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화. 판테온의 시련 (4)
맨 오른쪽 의자에 앉아 있는 사제장이었다. 목소리는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였지만, 후드를 눌러써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인간이 욕망의 힘을 이기기는 어려운 법.”
인간이란 존재는 사실 나약하다. 이리저리 휩쓸리고 욕망에 곧잘 넘어간다. 그걸 극복해 내는 것이 반신반인이 되는 최우선적 조건이었다. 욕망에 휘둘리는 자는 반신반인이 될 수 없다.
또다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이번엔 긴 머리의 젊은 여성 영웅이었다. 그녀 역시 모래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영웅들에 시련에 대해 설명했던 가운데 앉아 있는 사제장이 웅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두 명이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첫 번째 시련에서 망자의 길로 들어섰다.”
망자!
평생 이곳의 시련 속에 갇혀 사는 존재다.
사라진 영웅들은 신전의 지하에 있는 공간에 갇히게 된다. 그곳엔 태초부터 반신반인이 되려고 이곳 시련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인간 영웅들의 혼이 잔뜩 모여 있었다.
사실 반신반인이 되기 위해 도전하는 건 엄청난 대가를 필요로 한다. 애초에 인간의 한계를 탈피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건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제장들은 남아 있는 여섯 명의 영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벌써 두 명의 영웅이 망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놀란 기색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젠가는 첫 번째 시련이 시작되자마자 도전한 영웅들이 모조리 망자의 길로 들어선 적도 있었다.
그때였다.
여섯 명 중 한 명의 몸에서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대규의 몸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가운데 사제장이 중얼거렸다.
“운명의 실이 움직였다. 저 자는 두 번째 시련에 들어섰다.”
대규는 광장 위에 죽은 듯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마 저 인간 영웅의 의식은 이제 광활한 바다 넵투누스(Neptunus)로 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반신반인이 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녔는지 시험받게 될 것이다.
다섯 명의 사제장들은 대규를 가만히 주시했다.
* * *
대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은 작은 나룻배 위에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푸른 물결들이 사방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육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수평선들만 아득하게 보였다.
대규는 나룻배에 쭈그리고 앉아 물을 떠서 마셔 보았다.
‘짜다.’
그렇다면 이곳은 바다.
공략집이 떠올랐다.
<두 번째 시련 장소, 넵투누스(Neptunus)에 입장했습니다.>
<이곳의 적을 물리치면 시련이 끝납니다.>
적을 물리치라는 걸 보니 두 번째 시련은 전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악마들에게 정신적 유혹을 당하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런데 대체 적은 어디 있는 거지?’
대규는 사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바닷물만 고요하고 잔잔하게 흐를 뿐이었다. 설마 하늘에서 전투를 벌이는 공중전인가 싶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지만 하늘 역시 조용했다.
하지만 긴장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적이 등장할지 모르니까. 기간토마키아 전투에서 거인 대장 기가스 팔라스도 갑자기 뜬금없이 전쟁터에 나타났었다.
대규는 자신이 차고 있는 장비들을 점검하려고 했다.
흔들.
나룻배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고 그 바람에 균형을 잃어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헤르메스의 신발로 균형을 잡았다.
별안간 거센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뭐지? 바람도 전혀 불지 않는데?’
파도가 아니었다.
저 앞쪽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성되고 있었다. 바닷물은 소용돌이 쪽으로 급속히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욕조의 물마개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일단 공중으로 날아 보자. 여기에 계속 있으면 뭐가 뭔지 알 수 없으니.
타탓.
헤르메스의 신발로 높게 날아가 멀리서 바다 아래를 굽어봤다.
‘이럴 수가.’
엄청 높게 날아올랐는데도 바다는 모두지 끝이 없었다. 육지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광경은 따로 있었다.
소용돌이는 거대한 타원형이었다. 그런데 그 가장자리에 거대한 원뿔 모양의 기둥들이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바다 아래쪽에 구조물이라도 있는 건가?’
신화 책에서 읽었던 바다 아래에 잠긴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가 떠올랐다.
