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86화. 판테온의 시련 (1)
블랙 등급 젬스톤 1개면 현금화했을 때 그 가치가 엄청나다.
‘이 정도면 사업자본이 부족할 때 현금화시켜도 될 것 같은데.’
어쨌든 공략집을 새로 업데이트해서 남아 있는 현재 젬스톤 잔고는 그레이 20개뿐이었다.
‘판테온의 시련에서 혹시 블랙 등급 젬스톤이 나오는 걸까?’
그건 알 수 없다.
공략집을 업데이트한 후 착용할 무기들을 점검했다.
아테나의 전술 장갑과 체인 블레이드, 흑린갑의 상태는 멀쩡했다.
성장형 아이템인 닥튈로이의 반지와 황금 양털 조끼도 별 탈 없었다. 그리고 기가스 팔라스의 가죽을 덧댄 네메시스의 방패는 아주 멋스러웠다.
‘그럼 이제 소환을 기다리자.’
얼마 후, 스스슥거리는 소리와 함께 포탈이 열렸다.
포탈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뿐이었다. 포탈 속의 끝없이 펼쳐진 암흑을 바라보고 있는데 메시지창이 떴다.
[당신은 판테온의 시련에 도전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지금이라도 도전을 거부하실 수 있습니다. 도전하시겠습니까? Yes/No]
도전을 그만둘 수는 없지.
속으로 Yes를 외치자 새로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암흑의 포탈로 들어가면 판테온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대규는 망설이지 않고 암흑의 포탈 속에 발을 내디뎠다.
어어?
스륵-
강력한 진공청소기가 빨아들이는 것처럼 대규의 몸은 포탈 안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포탈에 들어가나 좁은 통로 안은 통과하는 것처럼 온몸이 죄어 왔다. 심지어 속조차 울렁거렸다.
‘이런 식으로 포탈을 통과한 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허허벌판에 서 있었다. 눈앞엔 거대한 신전이 있었다.
신전은 까만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었다. 옛날 제1 타르타로스에서 봤던 화강암으로 지어진 기간테스의 성이 떠올랐다.
‘이곳이 시련이 시작되는 곳인가?’
대규는 신전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신전의 문은 높이만 거의 5미터였다. 그 크기만 해도 압도적인데, 까만색 문에 새겨진 부조들은 더욱 인상 깊었다.
까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문에는 여러 사람들과 정령들의 모습이 조각돼 있었는데 하나같이 고뇌에 찬 표정, 혹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문 중앙에 조각된 사신으로 보이는 해골에게 끌려가는 인간과 정령들의 모습은 괴롭다 못해 처참할 지경이었다.
‘설마 내가 앞으로 겪을 판테온의 시련을 암시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렇게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신전의 문 앞에 서 있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판테온의 시련에 도전할 수 있는 아이룸나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인 시련이 시작됩니다.]
끼이익.
검은 신전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대규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역시 검은 대리석이 좍 깔려 있었다. 곳곳에는 검은 기둥들이 굳건하게 세워져 있었고 넓은 광장 같은 공간이 중앙에 있었다.
신전 내부의 높이는 거의 10미터. 광장 앞에 높게 솟은 벽의 한가운데에는 테라스처럼 툭 튀어나온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엔 다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각 의자의 등받이는 천장을 찌를 듯이 길었으며,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의자는 모두 비어 있었다.
광장에는 대규 외에도 일곱 명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공략집으로 그들의 상태를 확인해 보니 다들 레벨 100을 달성한 인간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는 걸로 보아 다들 어느 정도 면식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규는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대규와 함께 기간토마키아로 참전한 영웅들은 이제 겨우 레벨 30 언저리에서 맴도는 수준이었다. 아마 이들은 자신보다 훨씬 전에 차원의 틈으로 들어온 자들일 것이다.
‘이 사람들도 시련에 도전하러 왔나 보구나.’
대규가 나타나자 그들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며 숙덕이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누구지?”
