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화. 판테온의 시련 (3)
목소리가 들리는 등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나를 볼 수 없다.”
목소리는 허공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대규가 묻자 목소리가 답했다.
“나는 너의 꿈을 이뤄 줄 수 있는 신이다.”
거짓말이다.
공략집은 분명 욕망을 시험하는 악마가 나온다고 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그때 대규 주변의 풍경이 다시 휘리릭 바뀌었다.
서 있는 곳은 한 사무실이었다. 자신의 영등포 본사 사무실보다 훨씬 넓고 고급스러웠다.
창밖으로 서울의 도심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넓은 사무실은 한쪽 면이 통째로 유리창인데, 바깥엔 도시의 모든 건물이 내려다보인다.
이 사무실은 대체 몇 층인 걸까?
‘그것보다 이건 꿈인가?’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보고 대규는 깜짝 놀랐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천만 원은 훌쩍 넘는 고가의 시계였다.
입고 있는 정장과 셔츠 역시 고급 브랜드의 것이다. 이런 옷은 한 벌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만들어져 있다. 테이블 위 명패에 적혀 있는 글자는…….
회장 김대규
‘내가 회장이라고?’
사무실에 걸려 있는 거울을 바라봤지만 얼굴은 현재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조금 나이 든 것 같기도?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봤지만 생생한 아픔이 전달됐다.
그때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열리며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준섭이었다.
“김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이번 분기 사업 보고입니다.”
회장님이라니.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준섭이 말을 이었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에 진출한 탕꼬 프랜차이즈들은 순조롭게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우선 아시아 지역에서 이번 매출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탕꼬가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까지 뻗어 나갔다고?
하지만 당황스러운 속마음과 달리 대규는 자연스럽게 준섭의 보고를 들었다.
“…중동 쪽에서도 빨리 진출해 달라는 콘택이 오고 있습니다. 참. 이번에 포브스(Forbes)지에 나오신 거 보셨죠? 축하드립니다.”
준섭이 포브스 잡지를 건네며 말했다.
“예?”
“아시아 최고의 부호로 선정되셨습니다. 삼송을 제치고요. 하하, 당연한 일인가요.”
포브스라면 미국의 경제 잡지로 부자 명단과 백만장자 명단을 발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삼송이라면 핸드폰과 전자 제품 등으로 현재 글로벌하게 뻗어 나간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대기업이었다.
자신이 삼송을 제치고 포브스에 나왔다는 준섭의 말에 대규는 잡지를 받아 표지를 넘겼다.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대규식품은 작년에 이어 아시아 지역 연속 1위를 유지했다. 김대규 사장은 서른다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요식업을 해 세계적 거부에 오른 사람이다. 올해 대규식품의 사장 김대규의 자산은 지난해보다 30억 달러 늘었다.
대규식품은 20XX년 신촌 뒷골목의 작은 식당 탕꼬로 시작됐는데 1년 만에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는 글로벌 프랜차이즈 요식업체로 커졌다. 게다가 해외에서 한류 음식 열풍, 즉 ‘K-Food’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주역이다.
현재 대규식품은 요식업뿐만 아니라 유통, 소매, 식료품 등의 분야에서 연 3,00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기사를 어벙한 표정으로 읽고 있는데 준섭이 말했다.
“회장님, 한 시간 뒤 일본의 유명한 구루메 잡지와의 K-Food 관련 인터뷰가 있을 예정입니다. 시간이 없군요.”
“예엣?”
“복장은 스타일리스트에게 골라 놓으라고 했습니다. 승강장으로 올라가시죠. 이동 준비는 완료됐습니다.”
준섭은 사무실 문을 열고 대규를 안내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으로 올랐다. 옥상 문을 열고 나가자,
투다다다다닷-
거대한 헬기가 프로펠러를 휘날리고 있었다.
“전용 헬기를 준비해 뒀습니다.”
이게 대체 뭐야!
미래의 내 모습인 건가? 아니다. 가상현실일 수도.
