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75화. 죽음의 평원 (3)
라의 목걸이를 보고 있는데, 그 틈을 노리고 검날이 대규를 향해 날아들었다.
휘익-
기습적인 공격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깡!
네메시스의 방패를 들어 막았다.
“크윽…….”
신음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엄청난 충격에 팔이 끊어질 것 같았고, 대규의 몸은 어느새 허공을 날고 있었다.
눈앞에 상태창이 보였다. 생명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비틀.
헤르메스의 신발로 간신히 균형을 되찾아 허공을 날았다.
방패를 든 왼쪽 팔은 너덜너덜했다. 재빨리 회복 포션을 먹어 깎인 생명력을 회복했다.
“헉헉…….”
공략 영상에서 본 대로였다.
엄청난 파괴력이 실린 공격! 하지만 더욱 절망적인 점은 따로 있었다.
“크르르…….”
분명 기가스 팔라스 역시 네메시스의 방패로 반사 데미지를 입었을 텐데도 녀석은 멀쩡했다. 간지럽다는 듯 자신의 오른팔을 가볍게 훌훌 털며 대규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쪽은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은데.’
방금 전 공격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대규는 섣불리 녀석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휘익!
일단 무조건 하늘 높이 날아올라 녀석으로부터 멀어졌다. 이러면 녀석도 못 따라오겠지.
우선은 녀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전투 전략을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타탓!
기가스 팔라스가 땅을 있는 힘껏 디디며 공중으로 점프했다.
“크어어!”
한 번 점프한 것만으로도 대규가 있는 위치만큼 도달했다.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드는 녀석.
대규는 몸을 숙여 이번엔 땅을 향해 급강하하며 공격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거대한 검날이 다행히 허공을 갈랐고 대규의 몸엔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사방에서 녀석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휙휙휙.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칼날을 피했다. 한 방이라도 맞으면 바로 죽는다.
꼭 자신이 파리채를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파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상에 따르면, 기가스 팔라스는 거인형 몬스터이기 때문에 약점은 경추 혹은 심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론 약점에 접근조차 불가능하잖아!’
게다가 공략 영상을 통해 알아낸 절망적인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자신 정도 레벨을 지닌 자는 기가스 팔라스와 일대일로 싸우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영상에 따르면, 최소 두세 명 이상이어야 저 무시무시한 거인 녀석을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코르네우스 장군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럼 기가스 팔라스를 해치우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지로 장군을 데려갈 때 확인했던 그의 몸 상태는 전투 불능이었다.
결국 대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라의 목걸이를 이용해 마신의 능력을 빌려 녀석을 해치우는 것이다.
목걸이를 봤을 때 당장 떠올랐던 마신의 스킬은 적의 모든 스탯과 능력치를 50% 깎아 버리는 ‘파라오의 저주’와 괴물 뱀을 소환하는 ‘아포피스 소환’.
둘 중에 살짝 고민했지만, 결국 아포피스 소환이 낫다고 생각했다.
파라오의 저주는 자신과 실력이 엇비슷한 상대에게 효과적이다. 하지만 기가스 팔라스는 대규와 엇비슷한 수준이 아니었다.
따라서 저 엄청난 녀석의 스탯과 능력이 50% 감소된다고 해도, 자신이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괴물 뱀 아포피스를 소환하는 것이다.
대규의 머릿속엔 전에 체험판 스킬을 사용하면서 봤던 아포피스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 괴물 뱀이라면 어떻게든 저 녀석을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
아포피스는 몸통의 굵기만 5미터에 길이는 100여 미터에 달한다.
절대 기가스 팔라스에게 밀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불러낼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자신의 권위 스탯은 20. 그렇다면 20초 동안만 아포피스를 소환할 수 있다.
‘과연 20초 안에 그 괴물 뱀이 저 녀석을 해치울 수 있을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설사 죽이진 못한다 하더라도 치명상은 분명히 입히겠지.’
아포피스에게 치명상을 입은 녀석이라면, 지금보다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코르네우스 장군이 말한 것처럼 아테나 여신이 보낸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다.