“몰라,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들은 경계 어린 표정으로 대규를 바라봤다. 그중에서도 유독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을 지닌 30대의 붉은 머리 남자가 대규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대체 누구지?’
붉은 머리 남자, 찰스는 2년 전 차원의 틈으로 불려왔다. 벌써 그가 기간토마키아 전투에 참여한 지는 2년이 넘었다. 그 탓에 그는 웬만한 인간 영웅 실력자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처음 보는 얼굴이야. 5년 차 이상인 자인가? 아니야, 내가 5년 차들도 대부분 다 알고 있는데… 게다가 저 녀석은 엄청나게 젊잖아.’
사실 찰스처럼 2년 만에 레벨 100을 달성한 인간 영웅도 흔치 않았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의 영웅들은 다들 3년 차 이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이 사실에 몹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찰스는 호기심이 일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봐, 동생.”
“무슨 일입니까?”
대규는 찰스를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찰스는 일부러 사람 좋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난 찰스라고 해. 반가워! 내가 나이가 많은 것 같으니 말을 놓을게.”
“예, 그러시죠.”
찰스는 대규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동생도 한계 레벨에 도달한 영웅이겠지? 나랑 저기 있는 사람들은 아폴론 신의 군대에 배속돼 있는데 말이야…….”
대규는 자신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거는 찰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엄청 말이 많은 녀석이군. 그런데 아폴론 신의 군대에 배속돼 있다고?’
대규는 연회 때 만났던 아폴론 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완벽한 미남자였지만 은근슬쩍 인간을 무시했던 그의 언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동생은 어떤 신의 군대에 속해 있지?”
찰스가 묻자 대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테나 여신 군대에 있습니다.”
“아테나 여신 군대에? 거기 케이론 장군 있지. 장군님께 안부 전해 줘. 한번은 아테나 여신 군대와 합동 작전을 편 적이 있거든. 키야, 그때 전장을 지휘하는 아테나 여신의 자태는 정말 끝내 줬지…….”
정말 말이 많군.
그때 찰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작은 목소리로 대규에게 말했다.
“듣자 하니 아테나 여신은 뛰어난 인간 영웅들을 좋아한다며? 뭐, 우리 인간 영웅끼리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아폴론 신은 분명 좋은 분이지만, 은근히 인간 영웅들을 차별하거든. 인간 영웅들은 주요 관직에 등용하지 않아. 그래서 나와 저기 있는 영웅들은 이번 시련을 통해 반신반인이 되려고 하지.”
역시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내심 아폴론 신을 선택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찰스가 대규의 전술 장갑을 보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네가 끼고 있는 그 장갑은 아테나 여신의 장갑 아니야?”
“맞습니다.”
찰스는 장갑을 보며 감탄스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건 여신이 실력자에게 직접 하사하는 장갑이라던데… 너 아테나 부대에서 꽤나 실력자인가 보구나.”
“아닙니다. 운이 좋아서 받았습니다.”
“겸손한 척하기는. 나도 그 장갑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구. 그런데 이상한걸? 너 정도의 실력자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넌 대체 언제 차원의 틈으로 온 거지? 참고로 나는 2년 차야.”
찰스는 갑자기 자랑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아, 너무 놀라지 마! 나도 너처럼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런데 주변 사람들 말이 2년 만에 이렇게 한계 레벨에 도달하는 인간 영웅은 1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라고 하더라고. 하하하! 그래서 동생은 언제 왔다고?”
“5개월 정도 됐습니다.”
“뭐라고?!”
거짓말을 해도 유분수지!
찰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신처럼 2년 만에 한계 레벨을 달성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1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라고 말한 건 자신을 돋보이려고 좀 과장한 것이긴 했지만.
그의 입에서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 동생, 농담이 너무 과하잖아. 뻥치지 말라구! 어떻게 5개월 만에 레벨 100을 달성한단 말이야!”
“정말입니다.”
“에이, 솔직히 말해 봐. 진짜로 차원의 틈에 소환된 게 언제냐?”
