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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집을 습득하셨습니다-87화 (87/294)

# 87

87화. 판테온의 시련 (2)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영웅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들 죽음은 각오하고 왔다. 하지만 죽지 않아도 시련을 극복하는 데 실패하면 영원히 이곳에 묶여 버리게 된다니.

물론 다들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와중에 대규는 홀로 침착했다.

‘나에겐 공략집이 있다.’

일단 공략집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시련 내용에 나온 세 개의 장소와 귀중한 보물이 뭔지 궁금했다.

대규는 시련 내용 메시지창에 적힌 세 개의 장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각 장소에 입장해야 해당 장소에 관한 정보가 뜹니다. 장소에 입장해 주십시오.>

귀중한 보물 역시 마찬가지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젠장! 이래선 거금을 들여 업데이트한 보람이 없잖아.

하지만 그래도 장소에 입장하면 정보를 볼 수 있다니까 다행이다. 빨리 시련의 장소에 입장해 공략집을 작동시키고 보물을 찾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반면 나머지 영웅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찰스는 우왕좌왕하는 와중에도 유난히 침착한 대규를 주시했다.

‘빌어먹을, 당연히 강력한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거나, 뭐 그런 것일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 저 자식은 뭘 믿고 저렇게 차분한 거야?’

그때 사제장의 목소리가 신전을 울렸다.

“시련은 이제 시작됐다. 건투를 빌겠다.”

말을 마친 그가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순식간에 주위가 암흑에 휩싸였고, 광장 중앙에서 검붉은 빛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 * *

대규가 도착한 곳은 화려한 건물의 내부였다.

‘이곳은?’

온통 선홍빛의 붉은 대리석으로 치장된 신전 같았다. 내부에 세워져 있는 기둥들도 화려했다.

게다가 코를 간지럽히는 은은한 향기.

‘이곳은 신전이 아니다!’

신전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결정적으로 달랐다.

제단이 있어야 할 곳엔 널따란 탕이 있었고 탕 안에서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곳은 목욕탕이었다.

대규는 탕 속의 물에 손을 담가 봤다.

기분 좋을 정도로 따뜻한 온도였다. 당장 옷을 벗고 탕 안에 들어가 몸을 데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목욕탕은 매우 넓었으며, 그 형태는 꼭 그리스 시대에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대리석 바닥은 반짝였고 황금으로 도금된 수도꼭지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벽에는 남녀와 반인 반수의 정령들이 목욕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때마침 공략집이 떠올랐다.

<첫 번째 시련 장소인 살리와 로카(Saliva Loca)에 입장했습니다.>

<이곳에선 당신의 마음속 욕망을 시험하는 악마들이 등장합니다. 악마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그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목욕탕에서 욕망을 시험하는 악마들이라…….’

대충 그 욕망이 어떤 것일지 감이 잡혔다.

하지만 악마들이 어떻게 욕망을 시험해 올까?

‘그것보다 이 향기…….’

좀 전부터 목욕탕에 감돌고 있는 은은한 향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혹시 이 향기도 유혹의 일부인 걸까?

대규는 코를 막고 조심스럽게 입으로 숨을 쉬었다. 그때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귀에 들렸다.

꺄르르.

아하하.

한 명이 아니다.

저 멀리 세 여자의 인영이 보였다. 그녀들은 모두 하늘하늘한 천으로 만든 얇은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들의 몸에선 하나같이 백색의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반신반인? 아니야, 공략집에선 분명 악마들이라고 했다.’

세 여자는 각자 생김새는 달랐지만 몹시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이상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아름다움으로 치면 아테나 여신도 절세미인이었지만, 이 여자들은 아름다움과 더불어 묘한 색기도 지니고 있었다.

꼭 제2 타르타로스에서 봤던 하토르 여신의 색안 스킬을 패시브로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들 중 한 여자가 대규에게 다가와 말했다.

“긴장할 것 없답니다. 인간 영웅이시여, 이곳은 판테온 최고의 목욕탕이에요.”

그녀의 붉은 입술이 관능적으로 움직였다.

“목욕이라도 하세요. 저희가 옷을 벗겨 드릴게요.”

