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73화. 죽음의 평원 (1)
코르네우스 장군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언덕 아래 저 멀리 위치한 적진을 내려다보았다.
적군은 거인족 중 한 종족인 티타네스(Titanes) 족.
그들의 병력은 아군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그간 몇 차례 이곳 동부 전선 죽음의 평원에서 그들을 열심히 격파한 결과였다.
이제 오늘 전투만 치르면 저들의 부대는 지리멸렬할 것이다.
‘오늘 녀석들을 해치운다!’
티타네스 족은 코르네우스 장군이 지휘하는 산양 정령 카페르 족에게 몇 차례 패배해 전의를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코르네우스 장군으로서는 오늘이야말로 그간 끌어온 이 동부 전선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아테나 여신이 신입 영웅들을 자신의 전투로 배속했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본래 아테나 주둔지로 온 신입 영웅들은 빨리 전쟁터에 적응해야 했기에 첫 전투의 경우 위험하지 않고 안정적인 전선의 방어전으로 배치하는 게 관례였다.
신입 영웅들이 처음 온 곳이 그가 지휘하는 이곳 동부 전선이라는 건, 그만큼 그가 이곳의 전투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걸 의미했다.
‘또한 오늘 동부 전선의 저 티타네스 녀석들을 완전히 물리쳐 주둔지로 돌아간다면, 군단장 중에서도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대장군까지도…….’
일반적으로 자신 같은 산양 카페르 족, 즉 반인반수 정령은 대장군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운다고 해도 말이다. 신들은 일반적으로 같은 신족만을 대장군으로 뒀다. 일종의 신분 제한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아테나 여신은 달랐다.
그녀는 강하고 뛰어난 실력자를 총애했다.
아테나 여신은 강하고 실력이 있는 자라면, 인간이든, 정령이든, 반신반인이든 가리지 않고 실력에 맞는 자리를 주었다. 만약 코르네우스가 다른 신의 권속이었다면 지금의 군단장 자리도 무리였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 해도 자신 같은 하급 반인반수의 정령은 기껏해야 대대를 통솔하는 대대장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어쨌든 이 전투를 완벽하게 승리로 이끌어 입지를 다진다!’
병력의 차이만 봐도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승리였다.
코르네우스 장군은 허공을 쥔 손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기지의 산양 나팔수들이 뿔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뿌우우-
“아테나 여신께 영광을!”
“아테나 여신께 영광을!”
쿠웅! 쿠웅! 쿠웅! 쿠웅!
병사들이 구호에 맞춰 무기를 땅바닥에 굴렸다. 그 바람에 생긴 진동음이 평원을 크게 뒤흔들었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평원이 울릴 때마다 코르네우스 장군의 심장도 뛰었다.
“전투 준비!”
우우웅!
척척-
장군이 명령을 내리자 맨 앞 열의 기마병과 보병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우오오오오-!
그 뒤의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산양의 울음소리들이 평원을 가득 메웠다.
6천의 군사가 일사불란하게 서 있는 장면은 누가 봐도 장관이었다.
“우와아!”
대규와 함께 서 있는 신입 영웅 중 몇 명도 주변 분위기에 격양된 듯,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함성을 질렀다.
물론 대규는 그러지 않았다. 함성을 지르는 영웅들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하긴, 저런 것도 효과가 있겠지.’
전투 전 함성을 내지르는 건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투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
‘우리가 이긴다.’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마음속의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적인 맷집이랄까?
실제로 전쟁에서 사기 진작은 매우 중요하다. 어쨌든 전투를 하는 건 로봇이 아니라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니까.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흔들리거나 뚝 떨어지면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 함성을 지르지 않았다.
저렇게 격양되어 분위기에 휩쓸리면 이성이 마비돼 버릴 수도 있다.
물론 전쟁이 벌어지면 이성이고 나발이고 자신의 적을 무조건 해치우는 게 최선의 목적이 돼 버린다.
하지만 이성이 마비되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동물과 같아진다.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시야가 한없이 좁아진다.
