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74화. 죽음의 평원 (2)
저 정도면 확실히 실력자였다. 튜토리얼인 제1, 제2 타르타로스를 겪고 들어온 인간 영웅들이라지만 처음 전투에 배속되면 당황해서 얼어붙거나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어느새 티타네스 족 병사들의 전력은 거의 절반 정도로 줄어 있었다.
그에 비해 아군의 전력 손실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
대승이었다.
아군들은 하나가 되어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함성의 가운데 코르네우스 장군이 있었다.
“아군은 돌격하라!”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의 뇌리엔 오로지 승리의 희열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적진의 한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대형 거인.
키는 약 15미터 정도 되어 보였고,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육중한 몸집이었다. 그리고 온몸이 검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 정도 되는 거인이 있었다면 애초에 처음부터 적진에서 보여야 했는데…….’
붉은 거인은 말 그대로 홀연히 전장에 나타났다.
하지만 티타네스 족 병력은 이제 500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반면 이쪽 병력은 4,000이 넘었다.
저 붉은 거인이 아무리 그 크기가 장대하다고 해도, 고작 한 마리 늘어난 것 가지고는 열세를 뒤집을 수 없다.
병사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저 거인 자식은 뭐야? 당장 해치우자!”
“우리 아테나 여신의 최강 군단 카페르 3군단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저런 거인 자식을 달랑 한 마리만 내보내다니! 이런 모욕은 감당할 수 없다고!”
산양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붉은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기지에서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코르네우스는 달랐다.
그는 경악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코르네우스 옆에 서 있는 부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있는 적에게 전의를 불태우기 바쁜 병사들이라면 모를까, 전장을 관망하고 있는 그들이 봤을 때, 저 대형 거인의 등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코르네우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대체 저 거인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코르네우스의 군단은 애초에 첫 동부 전선 전투를 시작하기 전, 적군의 병력에 대해 빠짐없이 조사했다. 물론 완벽하게 모든 것을 조사했다고 볼 순 없지만, 그래도 저런 대형 거인 같은 특별한 병력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저 거인은 전장에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부지휘관, 저거, 기가스…….”
“그렇습니다.”
코르네우스와 부지휘관들은 불안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붉은 거인의 정체는 기가스(Gigas).
기가스는 일반적인 거인과 다른 상위 종의 거인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 병사들을 지휘하는 대장급 거인들이다.
‘하지만 이런 동부 전선에 기가스가 왜?’
보통 상위 종 거인인 기가스는 아테나 여신이 직접 지휘하는 전장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동부 전선의 전투엔 일반적으로 기가스 같은 상위 종 거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코르네우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신들은 저 기가스를 가볍게 해치울 수 있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한다.
당장 자신이 달려들어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이었다.
하물며 일반 병사들은…….
분명 끔찍한 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돌격, 앞으로!”
“저 붉은 녀석을 해치워 아테나 여신의 영광을 더하자!”
와아아아-
산양 병사들의 발굽들이 지면을 박차고 내달렸다. 붉은 기가스 주변을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산양 병사가 달려들어 포위하기 시작했다.
* * *
대규 역시 전장 한가운데 등장한 붉은 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저건.’
거인을 바라본 대규의 얼굴이 굳었다.
일단 외관이 이상했다. 단순히 붉기만 한 것이 아니다.
여태까지 봐 왔던 거인형 몬스터들은 몸집만 거대했지, 신체 구조나 비율은 인간과 비슷했다. 하지만 저 붉은 거인은 좀 달랐다.
몸통은 몹시 말라 날렵했지만, 거기에 붙은 두 팔은 우악스러운 정도로 거대했다.
그때 공략집이 떴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기가스 팔라스(Gigas Pallas)
보상: 높은 경험치와 마나, 낮은 확률로 레드 등급 젬스톤과 전설 아이템 드롭
특징: 거인 대장 기가스의 일원. 파괴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몹시 잔혹하고, 피부는 희귀 등급 이하의 무기로는 절대 뚫을 수 없다. 매우 민첩하며 광역 공격 파괴의 괴성 스킬을 사용한다.