소용돌이 쪽으로 하강해서 그 원뿔 기둥들을 자세히 내려다봤다.
기둥들을 살펴보던 대규의 눈빛이 변했다.
그건 구조물이 아니라 거대한 이빨이었다.
‘바다 아래에 뭔가가 있다. 그것이 입을 벌리고 바닷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거야. 뭐, 이런 게 다…….’
그때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카리브디스(Charybdis)
보상: 카리브디스의 이빨(전설), 시련의 보물.
특징: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 사이에서 태어난 바다 괴물로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바닷물로 달랜다. 하루 세 번 엄청난 양의 바닷물을 들이마시고 토해 내는데, 그때마다 엄청난 소용돌이가 생겨난다.
<카리브디스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카리브디스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카리브디스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카리브디스의 약점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몬스터였다.
보상에 시련의 보물이 적혀 있는 걸 보니, 저걸 해치우면 시련을 극복하는 것 같다.
대규는 최대한 멀리서 하늘에 둥둥 뜬 채, 약점 영상을 재생했다. 카리브디스의 입은 꼭 진공청소기 같아서 가까이 있으면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공략 영상을 보는 사이에도 녀석은 열심히 바닷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영상을 본 대규의 표정이 굳었다.
‘대체 어떻게 공격하라는 거야?’
카리브디스는 평범하게 생긴 괴물이 아니었다.
지금은 이 광활한 바닷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어서 전신이 보이지 않았지만 영상엔 그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거대한 암석 섬처럼 생겼다. 암석에는 미끄러운 이끼들이 잔뜩 끼어 있었다. 몸집 크기만 보면 거의 작은 섬만 했다.
그 섬 끝에 주둥이와 이빨이 달려 있는 구조였다.
웬만한 무기로는 상처조차 입히는 게 불가능했다. 기가스 팔라스의 경우 단순히 가죽이 두꺼워서 희귀 등급 이하의 무기로 상처를 낼 수 없었던 것에 반해, 이 카리브디스는 아예 겉이 단단한 암석이라 물리적인 공격을 가하는 게 불가능했다.
심지어 레벨 100인 자신이 스킬을 쓴다 해도 간지러울 정도의 충격만 입는단다.
약점은 심장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상대했던 거인형 몬스터들은 어쨌든 그 신체 구조가 인간과 동일해서 목, 심장을 노려 찌르면 해치울 수 있었던 반면 이 녀석은 몸 자체가 인간형이 아니라서 도무지 어느 곳이 심장인지도 모르겠다.
설사 공략집이 그 위치를 알려 준다 해도 단단한 암석 몸체를 뚫고 심장까지 공격할 수가 없었다.
공략 영상이 제시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바로 저 카리브디스의 내부로 들어가서 심장을 공격해야 한다.
녀석의 몸속으로 들어가 장기들과 혈관을 타고 심장이 있는 흉부(?)로 침투해 그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거대한 심장을 직접 파괴해야 했다.
들어가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바닷물을 마시느라 벌리고 있는 저 주둥이였다.
사실 다른 곳도 있는데 바로 녀석의 뒤꽁무니에 붙어 있는 항문이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려면 일단 바다 저 아래로 잠수를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고, 역시 항문은 주둥이보다 꺼림칙했다.
‘지금 들어가야 한다. 주둥이가 닫히면 시간이 없어.’
소용돌이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녀석이 바닷물을 거의 삼켰다는 신호.
이빨들의 틈이 서서히 줄어들며 주둥이가 닫히고 있었다.
대규는 닫히고 있는 주둥이 사이로 빠르게 날아갔다.
풍덩.
축축하고 짠 바닷물이 온몸을 휘감았다.
텁!
거대한 소리가 나며 녀석의 주둥이가 닫혔고, 주변이 온통 깜깜해졌다.
“으아악!”
주둥이 속의 바닷물은 격류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대규의 몸은 오직 바닷물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겨우 미끌거리고 축축한 주둥이 안쪽 벽을 더듬어서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지도창, 지도창!’
황급히 지도창을 불러냈다. 위치를 보니 자신은 현재 입속에 있다.