대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공적을 세워 아테나 여신의 눈에 들기 위해선 맹목적으로 싸워선 안 된다. 최대한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전투를 벌여야 했다.
여태까지 공략집을 사용해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미션들을 해 왔던 것처럼.
그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뭐지?’
병사들이 쿵쿵거리며 무기를 울리는 소리가 스피커 볼륨을 올린 것처럼 몇 배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갑옷이 스치는 소리, 숨소리 등 미세한 소리들까지 모조리 귓가에 들렸다.
청각이 몇십 배는 예민해진 것 같았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공략집이 떠올랐다.
<전투 감각 효과가 발동됩니다.>
그때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귀에 꽂혀 들었다.
“돌진하라!”
우아아아아아!
맨 앞 열부터 병사들이 적진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땅에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저 멀리 적진 쪽에서도 먼지가 서서히 피어오르며 이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됐다.
* * *
함성이 죽음의 평원을 가득 메웠다.
발밑에서 마구 피어오르는 흙먼지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영을 포함한 신입 영웅들은 제대로 달려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지영은 콜록거리며 흙먼지를 간신히 헤쳐 나가고 있었다. 바람의 걸음 스킬을 이용해도 빨리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없었다.
‘이런 게 전쟁터구나.’
여태까지 경험했던 제1, 제2 타르타로스와는 달랐다.
나름 사람들과 몬스터를 차근차근 해치웠던 타르타로스와 달리, 이곳 전쟁터는 그냥 아수라장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무기를 척척 휘둘렀던 병사들의 모습은 영화 속에나 나올 뿐이다. 현실은 흙먼지를 마셔 가며 적진을 향해 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먼지에 가려 시야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남자는 달랐다.
‘대체 대규 씨는…….’
지영은 저 멀리 자신을 훨씬 앞서 달려가는 대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불어닥치는 흙먼지에 면역이라도 된 듯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앞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한편, 대규는 열심히 적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먼지가 불어닥쳤지만 이상하게도 시야는 깨끗하게 트인 상태였다.
‘아무래도 전투 감각 덕분인 것 같군.’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적군의 병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티타네스 족의 거인 병사들은 일반 보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몸집이 5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자 공략집이 떴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티타네스 종족의 병사들
보상: 낮은 경험치와 마나, 낮은 확률로 그레이 등급 젬스톤 드롭
특징: 5미터 이상의 키에 근육이 잘 발달돼 있는 병사들. 레벨 40 이상의 능력치를 지니고 있다.
<티타네스 종족의 병사들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티타네스 종족의 병사들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티타네스 종족의 병사들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티타네스 종족의 병사들의 약점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그냥 평범한 보병인데 레벨 40 이상의 능력치를 지니고 있다니.
대규는 흑린갑의 투명화를 발동시켜 약점 영상을 꼼꼼히 숙지하기 시작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긴박한 전투 상황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영상을 보고 적의 약점을 간파해서 해치워야 했다.
솔직히 타르타로스에서 봤던 거인 몬스터와 비슷한 부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격 영상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무기를 휘두르는 완력이나 민첩성, 공격력 모두 위협적이었다. 심지어 검을 들고 있는 녀석들은 거대한 몸뚱이로 간단한 검술 기교를 펼치기도 했다.
‘역시 기간토마키아 전투라 그런지 타르타로스 때와는 다르군!’
대규는 영상을 숙지한 뒤 투명화 옵션을 풀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이제 맨 앞줄의 산양 병사들은 적진의 거인 병사들과 부딪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규는 솔직히 좀 의아했다.
아군인 산양 병사들의 키는 대규보다 작았다. 이쪽의 머릿수가 아무리 많다지만 저렇게 일대일로 붙으면 산양 병사 쪽이 체구나 파워에서 확실히 밀린다.
대체 병사들이 어떻게 저 거인들을 상대할지 궁금했다.
적군과 맨 앞줄의 아군 병사들이 부딪히려는 순간,
“끼에엑!”
타타탓!
거인 병사들이 비명을 내질렀고 그들의 발목 지점에서 뭔가가 튀어 올랐다.