“아까 말씀드렸듯이 5개월 전입니다.”
찰스는 이상한 눈빛으로 대규를 바라보았다.
‘이 자식 뭐야. 5개월 만에 어떻게 한계 레벨 100을 달성해?’
그도 그럴 것이 5개월이면 이제 막 타르타로스 튜토리얼을 마치고 신입 영웅으로서 첫 기간토마키아 전투에 참전할 시점이다.
‘뻥도 그럴듯하게 쳐야지. 신종 관종인가?’
하지만 아테나 여신의 전술 장갑을 끼고 있는 걸로 봐선 확실히 실력자는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녀석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캐묻는다고 자세히 얘기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녀석이구먼.’
“그래, 알겠어. 그럼 동생도 수고하라구. 우리 무사히 시련을 마치고 반신반인이 돼서 만나자.”
“예, 수고하십시오.”
찰스는 대규의 어깨를 두들긴 뒤 다른 영웅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물론 돌아가서도 그는 계속 대규를 주시했다.
신전 전체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시련에 도전하러 온 인간 영웅들이여, 환영한다.”
목소리는 신전 벽의 튀어나온 테라스 부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대규를 포함한 총 여덟 명의 영웅들은 테라스에 놓인 다섯 개의 의자를 바라봤다.
어느새 의자에는 짙은 감색의 후드 가운을 입은 다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가운은 꼭 중세 시대의 수도사들이 입는 것처럼 생겼다.
의자에 앉은 그들은 하나같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몸에선 은은한 황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신!’
다섯 개의 의자 중에서 가운데 의자에 앉은 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테라스 앞쪽으로 오더니 손을 허공으로 한 번 휘둘렀다.
후드 자락 아래 드러난 그의 손은 몹시 하얗고 가늘었다. 전에 봤던 아테나 여신의 손이 생각날 정도였다.
곧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신전을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녀린 손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몹시 굵고 위엄찼다.
“우리는 판테온의 시련을 관장하는 이곳, 아이룸나 신전의 사제장들이다. 그대들은 이번에 판테온의 시련에 도전하는 인간 영웅들이로구나.”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에 여덟 명의 영웅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대들은 시련에 도전할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 이에 앞으로 총 세 개의 시련을 거치게 될 것이다.”
‘드디어 판테온의 시련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군.’
여덟 명의 영웅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후드를 둘러쓴 사제장을 올려다봤다.
“그대들은 세 곳의 장소를 통과하며 각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시련을 이겨 내고 각 장소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을 이곳으로 가져오면 된다.”
그와 동시에 여덟 명의 영웅들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판테온의 시련이 시작됐습니다.]
[시련: 사제장이 제시한 세 곳의 장소를 통과하며 시련을 겪고, 각 장소의 귀중한 보물을 가져오십시오.]
[보상: 반신반인인 세미데우스가 될 자격을 얻음. 블랙 등급 젬스톤 3개.]
블랙 등급 젬스톤 3개면 레드 등급 젬스톤 90개의 가치다.
아무래도 한 장소의 시련을 통과할 때마다 1개씩 주는 것 같다.
물론 영웅들은 모두 당황한 눈치였다.
‘이게 시련에 대한 설명의 전부인가?’
보통 여태까지 제시된 미션들은 그 내용이 정확한 편이었다. ‘귀중한 보물인 아이템 XX를 가져와라.’라는 식이었다.
보다 못한 영웅 중 한 명이 사제장에게 물었다.
“귀중한 보물들이 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는 겁니까?”
“그렇다. 그건 그대들이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만약 보물인 줄 알고 가져왔는데, 그게 보물이 아닌 경우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럼 시련엔 실패한 것이다.”
“시련에 실패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후드를 뒤집어쓴 사제장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패한 자에게 허락되는 건 오직 죽음과 망자의 길뿐.”
망자의 길?
단어가 주는 두려운 느낌 때문인지 영웅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때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시련을 극복하는 데 실패하는 도전자들은 시련 속에 묶여 있는 망자가 돼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