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69화. 위기 (4)
<메일이 성공적으로 복구됐습니다.>
보낸 편지함에 메일들이 쫘르륵 떴다.
그중에서도 MPK의 신강혁 본부장과 주고받은 메일이 보였다.
다른 메일들은 무시하고 신강혁 본부장과 주고받은 메일들만 추렸다.
추린 뒤에 시간별로 정렬해 클릭했다.
딸깍, 딸깍.
아니나 다를까.
시간 순서로 살펴보니 메일들엔 대규식품의 제품들이 홈쇼핑 광고에 나오면 두 회사가 합심해 가짜 주문 전화를 넣고 취소하기로 계획한 정황이 드러나 있었다.
‘이 비열한 자식들……!’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는데 공략집창이 다시 떴다.
<자료를 저장할 저장 장치를 선택하십시오.>
<스마트폰/외장 하드/PC 내장 하드/USB>
당연히 저장한다!
그 메일들도 USB에 저장했다.
결국 이곳에 와서 이들이 반품 사태를 계획했다는 증거는 물론 추가로 유용한 자료들도 얻어 가게 됐다.
경쟁사들의 약점이 적힌 문서 파일, 극비로 진행하고 있는 향후 사업 계획서…….
대규는 단순히 이들을 고소하거나 혹은 합의해 돈을 받는 정도로 넘어가지 않을 예정이었다.
막상 증거 메일을 보고 이들이 정말 자신의 사업을 망하게 하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식으로 비열하게 자신을 훼방하는 자들을 가만히 둬서는 안 된다. 여기서 대충 마무리 지으면 이들은 또 다른 비열한 수를 쓸 것이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또 이런 짓을 할 것이다.
‘최대호의 경우를 보며 똑똑히 배웠지.‘
다시는 이런 짓을 못 하게 만들어야 한다.
대규는 최대호를 겪은 이후 이런 녀석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준섭과 만나 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이들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다.
모든 자료들을 USB에 저장하고 컴퓨터를 끈 대규는 헤르메스의 신발을 이용해 자신의 오피스텔로 순간 이동 했다.
* * *
경북 영주의 지진 대피소.
사람들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대피해 있는 상태였다.
다들 표정은 어두웠고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대피소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심지어 지진으로 집이 무너져 당장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가끔 여진으로 인해 땅이 진동하기도 했다.
사람들 틈에서 남자 아이 한 명이 훌쩍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나머지 가족들은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부상을 입어 병원에 실려 갔다. 운 좋게 소년만 무사히 상처 없이 살아남아 홀로 이곳 대피소로 오게 됐다.
“흐흑… 가족들이 보고 싶어…….”
그때 자원봉사자가 울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와 구호 물품을 건네며 말했다.
“얘야, 배고플 텐데 이거라도 먹으렴.”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도시락이었다. 하지만 상표도 없고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봉사자가 플라스틱 뚜껑을 열자 도시락에서 따끈한 김이 피어올랐고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바삭한 탕수육 치킨이 새콤달콤한 소스에 버무려져 있었고 야채 볶음밥은 막 볶은 것처럼 고슬고슬했다.
하지만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병원에 실려 간 가족들이 떠올라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땔수록 잘 먹어야지.”
“흑흑, 싫어요.”
배에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소년은 더욱 큰 소리로 울며 외쳤다.
“흑, 흐흑… 싫다구요!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을 거예요!”
“네가 잘 먹고 건강히 있어야 가족들도 무사히 돌아오는 거야.”
자원봉사자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다가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볶음밥을 한 숟갈 뜬 뒤 소년의 입에 넣어 줬다. 소년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밥을 받아먹었다.
그 순간 밥을 먹은 소년의 표정이 바뀌었다.
“……!”
어느새 줄줄 흘리던 눈물도 뚝 그쳤다.
너무 맛있었다.
도시락인데도 불구하고 탕수육 치킨은 갓 튀겨 낸 것처럼 몹시 바삭했으며 볶음밥 역시 눅눅하지 않고 고소했다. 게다가 치킨 위에 버무려진 양념은 새콤달콤하면서 감칠맛이 돌았다.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겠다는 결심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소년은 숟가락으로 도시락을 쉴 새 없이 퍼먹기 시작했다. 다 먹고 남은 소스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1분도 안 돼서 도시락을 다 비운 소년은 자원봉사자에게 물었다.
