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화. 판테온의 시련 (5)
카리브디스의 몸속 혈관들은 엄청나게 컸다.
모세혈관만 해도 거의 굵기가 2미터 정도였고 동맥으로 보이는 굵은 혈관들은 굵기가 5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터널 같았다.
공략집을 작동시키자 수많은 혈관들이 흑백으로 표시됐다. 그리고 그중에서 유일하게 하나의 혈관이 붉은빛으로 빛났다.
‘저게 심장으로 가는 혈관이로군.’
굵기도 가장 굵었다. 설명을 보니 심장으로 통하는 대정맥이었다.
혈관 속으로 들어가 혈류를 통해 심장으로 가야 한다. 아직은 몸을 감싸고 있는 버블 막이 지속되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대규는 붉은빛으로 빛나는 대정맥 쪽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혈관은 투명했고 그 안을 흐르는 검은 혈액이 보였다. 아무래도 카리브디스의 피는 먹물처럼 검은 것 같다.
대정맥을 체인 블레이드로 찌르자 두꺼운 혈관이 살짝 벌어졌고 그 틈으로 검은 혈액이 흘러나왔다.
벌어진 혈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쉬이익-
혈관 속의 혈류는 엄청나게 빨랐다. 대규는 조심스럽게 카리브디스의 피에 몸을 맡겼다. 급속도로 미끄러지는 워터파크의 미끄럼틀을 타는 것 같았다. 물론 코끝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투명한 혈관 막 너머로 저 멀리 거대한 구조물이 보였다.
‘저게 심장이야?’
심장이 아니라 꼭 거대한 암석처럼 생겼다. 크기는 대규의 탕꼬가 있는 준 빌딩만 했다.
암석 심장 주변에는 혈관들이 그물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때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카리브디스의 심장.
특징: 단단한 암석으로 만들어진 심장. 카리브디스의 온몸에 어둠의 피를 공급한다. 우심실 안에 카리브디스의 약점인 심장의 정수가 위치해 있다. 이 정수를 공격해야 심장을 파괴할 수 있다.
둥- 둥-
거대한 박동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암석 심장은 들썩이며 움직였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온몸이 울릴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우심실이라면…….’
대규는 지도창을 확인했다. 우심실은 현재 대규가 있는 혈관인 대정맥이 심장의 판막을 지난 뒤 피를 공급하는 곳이다. 그리고 공급된 피는 폐동맥으로 이동해 다시 심장을 빠져나간다.
우심실 안쪽에 노란색으로 빛나는 표시가 보였다. 아무래도 심장의 정수인 것 같다.
심장에 진입하자 혈류는 더욱 강해졌고, 전해지는 압력도 거세졌다.
버블 막의 효과는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다.
‘5분 안에 심장의 정수를 파괴해야 한다!’
드디어 판막을 지나 우심실에 들어섰다. 정수는 심실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꼭 자그마한 바위처럼 생겼다.
자세히 보니 한가운데는 고양이의 동공처럼 세로로 가느다랗게 틈이 갈라져 있고 그 안쪽에선 시뻘건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심장이 아니라 눈알같이 생겼다. 예전에 했던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오버마인드 같은 비주얼이었다.
어쨌든 저 정수를 파괴하면 된다.
대규는 혈류를 타고 정수 앞을 지나갈 때를 노려 공격하기로 했다. 그 앞을 스쳐 지나가는 건 기껏해야 1초다. 그때 일격을 정수에 명중시켜야 했다.
곧 정수가 눈앞에 다가왔다.
3m… 2m… 1m…….
지금이다!
“레툼 익투스!”
살기를 품은 수십 개의 검광들이 정수를 향해 날아갔다. 일격의 기운은 정수의 한가운데 갈라진 붉은 틈을 노리고 정확히 날아들었다.
카카캅!
검광을 감지한 정수는 몸체를 오그라뜨리며 표피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깡!
죽음의 일격이 명중했지만, 암석 표피에 약간 금이 갔을 뿐이다. 힘이여, 솟아라 스킬이 지속된 상태에서 스킬을 썼는데도 이 정도라니.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조금 지나면 이놈의 혈류를 타고 우심실을 빠져나가게 된다.
레툼 익투스를 몇 번이고 연달아 시전했다. 그러자 점점 정수의 단단한 표피가 부서져 나갔다.