쇠사슬!
땅에서 튀어나온 쇠사슬을 거인 병사들의 발목을 칭칭 감아 버렸다. 아군이 미리 설치해 놓은 쇠사슬 구속기였다.
언뜻 봐선 애들 장난 같은 함정이지만 효과는 좋았다. 맨 앞줄의 거인 병사들은 발이 막혀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산양 병사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이 묶인 거인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거인 병사 1명당 산양 병사 3명 정도가 붙어 안정적으로 전투를 진행했다.
“꾸으윽!”
아군의 병사들이 휘두르는 무기에 맞자 천천히 쓰러지는 거인 병사들.
‘쇠사슬 구속기라니. 이거 아군이 너무 유리하잖아. 어쨌든 나도 슬슬 시작하자.’
대규 역시 발이 묶인 한 거인 병사를 향해 헤르메스의 신발로 허공을 날아 달려들었다.
체인 블레이드를 휘두르려는 찰나,
뿌드득!
거인 병사가 완력을 발휘해 발목의 쇠사슬을 끊어 버렸다.
이런.
“크으으…….”
거인 병사의 입에선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났고 눈동자는 검붉게 빛나고 있었다.
거인 병사가 대규를 향해 손에 든 육중한 도끼를 내리쳤다.
휘릭-
‘미친! 뭐야, 이거.’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는 엄청난 스피드! 실제로 겪어 보니 영상보다 몇 배는 빠르게 느껴졌다.
제기랄. 그렇게 반사 신경을 키웠는데도 가뿐히 피하는 게 힘들 정도라니.
그때였다.
스스슥-
사방의 풍경이 느려지면서 녀석의 도끼가 그리는 궤도가 슬로모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궤도뿐만 아니라 벌렁벌렁하는 녀석의 콧구멍과 얼굴 위를 흐르는 땀방울이 떨어지는 모습까지 다 보였다.
‘이것도 전투 감각 효과인가?’
바로 몸을 돌려 도끼날을 피하자 주변 풍경은 원래대로 다시 돌아왔다.
쿠! 쿵!
녀석의 도끼날이 평원의 바닥에 사정없이 박혔고, 땅바닥이 쩌어억 갈라졌다.
녀석이 박힌 도끼날을 빼려고 하는 찰나, 대규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체인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휘리릭!
그동안 근성 스킬로 갈고닦은 검술 실력이 빛을 발했다.
녀석의 급소를 민첩하게 찌른 뒤, 움직임을 봉쇄하고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녀석의 몸을 체인 칼날로 한 바퀴 휘감았다.
우두둑.
거대한 몸뚱이를 휘감은 체인 칼날이 불꽃을 내며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꾸어어!”
쿵!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마나를 20 흡수했습니다.]
좋았어.
드디어 적군 하나를 해치웠다.
체인 블레이드를 회수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산양 병사들은 침착하게 쇠사슬에 묶인 거인들을 차근차근 상대해 나가고 있었다.
전투하는 모습을 보니 꽤 훈련을 잘 받은 것 같았다. 확실히 적군이 열세였다.
그 모습을 보자 자신감이 생겼다.
대규는 저 멀리 보이는 거인 병사를 향해 돌진했다.
* * *
한편 코르네우스 장군은 아군의 기지에서 전투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신입 영웅 대규가 거인 병사 한 마리를 홀로 해치운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졸개 보병이라 해도 티타네스 족의 병사는 신입 인간 영웅이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실제로 대규를 제외한 나머지 신입 영웅들은 전투에 적응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거나, 앞으로 제대로 전진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달간 쳬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자신의 산양 병사들도 쇠사슬 구속기와 3 : 1 정도의 병력이 돼야 안정적으로 거인 병사 한 명을 해치울 수 있었다.
그만큼 티타네스 족의 병사들은 강했다.
하지만 대규는 그들의 공격을 빠르게 피하는 것과 동시에 채찍같이 생긴 검을 휘둘러 대며 거인 병사를 신속하게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해치우기가 무섭게 다른 거인 병사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대단한 녀석이 들어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