그녀의 손이 흑린갑 쪽으로 다가왔고 대규는 팔을 세차게 휘두르며 차갑게 말했다.

“됐다, 이 악마들아.”

어어, 근데 왜 이렇게 어지럽지?

그때 그녀 옆의 다른 여자가 까르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봐, 넌 왜 그렇게 눈치가 없니? 우리가 먼저 옷을 벗어야 영웅님께서도 옷을 벗으실 거 아니야.”

“아하, 그렇구나. 영웅님, 그럼 우리부터 옷을 벗을게요.”

‘지금 뭐라는 거야?’

대규가 뭐라 할 틈도 없이 그녀들은 입고 있던 드레스를 훌렁 벗기 시작했다.

하늘하늘한 얇은 드레스가 목욕탕 바닥에 떨어졌고 그녀들의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탱글탱글한 가슴과 둔부.

목욕탕의 훈훈한 증기 때문인지 그녀들의 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무리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대규라도 눈앞에서 이런 광경을 보니 얼굴이 시뻘게지고 당황스러웠다.

그중 한 명이 대규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흑린갑에 손을 댔던 여자였다.

코로 훅 들어오는 향기로운 여자의 체취.

정신이 아찔해질 것만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큰일 나겠다.

속으로 열심히 애국가를 완창했다. 하지만 기분이 맑아지기는커녕 점점 몽롱해지고 어지러웠다.

꼭 약에 취한 것 같았다.

‘크윽, 대체 왜 이러지…….’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목욕탕의 증기는 미약(媚藥) 성분을 품고 있는 유혹의 증기입니다. 증기를 흡입한 대상은 점점 몸과 정신을 잠식당합니다.>

역시 그랬군.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대규는 코와 입을 막고 숨을 참아 봤다. 하지만 이미 증기를 흡입한 탓인지 몽롱함은 가시지 않았다.

아하하.

꺄르르.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몸 안에 흡수된 사기를 물리치려면 오시리스의 정원에서 나는 ‘정화의 약초’를 섭취해야 합니다.>

정화의 약초라면 분명 기간토마키아 소환 전, 정원에 들어갔을 때 챙겼던 약초 중 하나였다.

대규는 이성을 되찾고 보관함을 불러내려 했다.

그때 대규를 향해 다가온 나신의 여자가 흑린갑을 서서히 벗기며 속삭였다.

“영웅님, 제가 옷을 벗겨 드릴게요…….”

여자의 풍만한 가슴이 흑린갑에 닿았다. 온몸이 녹아 버릴 것 같은 달콤한 감촉이다. 이성이 마비돼 보관함을 불러낼 수 없었다.

“그, 그만…….”

힘없는 반항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쉿, 그냥 즐기시면 돼요.”

“그만하라고……!”

타탓!

있는 힘을 짜내 그녀들로부터 달아났다.

물론 그녀들은 달아난 대규를 쫓아왔다.

“영웅님, 거기 서요. 아하하.”

그녀들이 달려올수록 하얗고 거대한 가슴들이 탄력 있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매우 자극적인 광경이었지만 대규는 애써 눈을 돌렸다.

‘차라리 기가스 팔라스 같은 강력한 대형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는 게 낫겠다!’

머리가 몽롱해진 탓에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관함을 불러내 약초가 들어 있는 칸을 찾았다. 그 안에서 쑥갓과 비슷하게 생긴 약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정화의 약초]

[이 약초의 뿌리를 먹으면 마력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온 사악한 기운을 몰아낼 수 있음.]

대규는 재빨리 약초의 뿌리 부분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약초의 뿌리는 매우 썼다. 씹자마자 사정없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거 맛이 왜 이래! 게다가 이 톡 쏘는 향은 뭐람.’

더럽게 맛이 없어서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게다가 너무 써서 혀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의지를 발휘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러자 곧 와사비를 한 움큼 삼킨 것처럼 비강이 뻥 뚫리며 눈물이 핑 돌았다.

곧 몽롱했던 정신이 맑아졌다. 입 안은 아직도 얼얼했지만.

‘좋았어.’

완전히 정신이 돌아왔다.