‘만약 위험해져도 황금 양털의 무적 효과가 발동한다. 그때 날개 달린 헤르메스의 신발로 후방 진지로 순간 이동 하자.’
이제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고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 거인 녀석에 의해 몇십 명의 병사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대규는 라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목걸이 팬던트의 검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우웅.
[능력을 빌려 올 마신과 그의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태양신 라의 아포피스 소환!
[태양신 라가 흔쾌히 아포피스 소환 스킬을 빌려줍니다. 상태창의 보유 스킬란에 가 보면 아포피스 소환 스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마신의 능력을 빌려 올 기회가 소진됐습니다.]
재빨리 상태창의 보유 스킬란을 확인했다.
아포피스 소환(횟수 제한 0/1)-태양신 라에 권속된 지옥의 괴물 뱀 아포피스를 전투 중 소환합니다. 권위 스탯이 높을수록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권위 1당 1초. 마나 소모 300.
머뭇거릴 틈 없이 빠르게 스킬을 시전했다.
우우우우우웅!
커다란 진동 소리가 죽음의 평원을 가득 메웠다.
“뭐, 뭐지……?”
전장의 산양 병사들이 불안한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동물적인 본능이었다.
지영 역시 흠칫했다. 자신의 손등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온몸이 싸늘해지고 알 수 없는 공포심이 밀려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어.’
기가스 팔라스 역시 동작을 멈췄다.
좌악-
붉은 하늘이 예리한 칼로 베인 듯 길게 갈라졌다.
갈라진 틈에서 검은 오로라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체험판에서 봤던 거랑 똑같았다. 이제 곧 나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꾸물꾸물.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아포피스!
괴물 뱀이 강림이 시작됐다.
* * *
“저, 저게 뭐야…….”
“말도 안 돼…….”
후방의 진지에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부지휘관들이 깜짝 놀라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힐링 마법으로 응급치료를 받아 정신을 좀 차린 코르네우스 역시 충격을 받았다.
100미터도 넘는 거대한 괴물 뱀이 하늘에서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키에에엑!
괴물 뱀은 거대한 혓바닥을 쉭쉭대더니 주둥이를 쩍 벌리고 기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전장의 병사들은 그 울음소리를 듣자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머리는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혀 몸이 결박당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포피스는 거대한 몸뚱이로 기가스 팔라스를 단번에 휘감아 버렸다. 그리고 재빨리 기가스 팔라스에게 달려들어 녀석의 목을 사정없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어떤 무기도 막아 냈던 거인의 붉은 피부에 뱀의 송곳니들이 사정없이 박혔다.
“끄으윽…….”
목을 물린 기가스 팔라스는 칼을 휘두르며 아포피스에게 저항했다.
칼날이 뱀의 몸뚱이에 박혔다.
치지직…….
뜨거운 연기가 뱀의 몸에서 피어오르며 기가스 팔라스의 칼은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끄으으……?!”
기가스 팔라스가 당황할 틈도 없이 아포피스는 녀석의 머리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와득, 와득, 와득.
뱀의 만찬이 시작됐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고 거인의 피부는 조각조각 난도질됐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그 압력으로 거인의 눈알이 공중에 튀어 올랐다. 보기만 해도 고어한 광경에 대규는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아포피스는 즐거운 표정으로 만찬을 즐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10초 만에 아포피스는 기가스 팔라스를 해치웠다. 머리 없는 거인의 몸뚱이가 굉음을 내며 평원 위에 쓰러졌다.
덤벼들던 상대가 축 늘어지자, 아포피스는 만찬이 짧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전장을 둘러봤다.
아군과 적군을 가릴 것 없이 모두 겁에 질렸다.
티타네스 족의 병사들을 본 아포피스의 눈빛이 빛났다.
세로로 쩍 벌어진 동공이 더욱 끔찍하게 수축됐고, 두려움을 느낀 병사들은 적진 쪽으로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스르륵.
거대 뱀은 몸을 빠르게 움직여 적군들보다 더욱 빨리 적진 앞으로 다가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끄으으…….”
티타네스 족 병사들의 얼굴엔 공포와 절망감이 스쳤고 아포피스의 얼굴엔 환희가 흘러넘쳤다.