녀석의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에 도착하면 그 위벽을 뚫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수백 개의 혈관 중 심장으로 통하는 혈관을 골라 타고 심장부로 침입해야 한다.
하지만 식도와 연결된 녀석의 위에는 무시무시한 소화액이 가득 차 있었다.
공략 영상에서 녀석의 위액은 용암보다도 뜨겁고 모든 걸 다 녹여 버렸다.
그때 공략집의 지도창이 반짝였다.
위 내벽의 한 부분.
‘저곳을 뚫고 나가 심장부로 통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저 위액에 닿으면 몸이 다 녹아 버릴 텐데… 그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어둠에 적응했는지 주둥이 안의 풍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닷물은 여전히 격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헤르메스의 신발이 있다 해도 이 정도 바닷물이면 위 전체가 완전히 바닷물로 가득 차 버릴 것이다. 그럼 위액이 조금이나마 희석돼서 괜찮지 않을까?
“어어어? 으아!”
갑자기 대규가 있는 곳으로 바닷물이 덮쳐 오는 바람에 순식간에 급류에 휩쓸려 버렸다.
빌어먹을.
신발로 날아오르려 해도 물의 급류가 엄청나서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바닷물은 카리브디스의 입속에 들어와서 그런지 기분 나쁠 정도로 뜨뜻미지근했다.
저 멀리 목구멍과 연결된 식도가 보였다.
대규는 바닷물을 타고 식도를 흘러내려 갔다.
쏴아아-
마치 어린 시절, 놀이동산에서 탔던 후룸라이드 같았다. 물론 그것보다 훨씬 빠르고 쿰쿰한 냄새가 난다는 것만 빼면.
게다가 저 아래쪽엔 바닷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보였다. 바닷물이 위액과 뒤섞인 것 같았다.
풍덩!
위액과 뒤섞인 바닷물이 사정없이 입과 콧속으로 들어왔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게다가 위액이 희석됐다지만 거의 열탕 수준으로 뜨거웠다.
지이이잉-
기이한 진동 소리가 들리며 눈앞에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카리브디스의 위액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버블 막이 형성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몸 주변에 얇은 비눗방울 같은 막이 생겼다. 그 덕분에 바닷물이 더 이상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대규는 그제야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콜록콜록!”
그런데 자신은 이런 방어막 스킬을 배운 적이 없다.
설마 공략집이 이 막을 생성한 건가?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오른 걸로 봐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기능도 있다니. 이번 업데이트 덕분인가? 이거 나중엔 공략집이 대신 전투도 해 주는 거 아니야? 그럼 정말 개꿀이겠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창이 떴다.
<버블막의 지속 시간은 10분입니다.>
<지속 시간을 늘리시려면 공략집을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업데이트를 하려면 블랙 등급 젬스톤 3개가 필요합니다.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Yes/No>
하고 싶어도 젬스톤이 없어서 못 한다.
그것보다 10분이라니.
꾸물댈 시간이 없었다. 대규는 황급히 지도창을 불렀다. 그곳에 표시된 위의 내벽 쪽으로 다가가 체인 블레이드를 들었다.
저곳을 뚫어야 한다.
대규는 블레이드를 들고 정확히 위의 내벽에 내리꽂았다.
푹!
하지만 위벽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위벽의 근육은 움찔거리며 칼날을 삼키려는 듯 꽉 조였다.
있는 힘을 다해 위벽에서 칼을 뽑아냈다. 힘 스킬을 외친 뒤 헤라클레스가 준 레툼 익투스 기술을 시전했다.
위벽에 정확히 작렬하는 일격의 기운.
그제야 벽에 가느다랗게 틈이 벌어졌다.
가느다랗게 벌어진 위벽 틈을 벌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정확히 대규 혼자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었다.
꿀렁-
위벽을 통과해 나오자마자 벌어졌던 틈은 다시 닫혀 버렸다.
위벽을 뚫고 나오자 수십, 아니 수백 개의 혈관이 그물처럼 얼기설기 엉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규는 망설임 없이 공략집을 작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