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72화. 기간토 마키아 소환 (2)
대규는 전투 감각이라고 적힌 글자를 손끝으로 눌렀다.
<전투 감각이란 오감(五感)이 전투에 알맞게 초집중되는 능력입니다.>
모든 감각이 전투에 집중돼서 지금보다 몇 배는 예민해지는 능력인 것 같다.
전투 상황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
게다가 앞으로 자신이 갈 곳은 일대일 전투가 아닌, 다 대 다의 전투들이 벌어지는 전쟁터다.
전쟁터에서 저런 능력은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게다가 공격력도 30% 상승한다니.
대규는 공략집의 내용을 본 뒤, 마음을 굳혔다.
“…아테나 여신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대규가 대답을 하자 차원 문지기가 포탈을 열어 줬다.
포탈을 타고 이동한 곳은 주둔지였다.
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 헤르메스의 주둔지와 흡사하게 생겼다. 거대한 나무벽들이 둘러싸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엔 망루가 높게 솟아 있었다.
심지어 주둔지 중앙의 거대한 지휘 사령부 천막까지 똑같았다.
대규가 포탈에서 나오자 산양 머리를 하고 있는 반인반수의 병사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아테나 여신의 주둔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거기엔 자신 말고 다른 영웅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테나 여신을 선택해서 온 영웅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이지영.
늠름한 여전사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지영은, 왠지 모르게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제2 타르타로스와 아폴론의 연회장에서 그녀와 함께했던 데이비드 파티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영 역시 대규를 알아보고 살짝 고갯짓하며 인사를 했다.
‘대규 씨도 이곳으로 왔구나.’
그녀 역시 소환된 후 차원 문지기를 만났다.
차원 문지기는 그녀를 원하는 신들의 이름을 말해 줬다.
그녀를 원하는 신은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폴론.
아폴론은 소환되기 전, 연회 초대로 만난 적이 있었다.
아폴론은 물론 나쁘지 않은 신이었다. 그의 연회는 훌륭했고 그가 보여 준 가상 판테온도 끌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싸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말투에선 인간을 무시하는 태도가 느껴졌다.
게다가 지영을 연회에 초대하러 찾아왔을 때도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다.
‘여자 주제에 이토록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니. 경이롭구나.’
여자 주제에.
아폴론 입장에선 칭찬이라고 한 말이었겠지만, 지영은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물론 신 앞이라 그 위엄에 눌려 감히 티를 낼 순 없었지만.
하지만 연회 이후, 자신을 제외한 데이비드 파티의 나머지 일원들은 모두 아폴론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사실 그들 파티와는 현실에서도 종종 접촉을 했다. 외국인들도 많았지만, 메신저나 SNS를 이용해 연락을 했다.
그들이 아폴론을 택한 건 그놈의 양고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현실에 돌아와 연회에서 먹은 양고기를 떠올리며 그것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 양고기, 양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
‘고기를 다시 먹을 수만 있다면…….’
몇몇은 나중엔 고기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그 양고기는 아폴론의 계략 중 하나였다. 양고기의 유혹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 영웅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대규 역시 그 유혹에 잠깐 흔들렸지만, 강인한 정신력과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권위로 양고기의 유혹을 물리쳤다. 하지만 대다수의 영웅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지영은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에 연회에서 그 고기를 일절 먹지 않았다. 그래서 양고기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소환 문지기가 아폴론 말고 다른 신들의 이름을 대줘서 고마웠다.
아테나와 아프로디테 여신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테나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이고,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었다.
두 명의 여신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준 건 과분했지만, 지영은 솔직히 아프로디테보다 아테나가 더 끌렸다.
자신이 앞으로 참여해야 할 곳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
사랑과 아름다움보다는 지혜와 전투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테나를 선택하고 이곳에 왔는데 대규를 만난 것이다.
‘왠지 불안했는데 대규 씨도 이곳에 있으니 좀 안정된다.’
그녀가 아는 한, 대규는 차원의 틈 시절부터 절대 그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주둔지에 서 있는 영웅들은 대규와 지영을 포함해 총 8명이었다. 이들이 이번에 새로 주둔지에 온 영웅들인 듯싶었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은 아니군.’
