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92화. 판테온의 시련 (7)
칼리 여신은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맛있게 대규의 몸을 삼켜 버렸다.
물론 그와 달리 대규는 몹시 괴로웠다.
손톱 하나 남김없이 다 먹어 치운 여신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대규는 이제 완전히 육체가 소멸되고 의식만 남아 있었다.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고 오직 암흑뿐이었다.
‘난 죽은 건가?’
두근-
의식을 크게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
‘누구의 심장 소리지?’
그때 온몸이 뜨거워졌다. 아니, 몸이 없으니까 뜨겁다는 느낌만 의식에 강렬하게 전달됐다.
꿀렁꿀렁-
진득하게 점성이 있는 액체가 자신 주변에서 물결치는 느낌이 전해졌다.
점점 더 뜨거워졌다.
번쩍!
대규는 눈을 떴다.
어느새 자신은 아주 좁은 공간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몸은 여신이 다 잡아먹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도통 모르겠다.
자신이 있는 공간에는 뜨뜻한 액체가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좀 전에 느꼈던 점성 있는 액체였다.
하지만 숨 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꼭 공략집의 버블 막이 작동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공간은 아주 협소해서 대규는 몸을 펼 수 없었다. 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의 품속에 들어온 것처럼 편안했다.
그런데 자신의 배꼽 쪽에서 이상한 빛줄기가 보여다.
그곳엔 은백색의 빛이 새어 나오는 한 개의 줄이 연결돼 있었다.
탯줄이었다.
정확히는 탯줄 안에 은백색의 기운이 들어 있었다. 그 기운은 대규의 배꼽에 연결된 탯줄을 통해 그의 몸속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공략집이 떠올랐다.
<칼리 여신의 자궁 속에서 반신반인의 육체를 지닌 세미데우스(Semideus)로 다시 태어나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탯줄의 은백색 기운은 반신반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빛이로군.’
이곳은 칼리 여신의 자궁이고 몸을 가득 둘러싸고 있는 액체는 그녀의 양수였다.
‘어쩐지 이렇게 쭈그리고 있는데도 엄마의 품속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했더니’
자신은 칼리 여신의 자궁 속에서 태아의 상태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탯줄을 통해 반신반인의 기운인 은백색의 빛을 공급받는 것 같았고.
‘그런데 이곳에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거지?’
여신의 출산 예정일을 알지 못했다. 설마 인간처럼 10개월 동안 배 안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그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여신의 자궁 속은 아주 편안했다.
하지만 얼마 후, 대규의 뒤통수 근처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밝은 빛은 저 멀리 세로로 가느다랗게 벌어진 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대규의 몸은 그 틈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이제 편안한 자궁의 공간이 아니라 좁은 통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몸 전체가 조여드는 것처럼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다.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통로는 너무 좁았다. 아주 천천히 좁은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의 몸은 그 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정신을 차리니 자신은 여신의 거대한 두 다리 사이에 있었다.
온몸엔 축축한 양수가 묻어 있었고, 자신의 배꼽에 달린 은백색의 빛 탯줄은 여신의 몸속과 여전히 연결돼 있었다.
곧 대규를 여신에게 끌고 갔던 날개 달린 괴물들이 와서 배꼽에 연결된 탯줄을 끊어 줬다.
“호오…….”
대규는 자신의 몸을 쳐다보며 감탄 섞인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몸에서는 그전에 봤던 반신반인들의 몸처럼 은백색의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말 반신반인 세미데우스가 된 건가?'
대규는 자신의 상태창을 불러 봤다.
상태창을 본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김대규(세미데우스)
Lv. 1(00.00%)
생명력 3,090/3,090
마나 875/875
근력 136
민첩 135
지능 135
운 8(+5)
권위 20
이름 옆에 적혀 있는 자신의 등급이 인간 영웅에서 세미데우스로 바뀌었다.
