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화. 위기 (3)
아무리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게 지금 당장 필요하다지만 재난이란 건 비극적인 상황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크게 다치거나 죽어 가고 있다.
이런 재난 상황을 자신의 사업 이득을 위해 이용한다는 게 좀 꺼림칙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이번 지진에 대규식품은 비공식으로 구호 물품을 지원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부사장님, 그럼 대규식품은 비공식적으로 지원하기로 해요. 도시락 상표도 떼고 내용물 표기만 하고 익명으로 지원합시다.”
“하지만 그럼 홍보 효과는…….”
“사익을 위해 재난 상황을 이용하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익명으로 지원해도 분명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길 겁니다.”
“사장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영주의 지진 피해를 돕는 자선단체들에 컨택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수고하세요.”
대규가 전화를 끊으려는데 전화 저편에서 준섭의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런데 사장님…….”
“더 할 말이 있으신가요?”
“그게… 이번 반품 사태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의심스러운 부분이요? 방해 공작 말씀인가요?”
대규가 묻자 준섭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봐도 방해 공작에 대한 가능성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장님이 만든 도시락과 컵밥은 제가 먹어 봐도 그 맛이 완벽했거든요.”
대한제당의 외식 사업부에서 6년을 일한 준섭이 봐도 대규가 개발한 상품들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맛있었으며 재료에도 이상이 없었다. 문제가 되는 식품첨가물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홈쇼핑의 광고 방영이나 유통 등 외부 요소들도 척척 순조롭게 진행됐다.
물론 다른 변수가 있는 경우도 있다. 상품의 모델로 연예인이나 유명한 공인을 고용했는데 그 모델이 사고를 치거나 논란에 휩싸이면 그 여파로 상품의 이미지까지 떨어져 판매량에 영향을 미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주)대규식품은 논란거리의 공인을 모델로 고용한 적도 없다. 따라서 이번 반품 사태는 너무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준섭은 박람회에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부스를 바라봤던 제일푸드시스템의 배정현 본부장과 MPK의 신강혁 본부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준섭이 알기로 제일푸드시스템 정현의 경우 예전에 탕꼬를 찾아와 프랜차이즈 사업을 권유했지만 대규에게 단박에 거절당한 이력도 있었다.
여러모로 수상했다.
“사장님, 이건 제 홈쇼핑 인맥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제일푸드시스템에서 일전에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그런 일을 벌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쪽에서 이럴 작정으로 직원이나 알바를 고용해서 주문 전화를 걸었다가 취소해 버린 것 같다는 심정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준섭의 얘기를 듣자 꽤 그럴듯했다.
화가 조금씩 치밀어 올랐다. 대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게 정말 사실이라 해도… 어떻게 그런 비열한 짓을 할 수 있죠? 상대방을 망하게 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가요?”
준섭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원래 이 바닥이 다 그렇습니다. 돈 굴리는 비즈니스다 보니까 종종 더럽고 치사한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고소 가능합니까?”
“아직은 심증뿐이지만 사실이라고 해도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고소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고소를 해 재판을 하든, 그쪽하고 협상을 하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직접 알아봐야겠다.’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탕꼬 사업은 단순히 식당경영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걸 투자한 사업이다. 게다가…….
대규는 매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생각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준섭, 그리고 직원들의 명운까지 걸려 있는 사업이다.
‘만약 제일푸드시스템이 정말 그런 비열한 방식으로 방해를 한 거라면 용서할 수 없다.’
일단은 준섭에게 구호품 지원에 대해 맡기고 자신은 이 문제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재난 자선단체를 컨택해 도시락과 컵밥을 구호품으로 보내세요. 이 일에 대해선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준섭이 대답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대규는 인터넷을 통해 제일 푸드의 위치를 파악하고는 흑린갑과 헤르메스의 신발을 신고 도심의 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 * *
제일푸드시스템 본사의 옥상.
휘릭-
대규의 모습이 보였다. 헤르메스의 신발을 사용하니 순식간에 이곳까지 날아올 수 있었다.
눈앞에 공략집의 지도창을 띄웠다.
건물의 내부도가 쫘르륵 떴고 붉은 점들이 곳곳에 보였다.
손가락으로 눌러 설명을 보니 CCTV의 위치였다. 게다가 움직이는 하얀 점도 하나 보였다.
순찰을 하는 수위.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라 빌딩 전체 불은 꺼져 있었다.
얼마 후 순찰을 도는 걸 마친 수위는 1층의 수위실로 들어갔다.
대규는 내부도에 표시된 건물 8층을 주시했다.
그곳에 반짝이고 있는 노란 점. 손끝으로 눌러보니 이렇게 떴다.
<외식 사업부 기획본부장 배정현의 사무실>
대규는 최대한 CCTV의 사각지대를 노려 헤르메스의 신발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신발의 이동 속도는 바람처럼 빨라서 혹여 CCTV에 잡힌다 해도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타타탓!