하지만 가상이든 진짜 현실이든 대규는 슬슬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성공했구나. 삼송을 제치는 기업이 되고 K-Food 열풍의 주역이 되다니.
대규는 이상하리만치 빠른 속도로 자신의 성공한 모습에 동조되고 있었다.
깍듯하게 자신에게 인사하는 직원들의 어깨를 두들기며 헬기에 올랐다.
곧 헬기가 이륙했고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정말 이 도시, 아니 이 나라를 넘어 이제 세계를 향해 나가는구나.’
여자 악마들이 목욕탕에서 성적으로 유혹했을 때보다 더욱 달콤한 기분이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은 성공하기 위해서 정말 미친 듯이 노력해 왔다.
애초에 안내인 여자를 따라 차원의 틈에 들어왔던 이유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해 준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꿈이 완벽하게 이뤄진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그의 꿈은 식당 경영에 성공하고 더 나아가 요식업계에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걸 이루기 위해 그는 차원의 틈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공략집을 사용해 누구보다도 많은 미션을 해결했고, 몬스터를 때려잡아 열심히 보상을 얻어 냈다.
‘내가 이 정도의 위치에 가려면 지금부터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 걸까?’
물론 차원의 틈에 소환된 5개월 동안 비약적인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지금 이 광경을 보니 아직도 한참 모자란 것 같았다.
이 정도로만 성공하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자신의 꿈을 완전히 이룬 것이니까.
‘방금 읽은 포브스지의 기사에선 내가 서른다섯 살이라고 나와 있었지. 그럼 적어도 5년은 걸린다는 뜻인가.’
사실 5년 정도 걸리면 엄청 빠른 것이다.
프랜차이즈 사업이 대한민국을 넘어 해외로 뻗어 나가는 건 금방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유명해진 박 주부도 대한민국에서는 몹시 성공한 축에 들었지만 아직 외국으론 진출하지 못했다.
‘당장 이 정도로 성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속에서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맨 처음 캄캄한 밤하늘에서 울려 퍼졌던 목소리였다.
‘어떤가, 영웅이여. 성공의 열매가 참으로 달콤하지 않은가?’
대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말을 들으면 저 성공을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도록 해 주겠다.”
지금 당장, 이란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더 이상 힘들게 이곳에서 몬스터와 목숨 걸고 전투를 벌일 필요가 없단 뜻인가?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대가 나에게 무릎을 꿇는다면, 단지 그렇게만 한다면 이 모든 것들을 바로 누릴 수 있게 해 주마. 단지 그뿐이다.”
이건 악마의 유혹이야.
머리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대규는 이미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헬기에서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준섭은 연신 태블릿 피시의 화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사장님, 이번에 아메리카에 새로 연 지점이 최고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이걸 좀 보십시오.”
태블릿 피시 속엔 전 세계로 뻗어 나간 프랜차이즈 지점들의 모습과 사람들이 맛있다고 환호하는 온갖 리뷰들이 보였다.
‘아아… 그토록 바랐던 꿈이 이뤄진 순간이다.’
마음이 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 영웅이여.”
대규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유혹인 걸 알지만 목소리의 말대로 성공의 열매 맛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누가 나를 좀 말려 줬으면.
그때 공략집이 떠올랐다.
<악마의 환상 마법입니다. 눈을 감고 정화의 약초로 양쪽 귀를 막아 감각을 차단하십시오. 그럼 환상이 사라지고 그것을 만들어 낸 악마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역시 환상이었다.
하지만 이 환상이 영원히 지속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래도 이겨 내야 한다!’
공략집이 알려 준 덕분에 정신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의지를 발휘해 보관함에서 정화의 약초를 꺼냈다. 아까 뿌리를 씹어 먹고 남은 줄기 부분에 이파리가 몇 개 달려 있었다.
대규는 이파리 두 개를 똑, 뗀 뒤 눈을 감은 채 귓구멍에 그것을 돌돌 말아 쑤셔 넣었다.
약초 특유의 알싸한 자극이 귓바퀴에 전해졌다. 얼얼했다.
곁에서 들려오던 준섭의 목소리가 옅어졌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
“…빌어먹을!”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야멸차게 외쳤다.