“누나, 이거 도시락 더 없어요?”
도시락을 더 찾는 사람은 소년뿐이 아니었다.
대피소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구호 물품이 쌓인 쪽으로 다가가며 소리치고 있었다.
“도시락 하나 더 주세요!”
“컵밥 더 있나요?”
자원봉사자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도시락과 컵밥을 사람들에게 건넸다.
영주의 지진 대피소에서 대규식품의 도시락은 열광적인 호응을 받고 있었다.
이후 인터넷에서도 완전 난리가 났다.
각종 SNS와 커뮤니티에서는 대피소 도시락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영주 대피소 도시락 소문 들음? 존맛이라더라.
-이미 도시락 마니아들 사이에선 소문 쫙 퍼졌다는. 도시락이란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퀄리티라고 함.
-근데 상표나 브랜드명도 없다면서? 혹시 그 도시락 어디 건지 아는 사람?
-방구석 백수인 나한테도 구호 물품으로 보내줬음 좋겠다. ㅠㅠ
심지어 도시락과 컵밥 인증샷 사진도 마구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진들과 게시글은 일파만파 퍼졌고 결국 탕꼬를 알아보는 글들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 저거 탕꼬 도시락 아니냐? 나 지난번 킨텍스 박람회 갔다가 부스에서 저 도시락 먹었는데… 진짜 존맛인 건 ㅇㅈ.
-탕꼬면 그 홈쇼핑 반품 사태 일어난 거기? 딱 보니까 남은 재고 처리하려고 저기 보냈네. 재고 처리도 하고 사람들도 도와줬다고 생색도 내고 개꿀.
-ㄴㄴㄴ 익명으로 보냈단다.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네.
-탕꼬가 뭐예요? 그게 뭔지 모르는 1人.
-신촌에서 난리 난 탕수육 치킨임. 진짜 맛있다능…….
-역시 탕꼬 도시락이었군. 사스가 탕꼬 b.
-와, 나 지방 사는데 서울 가면 한번 먹어 봐야겠다.
-근데 저렇게 맛있다는데 홈쇼핑에선 왜 취소 사태가 난 거임? 좀 이상하네.
얼마 후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영주 지진 대피소 도시락, 탕꼬 도시락, 대규식품 등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소식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대규식품의 구호 식품 지원에 대해 좋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간혹 가다 일부러 재고를 처리하려고 머리 굴린 거라는 의견들도 보였지만 그것은 소수일 뿐이었고 긍정적인 의견들이 훨씬 많았다.
준섭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먹힌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에선 이제 홈쇼핑 반품 사태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하는 논리적인 글들과 다른 경쟁사에서 일부러 그런 것 같다는 음모론도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이건 카더라긴 한데… 내 지인이 잘나가는 피자 체인으로 유명한 모 기업에 다니는데, 그쪽 회사에서 일부러 탕꼬 엿 먹이려고 확 주문했다 반품시켰다는 얘기가 있음.
-피자 체인으로 유명한 데면 설마 ㄷㄹㅁ 피자의 ㅈㅇㅍㄷ? 판사님, 이건 저희 집 고양이가 작성한 리플입니다!
-이거 신빙성 있는 게 내 친구가 탕꼬에서 잠깐 알바한 적 있거든? 걔가 그때 말해 준 건데, ㅈㅇㅍㄷ에서 탕꼬 프랜차이즈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탕꼬 사장이 깠다고 함. 그래서 앙심 품고 그랬을 수도…….
-ㄷㄷㄷ 푸드 마피아여, 뭐여?
여러모로 대규식품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준섭은 핸드폰으로 인터넷 화면을 대규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영주 지진 대피소에 물품을 더 지원하도록 하죠. 이 정도면 별도로 홍보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은 것 같습니다. 홍보 및 마케팅에 들어가는 비용도 아주 많이 절감될 거고요.”
영등포 건물을 담보로 잡아 대출받은 것도 있기 때문에 사업 비용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을 듯싶었다.
