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91화. 판테온의 시련 (6)
붉은 악마의 형상을 한 문지기는 대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대가를 치르란 말인가.
“너의 손에 낀 반지를 내놓아라.”
문지기는 닥튈로이의 반지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반지는 몹시 귀한 아이템이다.
반지를 건네주기 싫어진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움켜쥐었다.
정 안 되면 문지기를 해치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공략집이 떠올랐다.
<칼리가트로 향하는 망자의 길에 있는 일곱 문지기는 인간 영웅이 해치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일곱 문지기들에겐 문을 통과하는 대가로 걸치고 있는 아이템을 하나씩 건네줘야 합니다. 대신 세 번째 시련을 무사히 끝마치면 아이템들은 다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대규는 공략집의 메시지를 읽은 뒤 자신이 몸에 걸치고 있는 아이템을 둘러보았다.
우선 닥튈로이의 반지와 네메시스 방패, 그리고 성장형 아이템 세 개로 이루어져 있는 황금 양털 조끼.
그리고 라의 목걸이와 무기인 체인 블레이드, 갑옷인 흑린갑, 마지막으로 헤르메스의 신발까지 해서 총 일곱 개의 아이템이었다.
‘일곱 명의 문지기라면… 이 모든 아이템을 결국 다 대가로 바쳐야 한단 말인가?’
이 일곱 아이템은 버릴 것 하나 없이 모두 뛰어난 아이템들이다. 쉽게 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시련을 무사히 끝마쳐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선 저 문지기를 통과해 칼리가트로 가야 한다.’
대규는 닥튈로이의 반지를 손가락에서 뺀 뒤, 붉은 악마 문지기에게 건넸다.
문지기는 반지를 받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붉은 문을 열어 주었다.
끼이익.
문이 열렸고, 대규는 붉은 문을 지나 붉은 강물이 흐르는 강둑 위에 다다랐다.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피의 강이었다. 나룻배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대규는 신고 있는 헤르메스의 신발을 이용해 공중을 날아 강을 건넜다.
강에서 나는 피비린내는 공중에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최대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 애쓰며 가까스로 멀미가 오는 걸 참았다.
강 건너편에 도착하자 이번엔 온통 주황빛의 뜨거운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암석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걷자 두 번째 문에 도착했다.
문은 밝은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호박 보석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다.
문 양쪽에는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문지기 역시 머리에 수십 개의 양초가 타오르는 관을 쓰고 있었다.
문지기가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 영웅이여, 당신은 살아 있기 때문에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망자의 길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팔에 찬 방패를 내놓으시지요.”
문지기는 신기하게도 팔에 찬 팔찌가 방패라는 걸 알아보고 있었다. 팔찌형의 네메시스 방패를 내주자 그는 문을 열어 줬다.
얼마 후, 용암이 흐르는 강둑에 다다랐고 신발을 이용해 그곳을 건넜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엄청났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나마 나았지만 통구이가 될 것 같았고, 가까스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용암 강을 건너자 이번엔 샛노란 해바라기들이 울창하게 피어 있는 꽃밭이 등장했다. 그런데 해바라기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대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줄기를 꿈틀거렸다.
눈앞에 보이는 세 번째 문 역시 개나리처럼 샛노란 색이었고 문지기의 몸에는 노란 나비 떼들이 잔뜩 둘러싸고 있었다. 그 얼굴은 나비 떼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번 문지기는 문을 통과하는 대가로 황금 양털 조끼를 원했고 대규는 군말 없이 그것을 벗어 줬다.
노란 문을 통과하자, 온통 유황으로 뒤덮여 악취가 나는 구역이 대규를 맞이했다.
이후 초록색 지역, 파란색 지역, 보라색 지역을 통과했고 각 문의 문지기들에겐 라의 목걸이와 체인 블레이드, 그리고 헤르메스의 신발을 벗어 줬다.