목소리를 무시하고 눈을 감고 있는데 공략집의 창이 떠올랐다.
<환상 마법이 사라졌습니다. 눈을 뜨면 악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헬기와 준섭 등은 모두 사라져 있고, 대규는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실에 서 있었다. 쿰쿰하고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실제로는 이런 곳에 있었다니.’
꿈틀.
저 앞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대규는 정신을 차리고 체인 블레이드를 잡았다.
자세히 보니 곱사등이에 머리털이 듬성듬성 빠진 추악한 악마였다. 코는 돼지 같은 들창코에, 얼굴 피부는 화상을 입은 것처럼 끔찍하게 짓물러 있었다.
“끄으으… 내 일루전 매직이 먹히지 않다니… 넌 대체 뭐 하는 녀석이냐.”
악마는 추악한 침음을 냈다.
저게 자신을 신이라 자처했던 녀석의 모습이라니.
촉수 괴물을 닮은 여자 악마들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왜 이렇게 본체는 흉측한 걸까.
어쩌면 이들이 보여 주고 자극했던 욕망의 본질들이 이렇게 흉하다는 걸 시사하는 걸지도 몰랐다.
한순간 성공을 향한 욕망에 눈이 어두워져 마음이 흔들렸던 자신이 한심했다. 앞으론 흔들리지 않겠다고 의지를 굳게 다지며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꺼내 들었다.
칼날을 본 곱사등이 악마가 추악한 신음을 냈다.
“죽어라.”
차갑게 말한 뒤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서걱-
악마는 반항도 해 보지 못하고 죽었다. 앞의 여자 악마들처럼 욕망을 자극하는 덴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만, 전투력은 안쓰러울 정도로 약했다.
‘하긴, 원래 이 시련은 욕망을 극복하는 거였으니까.’
그것보다 다른 영웅들은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다.
그들도 자신처럼 욕망을 극복해 냈을까?
‘솔직히 이번 욕망은 위험했어. 유혹이란 걸 알면서도… 공략집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아마 끔뻑 넘어가서 망자의 길에 들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또 다른 악마들이 나타나는 건가?’
그때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첫 번째 시련 장소, 살리와 로카를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휴, 첫 번째 시련은 이게 끝이구나.’
아이룸나 신전으로 가져갈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는 대체 무엇일지 궁금했다.
우우웅.
지하실이 진동했고, 공중에 황금 상자 하나가 떠올랐다. 아테나의 전술 장갑이 들어 있었던 상자만큼이나 화려했다. 상자엔 보석이 박혀 있고, 여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대규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작은 실타래였다.
실타래에 둘둘 말려 있는 실은 은은하게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딱 봐도 보통 실은 아닌 것 같았다.
대규가 실타래를 집어 들자 설명창이 떴다.
[운명의 실(신화)]
[운명의 세 여신이 옷을 짓는 실로, 한 존재의 운명을 담을 수 있다.]
어째 설명만으론 잘 와 닿지 않는다. 어떻게 실이 한 존재의 운명을 담을 수 있다는 거지?
그것보다 이 보물은 아이룸나 신전으로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질 수는 없는 아이템이다.
대규는 운명의 실을 보관함에 잘 넣어 뒀다.
그럼 이제 두 번째 시련의 장소로 들어갈 때였다.
‘다음 시련은 뭘까? 또 이곳에서처럼 욕망과 싸워야 하는 걸까?’
차라리 전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욕망과 유혹에 견디는 건 전투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때 지하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두 번째 시련 장소로 이동합니다.]
대규는 눈을 감고 진동에 몸을 맡겼다.
* * *
아이룸나 신전의 다섯 명의 사제는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밑의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엔 대규를 포함한 여덞 명의 영웅이 눈을 감고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그들의 몸에선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 여덟 명 중 한 명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근육질에 대머리인 인간 영웅이었다.
“크윽!”
그는 단말마의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얼마 후, 남자의 몸은 사르르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사제장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최초의 망자가 생겼다. 그는 욕망을 따라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