아이템 일곱 개를 문지기한테 내줘서 아이템으로 인한 상승 효과는 하나도 적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레벨 1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스탯이나 능력치들은 레벨 100인 인간 영웅일 때보다 월등히 높았다.
우선 생명력은 1,000이, 마나 한계는 300이 올랐다.
게다가 근력, 민첩, 지능 각 스탯은 30씩 올랐다. 그리고 고정 스탯인 운과 권위도 각각 3씩 상승했다.
만약 일곱 개의 아이템을 돌려받는다면 저기서 더 오르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의 육체는 팔다리 멀쩡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은은하게 은백색의 빛이 나는 것만 빼고 말이다.
‘좀 더 몸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현재로선 새로운 육체가 상태창의 능력들 말고 뭐가 어떻게 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메시지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판테온의 시련을 모두 완수한 대가로 반신반인 세미데우스의 육체를 얻었습니다. 이제 시련의 마지막 보물을 줍니다.]
[시련을 통과하며 얻은 세 가지의 보물을 갖고 아이룸나 신전으로 돌아가면 운명의 세 여신이 당신의 이름을 판테온의 기록의 신전에 각인시킵니다.]
맞다, 보물.
어느새 칼리 여신은 출산을 마치고 자신의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규에게 말했다.
“축하한다. 이제 그대는 재생의 의식을 극복해 낸 대가로 새로운 육체를 얻게 됐다. 이건 이 시련을 통과했다는 징표, 보물이다.”
허공에 황금색 상자가 생겨났다.
상자를 열자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촤아악.
그 안에는 속이 훤히 다 비치는 투명한 천 한 조각이 있었다. 투명했지만 천에서는 은은한 무지갯빛이 감돌았다.
[운명의 천(신화)]
[운명의 세 여신이 수를 놓을 때 사용하는 천. 이곳에 운명의 실과 바늘로 이름이 수놓아진 자는 그 존재의 운명을 판테온의 기록의 신전에 각인할 수 있다.]
역시 천과 바늘, 실이 한 세트의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방금 메시지창의 내용도 그렇고 운명을 기록의 신전에 각인한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지?’
일단 신전으로 돌아가 보자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어쨌든 정말로 판테온의 시련을 극복했구나…….’
온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칼리 여왕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은 뒤 말했다.
“인간 영웅… 아니, 새로 태어난 세미데우스여, 판테온의 시련을 극복한 걸 축하한다. 앞으로 그대 앞에 신들의 가호가 함께하길 빌겠다.”
쿠구궁-!
여왕을 감싸고 있었던 수정 기둥들이 땅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제단의 왕좌도 땅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그곳은 아무도 없는 황량한 검은 사막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곧 주변의 배경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 * *
정신을 차린 대규는 아이룸나 신전의 바닥에 누워 있었다.
“으으…….”
신음을 내며 몸을 바닥에서 일으켰다. 고개를 들자 테라스의 다섯 사제장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운데 사제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대규에게 말했다.
“그대는 유일하게 판테온의 시련을 완수했습니다.”
'갑자기 웬 존댓말?'
아무래도 인간 영웅에서 반신반인이 됐다고 그 대우도 바뀐 것 같았다.
그것보다 유일하게 시련을 완수했단 말에 주위를 둘러봤다.
광장에 나머지 영웅들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실패해서 망자의 길로 접어든 것인가…….’
대규는 칼리가트 사원으로 가기 직전 자신의 몸 주변을 떠돌았던 검은 연기 형상 망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머지 인간 영웅들 역시 그 연기로 변해서 지금쯤 망자의 길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소름 끼치는군.’
그때 테라스의 사제장이 대규에게 예의 바르게 말했다.
“보물을 꺼내 주십시오.”
대규는 보관함에서 운명의 실과 바늘, 그리고 천을 차례대로 꺼냈다.
실과 바늘, 천은 두둥실 허공 위로 떠오르더니 사제장들이 서 있는 테라스의 위치까지 올라갔다.