이제 대규는 몸에 흑린갑만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마지막 일곱 번째 문에 이르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거대한 까만 문이 우뚝 솟아나 있었다. 땅바닥 역시 숯가루처럼 까만 모래로 뒤덮여 있었다.
‘저 문은……!’
일곱 번째 문은 꽤 낯이 익었다.
처음 아이룸나 신전에 소환돼서 봤던 신전의 까만 대문과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그 문보다 크기는 두 배 정도 컸다.
자신보다 한참 큰 거대한 문을 보자 위압감이 엄습해 왔다.
심지어 문지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휘이잉-
그때 차가운 칼바람이 대규의 몸을 스쳤다.
여태까지 살면서 느꼈던 추위와는 전혀 다른, 캄캄한 암흑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지독한 추위였다.
흑린갑의 비늘을 뚫고 들어온 추위는 대규의 몸속으로 속속들이 전해졌다.
저도 모르게 두 팔로 몸을 감싸며 떨기 시작했다.
‘대체 문지기는 어디 있는 거야?’
얼마 후, 발밑의 까만 모래가 기둥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스스슥.
곧 모래 기둥은 사람 형태의 겉모습을 갖췄다. 하지만 얼굴엔 이목구비도 없고 팔과 손도 대충 달려 있었다.
그것이 손 하나를 내밀며 보이지도 않는 입으로 말했다.
“인간 영웅이여. 그대는 칼리가트로 들어가기 위해 마지막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규는 입고 있던 흑린갑을 벗어서 그것의 손에 쥐여 줬다.
걸치고 있던 온 아이템을 벗자 대규는 이제 완전한 알몸 상태였다.
추위가 조금 전보다 더욱 거세게 온몸을 때렸고, 이빨이 후들거리며 떨렸다.
끼이익-
아이룸나 신전의 문과 똑같이 생긴 거대한 까만 문이 대규의 몸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만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먹처럼 검은 강이 흐르고 있는 강둑이 보였다.
그 검은 강은 문지기를 통과하며 여태까지 봐 왔던 그 어떤 강들보다 물살이 훨씬 빨랐다. 마치 거대한 검은 뱀이 강둑 사이로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헤르메스의 신발이 없는데 어떻게 건너야 하지?’
저 정도 물살에 수영은 무리였다.
그때 마침 강둑 구석에 매여 있는 작은 나룻배가 한 척 보였다. 대규는 배에 올라 노를 저으며 먹물 같은 까만 강을 헤쳐 나갔다.
맞은편 강둑에 다다라 땅에 발을 내딛자 이상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살아 있는 자다…….’
‘녀석의 육체… 먹음직… 스러워 보여…….’
주변을 둘러보니 검은 그림자 같은 것들이 자신의 몸 주위를 마구잡이로 떠돌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검은 연기로 만들어진 형상 같았는데 이리저리 허공을 떠돌며 대규에 대해 속삭이고 있었다.
그것들이 몸에 닿을 때마다 싸늘한 한기와 불쾌한 기분이 여과 없이 느껴졌다.
얼마 후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시련의 마지막 장소인 사원 칼리가트(Kalighat)에 도착했습니다.]
[죽음의 여신 칼리(Kali)를 배알한 뒤 ‘재생의 의식’을 무사히 치르면 시련을 통과하게 됩니다.]
의식을 치르기만 하면 된다고?
전투도 아니고, 유혹을 이겨 낼 일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재생의 의식이 대체 뭔지 감이 안 잡혔다. 공략집을 작동시켜 재생의 의식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굉음이 들렸다.
쿠구궁-
주변의 바닥에서 수정 기둥들이 높게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기둥들에 둘러싸인 넓은 홀이 생겨났다.
홀 중앙에는 검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높은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는 거대한 왕좌가 놓여 있었다. 거기엔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검은 피부에 검은 입술을 지닌 그녀는 아주 아름답게 생겼지만, 상체에는 네 개의 팔이 돋아나 있었다.