지영과 대규를 제외한 나머지 6명은 타르타로스에서 한 번쯤은 본 적이 있는 얼굴들이었다. 항상 솔로 플레이를 고집한 대규이기에, 그들이 누군지 세세하게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대규를 안내했던 산양 병사가 입을 열었다.
“다 모인 것 같군요. 그럼 아테나 여신을 알현하러 갑시다.”
산양 병사는 대규와 영웅들을 지휘 사령부 천막으로 안내했다.
천막 안의 막사 내부는 헤르메스의 막사처럼 엄청 넓었다. 꼭 신전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카펫에 대리석 기둥이 빛나고 있던 헤르메스의 막사와 달리, 이곳은 튼튼한 나무 기둥들이 솟아나 있었다.
기둥 가운데엔 통로가 있었고, 통로 옆에는 황금빛 갑옷을 입은 장군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인간 영웅도 보였고 은백색의 빛이 몸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반신반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대규를 안내한 산양 병사처럼 반인반수의 장군들도 보였다. 신화 책에서 읽은 미노타우로스처럼 얼굴은 동물이지만 몸통은 인간인 장군도 있었고, 켄타로우스처럼 얼굴은 인간이지만 몸통이 동물인 장군도 있었다.
통로의 끝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왕좌가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하늘색 생머리를 한 미모의 여성!
황금 갑주를 입고 있는 아테나 여신이었다. 그녀의 황금 갑주 양 어깨에는 술이 달린 방패 같은 것이 떡하니 달려 있다. 각 방패에는 괴물의 끔찍한 머리가 새겨져 있었다.
바로 공략집이 떴다.
-차원의 틈 공략집-
신 이름: 아테나(Athena)
특징: 제우스의 딸로, 전쟁과 지혜를 관장하는 여신이다. 창과 방패를 들고 전쟁터를 호령하는 여전사며, 실력이 뛰어난 인간 영웅들을 좋아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배우자나 연인이 없는 처녀 신이기도 하다.
<아테나 신은 불사(不死)의 존재입니다.>
<아테나 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심연의 결계에 봉인할 수는 있습니다.>
<아테나 신을 심연의 결계에 봉인하려면,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책에서 본 대로 인간 영웅을 좋아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런 식이면 공략집하고 책이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닌가?’
그때 눈앞에 추가로 공략집이 떠올랐다.
<아테나 여신은 실력 있는 인간 영웅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녀의 부대 전투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훌륭한 영웅에겐 여신이 푸짐한 보상을 내립니다.>
그래, 이런 걸 알려 줘야 공략집이지!
대규는 속으로 씨익 웃었다. 아테나 여신을 택하길 잘한 것 같았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여러 영웅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신입 영웅들을 안내한 산양 병사가 정중하게 여신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이번에 저희 주둔지로 오게 된 신입 영웅들입니다.”
아테나는 영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8명이 전부인가? 이번엔 왜 이렇게 머릿수가 적지?”
“소문에 따르면, 아폴론 신에게 간 영웅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신은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폴론 그 자식이 미루스 비덴스를 대량으로 잡아들일 때부터 알아봤지. 그놈의 양고기에 홀린 녀석들인가 보군. 하여튼 바른 척은 다 하지만 뒤에서 수나 쓰는 엉큼한 녀석이라니까.”
여신은 표정을 핀 뒤, 고개를 숙인 신입 영웅들에게 위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맙구나. 나의 주둔지에 온 걸 환영한다, 인간 영웅들이여.”
온화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나, 아테나 여신의 군대에 배속돼 기간토마키아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다. 신입 영웅들인 만큼, 이번 소환에선 그리 힘들지 않은 전투에 배속될 것이다.”
신입 영웅들에겐 별로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너희들이 참여할 전투는 동부 전선 방어전이다. 코르네우스 장군의 동부 전선 기지로 가서 쳐들어오는 기간테스 병사들을 무찔러 전선을 방어하면 된다. 첫 전투이니만큼 방어전을 치르며 전쟁에 적응하도록 해라.”