아포피스는 기쁘게 주둥이를 벌려 병사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우적, 우적, 우적.
“끄아아아아!”
“크으으으…….”
티타네스 족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한 채 아포피스에게 잡아먹혔다.
검붉은 피가 아포피스의 주둥이를 끊임없이 적셨다. 뱀은 몇 날 며칠은 굶주린 것처럼 신나고 맹렬하게 병사들을 사정없이 잡아먹었다.
지옥의 풍경 같았다.
정확히 소환된 지 20초가 지나자 붉은 하늘이 길게 갈라졌다.
아포피스는 병사들을 잡아먹다 말고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검은 오로라가 피어오르는 하늘의 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가 버렸다.
‘대, 대체 저게 무엇이란 말이냐…….’
코르네우스 장군은 얼빠진 표정으로 방금 전까지 뱀이 있었던 곳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곳엔 뱀에게 잡아먹힌 적군의 검붉은 피가 호수처럼 고여 있었다.
시체는 뱀이 다 잡아먹어 버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방금 본 그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끔찍한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장군은 여태까지 전쟁터를 수차례 다녔지만 저런 무지막지한 괴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귀신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리다니!
‘저 뱀은 적군인가, 아군인가?’
기가스 팔라스와 티타네스 족 병사들을 잡아먹은 걸로 봐서는 이쪽 편인 것 같았다.
아테나 여신이 보낸 지원군은 절대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한, 아테나 여신의 군대에 저런 괴물은 없다.
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기지 앞의 대지가 우우웅 진동하며 황금빛 포탈이 열렸다.
포탈에서 수백 명의 병사와 장군 한 명이 나타났다.
아테나 여신이 보낸 지원군이었다.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있는 장군은 상체는 인간이지만 하체는 말이었다.
아테나 군대의 2군단장인 켄타로우스 족 장군 케이론!
케이론은 죽음의 평원 한가운데 목 없이 쓰러져 있는 기가스 팔라스의 시체를 바라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코르네우스에게 물었다.
“이봐, 코르네우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기가스가 나타났다는 지원군 요청 전서구를 받고 이렇게 달려왔는데…….”
코르네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규는 눈앞에 놓인, 목이 뜯겨 나간 기가스 팔라스의 시체를 바라봤다.
죽음의 평원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거대한 붉은 몸뚱이.
‘해치웠다…….’
설마설마했는데 아포피스의 능력은 엄청났다.
아포피스가 기가스 팔라스와 적군의 병사들을 잡아먹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며 속을 몇 번이나 게워 낼 뻔했다.
하지만 아포피스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절대 이 괴물을 해치우지 못했을 것이다.
속은 좀 안 좋지만 상급 스킬을 쓸 수 있도록 권위 스탯을 올려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적장, 기가스 팔라스를 해치워 많은 양의 경험치가 들어왔습니다.]
[마나를 50 흡수했습니다.]
[레벨이 3단계 추가 상승했습니다.]
3단계씩이나!
역시 기간토마키아 전투의 적장이라 그런지 스케일이 달랐다.
몸에서 하얀빛이 일었고 기가스 팔라스에게 입은 부상들이 말끔하게 치료됐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왜 아이템이 안 보이지?’
이 정도 되는 몬스터를 쓰러트렸으면 뭐라도 나와야 정상이었다. 심지어 공략집에서도 보상으로 레드 등급 젬스톤이나 희귀 아이템을 드롭한다고 했는데.
‘응?’
촤아악.
기가스 팔라스의 시체에서 황금빛이 은은하게 일더니 공중에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두둥실.
바닥에서 1미터 정도 떠오른 거대한 시체는 순간 팟, 하고 사라졌다.
‘뭐야?’
그때 메시지창이 줄줄이 떠올랐다.
[동부 전선 방어전에 승리했습니다. 아테나 여신이 승리를 매우 기뻐합니다.]
[전공을 가리기 위해 아테나 여신이 적장 기가스 팔라스의 시체를 주둔지로 옮겼습니다.]
[주둔지로 돌아가면 각자 이룩한 전공에 따라 아테나 여신이 보상을 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