그녀는 황금빛과 주홍빛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왕관을 쓰고 있었으며 수많은 보석을 치렁치렁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위로 올려진 그녀의 까만 생머리는 마치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바람에 휘날리는 것 같았다.
그때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신 이름: 칼리(Kali)
특징: 판테온의 최종 시련을 관장하는 죽음의 여신. 인간 영웅을 반신반인의 육체로 재탄생시키는 의식인 ‘재생의 의식’을 주관한다.
<칼리 여신은 불사(不死)의 존재입니다.>
<칼리 여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심연의 결계에 봉인을 할 수는 있습니다.>
<칼리 여신을 심연의 결계에 봉인하려면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설명을 보아하니 재생의 의식은 반신반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의식인 것 같았다.
칼리 여신의 몸에선 여태까지 봤던 판테온의 신들과 달리 검은빛이 은은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여신은 가만히 알몸 상태의 대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고요했다.
곧 그녀의 검은 입술이 열렸다.
“인간 영웅이여,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재생의 의식을 치르고 세 번째 시련을 통과하러 왔느냐?”
“그렇습니다.”
대규가 공손하게 대답하자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영웅이여, 의식을 치르기 위해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여신이시여, 저는 더 이상은 가진 게 없습니다. 문지기들에게 제가 걸친 아이템을 모두 내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알몸으로 당신을 알현합니다.”
“그건 당연하다. 이곳으로 오는 망자의 길은 죽은 자들이 속한 세계다. 따라서 이곳에 들기 위해선 모든 걸 다 벗고 와야 한다. 태어날 때 알몸으로 태어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문지기들이 몸에 걸친 아이템들을 달라고 했던 거군.
여신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는 알몸으로 이곳에 왔다 해도 죽은 자가 아니다. 그 상태로는 재생의 의식을 치를 수 없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이렇게 찾아왔는데 의식을 치를 수 없다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규에게 여신이 말했다.
“…그대는 벌거벗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벌거벗는 것 이상?’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반신반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려면 기존의 인간 육체를 포기해야 합니다. 여신이 당신의 몸을 먹어 치우는 재생의 의식을 마치면 당신은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됩니다.>
<재생의 의식을 견뎌 내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버리면 당신은 영원히 이곳 칼리가트에서 망자로 존재하게 됩니다.>
망자라 하면 이곳에 올 때 봤던 그 기분 나쁜 연기 형상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여신이 나의 몸을 먹어 치운다니?’
대규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공략집의 메시지창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가죽 날개가 달린 까만 괴물 두 마리가 나타나 대규의 양팔을 잡아채고 날아올랐다.
괴물들에 의해 날아오른 대규는 칼리 여신의 얼굴 앞에 다다랐다.
여신은 네 개의 팔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팔에는 날카로운 검이 들려 있었다.
“자, 잠깐만…….”
서걱-
여신이 사정없이 검을 휘둘러 대규의 목을 단번에 베어 버렸다.
대규의 목은 제단 아래쪽으로 떨어졌고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하지만 대규는 죽지 않았다. 여전히 의식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목이 잘린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대규의 의식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으아아아!
의식 속에서 대규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물론 바닥에 떨어진 그의 머리는 조용했다.
날개 달린 괴물 한 마리가 대규의 머리통을 들고 여신의 검은 입술 앞에 가져갔다.
여신은 검은 입술을 벌려 대규의 얼굴을 통째로 삼켜 버렸다.
으아아아악!
다시 한 번 대규는 의식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의식이 점점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통은 점점 선명해졌고 버티기 힘들어졌다.
의식을 놓아 버리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시련 극복은 실패다!’
현실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검은 연기의 망자로 평생 살아가야 한다.
‘그럴 순 없다……!’
여신은 대규의 머리를 꿀꺽 삼킨 뒤, 다른 팔로 몸통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만족스럽게 말했다.
“오래간만에 아주 맛있는 육체로군.”
말을 마친 그녀는 대규의 몸통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