대규식품은 영주 지진 대피소에 따뜻한 발열 도시락과 일반 도시락 1만 개를 더 지원하기로 했다.
이미 반품된 재고 물량은 다 소진된 지 오래여서 추가로 도시락을 더 생산해야 했다.
이에 소수가 주장하는 재고 처리 누명도 벗을 수 있게 됐고, 대규는 기쁜 마음으로 구호 도시락을 만들었다.
그럴수록 대규식품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은 점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심지어 매장엔 인터넷의 도시락 관련 글을 보고 저 멀리 지방에서 찾아왔다는 손님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걸로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이걸로 끝내서는 안 되지.’
이제는 제일푸드시스템과 MPK에 복수할 때였다.
* * *
장사를 마치고 대규는 직원들을 모두 퇴근시킨 뒤 준섭과 단둘이 영등포 건물의 5층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렇게 묻는 준섭에게 대규는 말없이 소형 USB를 건넸다.
일전에 제일푸드시스템 본사에 잠입했을 때 기밀 폴더 및 자료들을 다 저장해 놓은 USB였다.
“이게 뭡니까?”
“한번 컴퓨터에 연결해 보세요.”
대규의 말을 들은 준섭은 USB를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에 연결했다.
이동식 드라이브 안에 ‘기밀’이라 적힌 폴더가 보였고 그걸 더블클릭했다.
폴더 안에 있는 문서 파일들을 살펴보던 준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사장님, 이건……!”
“그 폴더 말고 하나 더 있습니다. ‘증거 메일’이라 적힌 폴더도 보셨나요?”
딸깍, 딸깍.
준섭은 기밀 폴더 옆에 위치한 증거 메일 폴더도 더블클릭했다.
폴더 안엔 제일푸드시스템의 배정현과 MPK의 신강혁이 대규식품 홈쇼핑 반품 사태를 계획하며 주고받은 메일들이 모조리 들어 있었다.
준섭은 멍한 표정으로 대규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 사장님… 대체 이걸 어떻게…….”
“어떻게 구했는지 일일이 설명해 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차후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전혀 없을 겁니다.”
무단 침입을 하긴 했지만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CCTV에도 대규의 흔적은 전혀 남지 않았다. 게다가 사무실 역시 자신이 침입했던 흔적을 다 지웠다.
심지어 그곳에서 빠져나올 땐 신발의 순간 이동을 써서 빠져나왔다.
절대로 자신이 무단으로 침입했다는 사실이 발각될 리가 없었다.
대규는 준섭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정도 증거면 충분히 고소가 가능한가요?”
준섭은 열심히 파일들을 살펴본 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고소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대규는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극비 사업 계획서 말인가요?”
기밀 폴더에는 제일푸드시스템이 극비리에 진행하는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계획서가 있었다. 대규는 오피스텔로 돌아와 그 문서 파일을 대충 훑어봤다.
거기엔 제일푸드가 앞으로 벌일 사업들이 세세하고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업종과 메뉴, 개발, 연구, 그리고 사업 및 마케팅 전략까지 전부 말이다.
그 모든 걸 이쪽에서 선수 쳐서 미리 사업을 벌이면 어떨까?
‘무지 열 받겠지.’
좀 비열한 방법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먼저 선택한 건 저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그런데 준섭의 입에서 나온 말은 대규의 예상과 달랐다.
“사업 계획서를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더 확실하고 신속하게, 그리고 제대로 제일푸드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준섭은 노트북 화면을 대규에게 보여 줬다.
기밀 폴더 안에 있는 한 문서 파일이 보였다.
잠입했을 때 언뜻 스쳐 지나가듯 봤던 회계 관련 문서 파일이었다.
솔직히 그때는 그냥 회계 장부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저게 일반적인 장부라면 굳이 기밀 폴더에 꽁꽁 넣어 둘 필요가 없다.
대규는 준섭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정체가 뭡니까?”
“사장님이 한번 직접 열어 보시죠.”
딸깍, 딸깍-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이건……!’
파일을 훑어본 대규가 바로 준섭을 돌아보았다.
준섭이 씩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월척을 낚으셨습니다.”
그것은 제일 푸드시스템의 분식 회계(粉飾會計)를 기록한 이중장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