<기가스 팔라스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기가스 팔라스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기가스 팔라스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기가스 팔라스의 약점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약점 영상을 재생한 대규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미친… 이게 뭐야.’
기가스 팔라스의 공격 영상을 보자 온몸이 서늘해졌다.
아누비스의 순간 이동술에 가까운 민첩한 몸놀림이라니. 게다가 녀석의 마른 몸뚱이는 비리비리해 보이지만, 저 우악스러운 팔이 휘둘러지면 한 번에 몇십 명의 적이 쓸려 나간다.
게다가 드물게 시전하긴 하지만, 마력을 소모해 반경 10미터 이내의 적들을 단숨에 휩쓸어 버리는 광역 공격은 더욱 끔찍했다.
하지만 산양 병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기가스 팔라스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저렇게 급하게 들이대서는 안 돼!’
마침내 기가스 팔라스가 칼을 뽑았다.
서걱-
너무 빨라서 칼날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칼날에 산양 병사 수십 명의 목이 날아가 버렸다.
땅에서 튀어 오른 쇠사슬 구속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타타탓!
그때 아군의 기지 쪽에서 수백 개의 석궁이 날아왔다.
날아온 석궁들은 기가스 팔라스의 몸에 꽂혔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산양 정령 카페르 족의 석궁은 일반적인 거인 병사들의 몸을 단번에 뚫어 버리는 강력한 무기였다. 하지만 워낙 기가스 팔라스의 피부가 단단했다. 석궁으론 녀석의 피부에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기가스 팔라스는 날아오는 석궁을 맞으면서 간지럽다는 듯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산양 병사들은 더욱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패닉에 휩싸인 병사들은 이제 마구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살려 줘…….”
하지만 소용없었다.
기가스 팔라스는 병사들을 마구 살육하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칼날이 움직일 때마다 평원 바닥이 산양 병사들의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산더미같이 시체가 쌓였다.
후방 쪽에 있던 지영과 신입 영웅들은 그 광경을 보고 온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영웅 중 한 명은 다리가 풀린 채 오줌을 지리기까지 했다.
아군 기지의 코르네우스 장군 역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부지휘관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테나 여신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군단장님!”
정신을 차린 코르네우스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황금빛의 작은 새가 생겨났다. 전서구였다.
작은 새는 날갯짓을 하다가 팟, 하고 사라졌다.
전서구를 보냈으니 아테나 여신은 지원군을 보내 줄 것이다. 하지만 지원군이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군단을 책임지고 있는 군단장으로서 저 붉은 기가스 팔라스를 막아야 했다.
가만히 이곳에서 전장을 바라보며 자신의 병사들이 죽어 가는 걸 관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코르네우스는 투구를 쓴 뒤, 부지휘관들에게 말했다.
“이곳을 부탁하네.”
“군단장님, 안 됩니다!”
“곧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돼. 병사들이 죽어 가는 걸 구경만 할 순 없어!”
말을 마친 코르네우스는 자신의 흑마를 몰고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타그닥, 타그닥.
그는 저 멀리서 자신의 병사들을 살육하고 있는 기가스 팔라스를 향해 소리쳤다.
“이 거인 녀석아!”
코르네우스가 검집에서 칼을 꺼내자,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검신이 있어야 할 곳에는 눈부시게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총 길이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광선검!
그는 기가스 팔라스 앞으로 말을 몰고 간 뒤, 말 등에서 높게 점프했다.
“이얍!”
탓, 탓!
민첩한 몸놀림으로 기가스 팔라스의 무릎과 허리를 딛고 올라가 점프했다.
그의 눈앞에 기가스 팔라스의 얼굴이 보였다.
“받아라!”
거인의 관자놀이를 노리고 날아드는 코르네우스의 광선검.
번쩍이는 검신이 관자놀이를 파고들려는 순간, 기가스 팔라스는 거인답지 않게 민첩한 동작으로 몸을 푹 숙였다.
하지만 관자놀이를 노렸던 코르네우스의 광선검은 어느새 거인의 등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공중에서 몸을 돌려 회전시키며 검의 궤도를 순식간에 바꾼 것이다.