가운데 사제장은 실과 바늘, 천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반신반인 세미데우스로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존재를 판테온 기록의 신전에 각인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가운데 사제장은 나머지 사제장 네 명 중 세 명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 세 명은 앞으로 걸어 나온 뒤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스르륵.
그녀들은 모두 아름다운 여성들이었다. 몸에서는 은은한 황금빛이 여전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들을 바라보자 차원의 틈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신 이름: 운명의 세 여신(Moerae)
특징: 존재의 운명을 관장하는 세 여신으로 판테온 시련의 사제장들이다. 시련에 든 인간 영웅이 운명의 실과 바늘, 천을 준비해 오면 반신반인이 된 그의 존재를 기록의 신전에 수놓아 각인시킨다.
이들이 정하는 운명과 존재의 기록은 절대적이어서 신들의 신, 제우스조차도 그들의 기록을 바꾸지 못한다.
기록의 신전에 여신들이 수를 놓게 되면 시련을 극복한 인간 영웅은 판테온의 세계에서 완벽하게 반신반인의 존재로 등록된다.
<운명의 세 여신은 불사(不死)의 존재입니다.>
<운명의 세 여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심연의 결계에 봉인을 할 수는 있습니다.>
<운명의 세 여신을 심연의 결계에 봉인하려면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요약하자면, 시련을 모두 통과한 인간 영웅이 반신반인의 육체를 얻고 난 뒤, 이 보물들을 그녀들에게 주면 그녀들이 기록의 신전이란 곳에 영웅을 등록시켜 주는 것 같았다.
꼭 출생 기록을 구청에 등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들은 각각 실, 바늘, 천을 들고 있었다.
스스스.
실이 저절로 움직이며 바늘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바늘은 허공에서 요란하게 춤을 추며 천을 찌르고 들어갔다.
바늘이 춤을 추는 사이, 천에는 대규의 이름 석 자가 가지런하게 수놓아졌다.
천 안에서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는 자신의 이름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름이 다 수놓아지자 운명의 천은 파밧,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여신 중 한 명이 대규를 바라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미데우스여, 그대의 존재는 무사히 기록의 신전에 각인됐습니다. 이것으로 온 판테온의 세계가 당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모든 시련을 종료합니다.”
[운명의 여신들이 성공적으로 당신의 존재를 기록의 신전에 각인시켰습니다.]
[시련을 완수한 대가로 블랙 등급 젬스톤 3개가 주어집니다.]
운명의 여신 중 한 명이 공중에 손을 휘두르자 대규 앞에 손톱만 한 검은 보석, 블랙 등급 젬스톤이 생겨났다.
[블랙 등급 젬스톤]
[판테온의 세계와 상위 기간토마키아 전투에서 희귀하게 구할 수 있는 보석. 블랙 등급 젬스톤 1개는 레드 등급 젬스톤 30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드디어 블랙 등급 젬스톤 3개를 얻었다.
‘이제 공략집 업데이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됐어.’
그런데 어느 순간 문지기들에게 벗어 줬던 일곱 개의 아이템들이 대규의 몸에 걸쳐져 있었다.
“의식을 치르기 위해 벗었던 그대의 아이템들은 우리가 잘 맡아 두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이템들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다섯 명의 사제장들은 테라스의 의자에서 일어나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까만 신전의 바닥엔 마법진이 하나 소환됐고 대규는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드디어 판테온의 시련이 끝났다.
빨리 오피스텔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오피스텔로 돌아온 대규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물론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다. 꼭 신전에 갔다 왔던 게 꿈처럼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상태창을 불러 봤지만 이름 옆엔 여전히 세미데우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이 반신반인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와 뭐가 다른 걸까?’
단순히 생명력과 마나 같은 상태창의 스탯만 더 높은 건 아닐 것이다.
은백색의 빛이 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공략집이 떠올랐다.
<반신반인의 세미데우스 육체는 자가 치유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게 되면 그 상처를 천천히 회복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