대규의 몸이 완전히 우심실을 빠져나갈 때쯤 정수는 완전히 파괴됐다.
우우우우웅-!
정수가 파괴되자마자 검은 혈액이 사정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굉음과 진동이 울렸다. 아무래도 카리브디스가 심장을 공격당한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이제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카리브디스를 해치워도 녀석의 몸에 갇혀 죽으면 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다.
대규는 지도창을 켰다. 어느새 자신의 몸은 폐동맥을 따라 심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폐동맥이 위와 가까워졌을 때 대규는 바로 체인 블레이드를 휘둘러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위벽을 가른 뒤 그 안으로 들어갔다.
대규가 정수를 파괴하고 온 사이, 위 속의 바닷물은 다 소화가 끝나 위는 텅 빈 상태였고, 부글부글 끓고 있는 위액만이 위 바닥에 조금 남아 있었다.
위액이 찰박거리는 바닥을 피해 헤르메스의 신발로 허공을 박차고 식도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목구멍을 통과해 입안에 도착했다.
“크어어어어!”
심장을 공격당한 카리브디스는 연신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녀석의 입안에서 그 비명을 여과 없이 듣고 있자니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저 멀리 이빨 틈 사이로 바깥의 바닷물이 보였다. 대규는 귀를 막고 이빨 사이로 빠져나가 상공 위쪽으로 최대한 날아올랐다.
한참 날아오른 뒤 아래를 내려다봤다.
‘장관이군.’
바닷물이 거세게 출렁이고 있었다. 거대한 암석 섬을 닮은 카리브디스는 드디어 그 몸체를 드러낸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심장이 파괴된 탓인지 녀석의 몸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유조선에서 기름이 유출된 것처럼 녀석의 까만 핏물은 순식간에 푸른 바닷물을 검게 물들였다.
얼마 후, 굉음을 내며 카리브디스의 거대한 몸체는 바다 속으로 영영 가라앉아 버렸다.
눈앞에 시련을 극복했다는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두 번째 시련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보상과 신전으로 가져갈 보물을 줍니다.]
공략집이 분명 카리브디스를 쓰러뜨리면 보상이 있다고 했다. 녀석의 이빨이었나.
눈앞의 허공에 두 개의 상자가 떠올랐다.
첫 번째 상자를 열자 거대한 원뿔 모양의 이빨이 나왔다.
[카리브디스의 이빨(전설)]
[바다의 지배자, 괴물 카리브디스의 송곳니. 무엇이든지 맹렬하게 먹어 치우는 이빨로 그 어떤 가공된 쇠보다도 단단하고 날카롭다.]
그런데 이 이빨로 뭘 해야 하는 거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마침 공략집의 설명창이 떴다.
<카리브디스의 이빨은 기존의 무기와 합체시켜 무기를 강화시킬 수 있는 귀중한 물건입니다.>
‘이 역시 기가스팔라스의 가죽처럼 다른 아이템을 강화할 수 있는 아이템이로구나.’
이젠 그 자체만으로 쓸 수 있는 아이템보다도 이렇게 다른 아이템을 강화시킬 수 있는 아이템들이 등장하는 것 같았다.
‘제1 타르타로스에서 헤파이스토스의 모루를 얻어 두길 잘했어. 그렇다면 이 이빨은…….’
대규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체인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제1 타르타로스에서 헤파이스토스의 모루를 얻자마자 바로 사용해서 만든 검.
그동안 체인 블레이드를 잘 사용해 왔지만, 앞으로는 더욱 강력한 무기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론 기가스 팔라스처럼 특정 등급 이상의 무기로만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들이 나타날 것이다.
‘잠깐, 분명 같은 등급의 아이템을 놓고 재조합에 성공하면 상위 등급의 아이템으로 생성됐던 것 같은데.’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만들기 위해서 보레아스의 검과 클뤼티오스의 플레일을 모루에 올렸을 때, 눈앞에 떴던 메시지창을 떠올렸다.
<2개 이상의 같은 등급의 아이템을 올려놓을 경우 재조합할 수 있습니다. 성공 시 상위 등급의 아이템으로 생성됩니다. 성공률은 랜덤이고, 잼스톤 1개당 성공율이 10% 상승합니다. 조합 실패 시 낮은 확률로 아이템이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보레아스의 검과 클뤼티오스의 플레일은 둘 다 희귀 등급 무기였다. 그래서 재조합에 성공해 전설 등급의 무기 체인 블레이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지금 지니고 있는 체인 블레이드와 카리브디스의 이빨은 모두 전설 등급이니까…….