‘엄청난 몸놀림이다!’
대규는 코르네우스의 몸놀림을 보며 감탄했다.
하지만 기가스 팔라스도 만만치 않았다.
바로 몸을 뒤집어 자신의 검으로 코르네우스의 광선검을 쳐 냈다. 검신끼리 맞닿은 부분에서 불꽃이 튀었고 그들은 동시에 물러났다.
“역시 코르네우스 장군님이시다!”
“우리도 열심히 싸우자!”
병사들은 군단장인 장군이 열심히 싸우는 걸 보고 힘을 얻었는지 나머지 티타네스 족 병사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기가스 팔라스 때문에 많이 위축되긴 했지만, 어쨌든 아군 쪽 병력이 많다. 군단장인 코르네우스가 기가스 팔라스를 상대한다면 산양 병사들이 나머지 남은 적군 병사들은 손쉽게 전멸시킬 수 있다.
확실히 적군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코르네우스의 광선검이 기가스 팔라스의 허리를 스치는 순간.
퍽!
기가스 팔라스가 몸을 180도 회전하며 팔꿈치로 장군의 몸을 가격했다.
엄청난 파열음.
코르네우스 장군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기가스 팔라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붉은 팔을 들어 장군의 몸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아, 안 돼…….”
병사들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기가스 팔라스의 칼날이 코르네우스의 몸을 가르려는 찰나, 무언가가 공중에 나타나 코르네우스의 몸을 붙잡고 잽싸게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휘익-
칼날은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크르르르르…….”
기가스 팔라스가 분노한 표정으로 성난 신음을 흘렸다.
“괜찮으십니까?”
대규는 코르세우스의 몸을 안은 채 허공을 날아 기지로 향하며 말했다.
“으으… 쿨럭!”
그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코르세우스는 신음을 내며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버, 버텨야 한다… 아테나 여신이 지원군을 보낼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지에 코르세우스를 내려놓은 대규는 가만히 전장의 붉은 거인, 기가스 팔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좀 강했던 적수인 코르네우스가 사라지자 거인은 미친 듯이 살육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차차창!
붉은 거인의 몸에서 새카만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광역 공격인가.’
사방에서 날아드는 산양 병사들의 무기들을 쾌검으로 쳐낸 뒤, 병사들을 향해 끔찍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크어어어!”
기가스 팔라스의 광역 공격 ‘파괴의 괴성’!
병사들은 그 비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날아가 버렸다.
공략집에서 본 그대로였다. 새카만 기운이 몸에서 피어오르고 어마어마한 포효로 적군들을 초토화시키는 광역 공격기!
실제로 보니 훨씬 무시무시했다.
대규는 이를 악물었다.
저대로 병사들이 죽게 놔둘 순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보상이 탐나서 녀석을 해치워야겠다고 마음먹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바로 눈앞에서 떼거리로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니 보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 녀석으로부터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무조건 버텨 내야 한다!
대규는 헤르메스의 신발을 신고 다시 전장를 향해 날아갔다.
저런 녀석은 공중전으로 상대해야 한다. 밑에서 암만 애써 봐야 아무것도 안 된다.
공중에서 체인 블레이드를 휘둘러 녀석의 급소를 가격했다.
휙휙.
기가스 팔라스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체인 블레이드의 칼날을 순식간에 피했다.
‘무슨 거인 주제에 몸놀림이…….’
도무지 급소를 가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수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
뛰어난 반사 신경을 이용해 치명상은 피했지만, 자잘한 부상을 입었다. 흑린갑의 비늘들도 녀석의 공격은 완전히 막아 주지 못했다.
‘빌어먹을, 알키오네오스 때처럼 황금 양털 조끼의 효과를 봐야 하나…….’
황금 양털의 버프 효과는 젬스톤을 통해 업그레이드해 놔서 이제 7초 동안 유지된다.
‘하지만 7초 동안 저 녀석을 해치울 수 있을까?’
알키오네오스의 경우엔 미리 심장 하나를 꿰뚫어 놔서 약해진 상태였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때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라의 목걸이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