 필요한 마나량이 충분치 않으면 스킬을 복제할 수 없다.>
“헤헤, 손님, 안녕하십니까?”
깜짝이야.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몸뚱이에 돼지 들창코를 한 정령이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정령의 코밑엔 가느다란 수염이 간신배처럼 나 있었다. 아무래도 이 가게의 주인인 것 같았다.
주인은 대규를 바라보며 솰라솰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하, 저희 가게로 말할 것 같으면… 진귀한 물건들만 취급합니다! 판테온의 상점 중에서도 아주 유명하죠. 아, 스킬 복제 알약에 관심이 있으신가 보군요.”
그랬다. 이 알약은 예전에 가상 판테온을 거닐 때도 눈여겨봤던 물건이었다.
앞으로는 강력한 적이 나올 테고, 그들은 위협적인 스킬을 시전할 것이다. 그 스킬들을 복제해서 쓴다면 되게 좋을 것 같았다.
대규가 알약이 든 유리병을 집어 들자 가게 주인이 말했다.
“헤헤, 원래 가격은 그레이 젬스톤 20개지만 특별히 15개에 모시도록 하지요.”
‘뭐라고?’
다시 한 번 공략집을 본다. 분명 거기 적혀 있는 가격은 분명 그레이 젬스톤 5개였다.
‘이 자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