‘재조합에 성공하면 신화 등급 무기가 생성된다!’
물론 성공율은 랜덤이라 보장할 수 없다.
‘그땐 운에 맡겼지만 이번엔 젬스톤을 써서 성공시키겠어.’
시련을 마치고 돌아가면 이 둘을 재조합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나머지 시련을 별 탈 없이 해치워야 했다.
다음으로 보물이 들어 있는 황금 상자를 열었다. 황금 상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건?’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은 작은 바늘이었다.
[운명의 바늘(신화)]
[운명의 여신들이 운명의 실을 꿰어 사용하는 바늘입니다. 운명의 실을 이 바늘에 꿰어 천에 수를 놓게 되면 한 존재의 운명이 판테온의 신전에 각인됩니다.]
첫 번째 시련에서 얻어 낸 실타래와 세트 아이템이었다.
바늘에 실을 꿰어 천에 수를 놓는다는 설명이 있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마지막 선물은 수를 놓을 수 있는 천인 것 같다. 그 세 개의 아이템을 모아서 아이룸나 신전으로 돌아가는 게 이 모든 시련의 완성일 것이다.
그럼 이제 마지막 시련인가.
무사히 끝마치고 싶었다. 여태까지 해 왔던 전투들과 달리 이곳 판테온의 시련은 하나씩 해치울수록 기력이 쭉 빠졌다.
[마지막 시련 장소로 이동합니다.]
* * *
신전의 광장에 누워 있는 대규의 몸에서 다시 한 번 빛이 뿜어져 나왔다.
두 번째 시련도 완료했다는 표시였다.
“운명의 바늘도 움직였다.”
가운데에 앉아 있는 사제장이 중얼거렸고 그들은 모두 누워 있는 대규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여덟 명 중 다섯 명이 망자의 길로 들었다. 하지만 저 인간 영웅은 홀로 세 번째 시련에 들고 있었다.
한 사제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빨리 세 번째 시련에 도전하는 영웅이 생겨날 줄이야!”
그러자 맨 오른쪽에 있는 여자 목소리의 사제장이 가운데 사제장에게 말했다.
“이제 ‘그곳’의 문을 열 때다. 인간 영웅을 마지막 시련 장소인 ‘그곳’으로 안내할 때다.”
가운데 사제장은 대규를 바라보았다.
그는 세 번째 시련에 든 인간 영웅을 위해 ‘그곳’을 열어 주는 문지기였다.
한동안 ‘그곳’을 연 적이 없었다.
그는 양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사제장의 손끝에서 황금빛의 신비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와 허공을 맴돌았다.
황금빛 기운은 대규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번쩍!
그 순간 대규의 눈동자가 떠졌다.
잠시 후, 대규의 육체는 망자의 길에 들었던 다른 영웅들처럼 사르륵 사라져 버렸다.
가운데 사제장은 근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 영웅은 ‘그곳’에 들었다. 영웅이여, 그대는 이번 시련에서 그대의 육체를 온전히 버려야 할 것이다.”
* * *
“으헉!”
대규는 비명을 질렀다.
분명 보았다.
갑자기 눈동자가 떠졌고 자신은 아이룸나 신전의 광장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후드를 뒤집어쓴 다섯 명의 사제장이 테라스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중 가운데 서 있던 사제장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고 황금빛 기운이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같이 찌릿한 기분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곳으로 이동했다.
대규가 서 있는 곳은 붉은 사막이었다. 발아래에는 붉은 모래들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고, 하늘 역시 노을이라도 내린 듯 붉었다.
몇십 분 정도 사막을 걷자 커다란 문이 보였다.
문 앞에는 주황색 옷을 입고 머리엔 진분홍빛의 뿔이 달린 빨간 피부의 동물에게 제지를 받았다.
그가 지키고 있는 문 역시 선혈처럼 붉은색이었고, 문 위에는 루비, 석류석 같은 붉은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당신은 살아 있기 때문에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망자의 길을 통과할 수 없다.”
대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은 두 개의 시련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다. 그런데 망자의 길이라니?
그 순간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마지막 시련 장소, 망자의 길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문지기들을 통과하여 최후의 신전 칼리가트(Kalighat)에 도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