여신은 자신의 앞에 일렬로 쭉 늘어져 있는 장군들 중, 산양 병사와 비슷하게 생긴 산양 장군을 바라보았다.
그 장군은 똑같은 산양이지만, 뿔이 두 배는 컸고 얼굴엔 털도 훨씬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다.
여신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카페르 족의 장군, 코르네우스여. 그대가 이들을 인솔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여신님.”
코르네우스는 오른팔을 척 굽혀 경의를 표한 뒤, 영웅들에게 말했다.
“신입 영웅들은 이리로!”
대규와 영웅들은 코르네우스를 따라 막사 밖으로 이동했다.
그가 털이 숭숭난 손을 허공에 크게 휘젓자 커다란 포탈이 생겼다.
“이리로 들어가라.”
대규와 영웅들은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 * *
우르릉-
쾅쾅!
검붉은 하늘엔 벼락이 쉴 새 없이 치고 있었다.
그 하늘 아래 깔려 있는 붉고 황량한 대지.
동부 전선인 ‘죽음의 평원’이었다.
거센 바람이 전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수천 명의 산양 병사들의 얼굴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하지만 바람을 맞는 산양 병사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꿋꿋하고 비장했다.
병사들 너머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떡하니 세워진 돌벽의 기지가 보였다.
기지 위에는 수백 명의 산양 궁수가 저 멀리 보이는 적진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그 옆에는 돌을 던질 수 있는 커다란 투석기도 보였다.
이곳이 아테나가 지휘하는 군단들 중, 3군단의 군단장인 코르네우스 장군이 지휘하고 있는 동부 전선이었다.
포탈에서 나온 영웅들은 아군의 진영을 넋 나간 듯 훑어봤다.
눈에 보이는 광경은 꼭 전쟁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엄청나군!’
쉴 새 없이 전장에 불어닥치는 거센 바람에, 신입 영웅들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코르네우스 장군은 그 바람을 뚫고 가, 눈앞에 서 있는 까만색 털을 휘날리는 준마 위에 척 앉았다.
우르릉- 쾅!
말을 타고 있는 그의 모습 뒤로 번개가 번쩍였다. 벼락을 등지고 선 그의 모습은 대장군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곳이 너희들이 전투를 벌일 동부 전선, 죽음의 평원이다! 이 정도 바람은 견뎌 내라. 너희들이 앞으로 상대할 것들은 제1, 제2 타르타로스에서 봤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를 테니까!”
그는 말머리를 돌리며 저 멀리 적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대규는 적진을 바라보았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적들의 모습을 일일이 볼 순 없었지만, 적군의 병력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병력은 아군에 비해 눈에 띌 만큼 열세였다.
아군의 병력은 어림잡아서 5천 정도는 된다. 그것도 보병만이다. 기마병에 기지에 있는 석궁 병들까지 가세하면 6천은 거뜬히 넘는다.
하지만 저쪽은 아무리 많게 잡아도 3천 정도.
적군의 장수들은 겁이라도 먹은 듯, 섣불리 전진하지 못하고 언덕 아래 저 멀리 넓은 평원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간단하겠는걸.’
왜 아테나 여신이 전쟁에 적응하라고 이곳으로 신입 영웅들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대규는 내심 실망스러웠다.
첫 전투이니만큼 대단한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아군은 무난하게 승리할 것이다.
‘나름 공적을 세워서 여신의 눈에 들고 싶었는데…….’
하지만 전쟁은 과정이 어떻든 이기는 게 중요하다. 승리하면 분명 여신은 보상을 내릴 것이고, 살아 돌아갈 확률도 높아진다.
대규뿐만 아니라 나머지 영웅들도 병력 차이를 인지했다.
“이 병력 차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래도 우리가 신입 영웅이니까 여신이 이곳으로 보낸 거겠죠.”
심지어 코르네우스 장군 역시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다.
“전투 준비!”
코르네우스 장군의 우렁찬 외침이 드넓은 평원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