한편 나신의 여자들은 대규가 정신을 차린 줄도 모른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중 한 명이 대규의 허리를 껴안으며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잡았다, 꺄르르.”

물컹.

풍만한 그녀의 가슴이 등에 닿았다.

보통 남자라면 이 상황에서 전기가 오른 듯 아찔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대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물 풍선이 텅, 하고 닿은 것 같달까.

‘이 약초, 효과가 엄청나다!’

대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껴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옥같이 하얗고 아름답게 굴곡이 잡힌 여체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인간의 몸뚱이,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이래서 색욕을 육욕(肉慾)이라고 하는 건가? 잠깐, 저거 뭐야?!’

자신을 껴안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점점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뿐 아니라 주변에 서 있는 나머지 여자들의 모습도 변했다. 아름다운 육신에선 이상한 촉수들이 뻗어 나왔고, 얼굴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가녀린 손에는 두꺼운 비늘들이 돋아났고 그녀들의 등에서는 파충류의 날개 같은 것이 돋아났다.

붉은 입술이 갈라지고 그 속에서 수십 갈래로 갈라진 징그러운 혀들이 나왔다.

‘뭐야, 이게!’

<몸속을 지배하던 사기들이 물러나고 악마들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태까진 미혹의 기운으로 가려졌던 건가?

그것보다 이런 흉측한 괴물들에게 잠시나마 유혹을 당하다니…….

“영웅님?”

괴물의 주둥이에서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둥이 안에선 수십 갈래의 혀가 징그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그나마 마음속 한구석에 남아 있던 욕정마저도 싹 사라져 버렸다.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망설임 없이 집어 들며 말했다.

“그 입 다물어라, 이 마귀야.”

“영웅님, 이리로 오세…….”

“레툼 익투스!”

대규는 괴물의 말을 끊고 점프한 뒤 거세게 외쳤다.

번쩍! 파바밧!

수십 개의 검광 사이로 날아가는 일격의 기운은 세 악마의 목을 단번에 갈라 버렸다.

다행히 영웅을 유혹하는 게 주 능력이라 그런지 저들의 전투력은 높지 않았다.

풍덩!

악마들은 일격을 맞자마자 뒤로 고꾸라져 넓은 탕 안에 빠져 버렸다.

끄르르르…….

피거품을 뿜으며 죽어갔고, 투명한 목욕탕 물은 순식간에 검붉고 탁한 핏물로 변했다.

수면 위에 둥둥 떠오른 악마들의 시체는 몹시 징그럽고 불쾌했다.

아름다운 여자들의 나신은 오간 데 없었다.

‘결국, 이런 게 육욕의 본질이란 건가.’

겉보기엔 자극적이고 아름답지만, 그것을 과하게 탐하면 끔찍하게 파멸하게 된다.

‘그럼 이제 첫 번째 시련이 끝난 건가? 아니지. 분명 이 첫 번째 시련의 장소에선 욕망을 시험한다고 했어.’

이제 겨우 한 가지 욕망인 육욕의 유혹을 이겨 냈을 뿐이다.

그럼 나머지 욕망들은 무엇일까.

그 순간 대규가 서 있는 공간이 바뀌기 시작했다.

* * *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뺨을 때렸다.

대규는 까만 밤하늘 위에 서 있었다. 헤르메스의 신발을 작동시키지 않았는데도 몸이 둥둥 공중에 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발아래에는 광활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반짝반짝 화려하게 빛나는 고층 건물들과 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강이 보였다.

이곳은 대규가 살고 있는 도시, 서울이었다.

‘대체 이번 시련은 뭐지? 혹시 이것도 가상의 광경인가?’

그것보다 대체 두 번째 욕망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욕망이길래 서울의 야경을 보여 주는 걸까.

첫 번째 욕망의 시련도 만만치 않았다. 아마 공략집이 정화의 약초를 알려 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악마들에게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야경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자니 점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준 빌딩의 옥상에서 처음으로 검술 훈련을 하고 신촌 거리를 내려다봤을 때였다.

이만큼 높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앞으로 성공시킬 사업에 대한 의지를 다지며 거리를 내려다봤고, 그때 역시 희망적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도시를 내려다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야.’

그때 등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

“환영한다, 영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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