순식간에 8층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한 층 전체가 외식 사업부 사무실이었으며 거대한 유리문은 도어락이 걸려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사무실 안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모두 퇴근해 텅 비어 있었다.
‘그것보다 이 잠긴 문을 어떻게 연다?’
스킬로 문을 부술 수도 없고.
‘아르고스 지하 감옥처럼 마스터키가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때 공략집이 떠올랐다.
<문에 걸린 도어락을 여시겠습니까?>
‘이런 것도 되다니. 업데이트 효과인가?’
고개를 끄덕이자 철컥, 소리가 나며 유리문이 열렸다.
이게 정말 업데이트된 능력이라면 이 세상에 잠겨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든 무단 침입이 가능하겠는데…….’
안으로 들어갔지만 밖에서 본 것처럼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월별 스케줄이 적힌 게시판, 사업 현황 자료들 등이 어지럽게 벽에 붙어 있었다.
대규는 사무실 안에 따로 떨어져 있는 개별 사무실 앞으로 다가갔다.
기획본부장 배정현의 사무실이었다.
공략집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그 뒤엔 기다란 마호가니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엔 컴퓨터 한 대와 정갈하게 서류철들이 놓여 있었다.
대규는 그쪽으로 다가가 서류철의 자료들부터 꼼꼼히 살펴봤다. 하지만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외식 사업부의 일상적인 업무 보고뿐이었다.
이번에는 컴퓨터 차례다.
위이잉-
본체 전원 버튼을 누르자 부팅 소리가 나면서 컴퓨터가 켜졌다.
캄캄한 사무실에 컴퓨터 모니터에서 나오는 불빛만이 대규의 얼굴을 비췄다.
바탕 화면에는 몇 개의 폴더가 있었다.
2016 하반기 사업 계획,
투자 현황,
…….
그중 맨 아래쪽에 위치한 폴더 한 개가 눈에 들어왔다. 폴더명은 딱 두 글자.
[기밀]
이거다.
대규는 기밀 폴더를 더블클릭했다. 그러자 화면에 작은 창이 떠올랐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세요.]
빌어먹을.
하긴, 기밀 폴더를 그냥 떡하니 놔둘 리가 없지.
그 순간 눈앞에 공략집이 떴다.
<폴더에 걸려 있는 패스워드를 푸시겠습니까?>
도어락에 이어 패스워드까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하자 컴퓨터 화면이 이상하게 변했다.
까만 화면이 뜨고 알 수 없는 이진수들과 시스템 용어들이 쫘르륵 뜨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몇 번 봤던, 흔히 해커들이 컴퓨터를 해킹할 때 나오는 시스템창 화면 같았다.
대규는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주변엔 자신밖에 없었다.
공략집이 떠올랐다.
<암호를 성공적으로 풀었습니다.>
시스템창이 사라졌고 다시 윈도우 바탕화면으로 돌아왔다.
대규는 기밀 폴더를 다시 더블클릭했다.
열린다.
‘이번 업데이트는 정말 대박이군.’
기밀 폴더 안에는 몇 개의 문서 파일들이 있었다.
우선은 제일푸드시스템이 조만간 진행할 프랜차이즈 사업 계획서였다. 극비 문서라고 머리말이 적힌 걸로 봐서 경쟁사 몰래 진행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회계에 관계된 문서도 하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눈길을 끈 건 국내 요식 업체 기업들의 이름이 적힌 거였다.
MPK.
대한제당.
석정푸드.
더분코리아.
…….
심지어 맨 하단에는 (주)대규식품도 있었다.
뭔지 궁금해 일단 맨 상단의 MPK 파일부터 클릭해 봤다.
‘이건……!’
경쟁사들의 약점을 뒷조사해 꾸린 문서 파일들이었다. MPK의 경우 본부장 신강혁에 대한 뒷조사는 물론 팀 내의 불화, 그리고 회장 일가의 직계 경영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꼭 항간에 떠도는 증권가 찌라시를 보는 것 같았다.
밑에 있는 나머지 기업 파일들도 다 그런 식이었다.
대규는 자신의 회사 (주)대규식품 문서 파일도 확인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다만 갑자기 성장했으며 음식이 이상할 정도로 맛있다는 코멘트와 영등포 건물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근 건물을 두 채를 구입한 정황이 의심스러움. 특히 영등포 건물의 경우 본래 건물주는 조직 폭력배 조영제였는데, 갑자기 같은 조직원 최대호로 바뀌고 얼마 후, 김대규로 바뀜. 이 부분을 철저히 파악할 것.]
‘내 뒷조사도 했구나.’
그 외에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당연하다. 자신은 범법 행위를 한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기밀 폴더엔 경쟁사의 약점 문서 파일과 사업 계획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이 홈쇼핑 반품 사태를 주도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그런 반품 사태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서 보관할 멍청이가 어디 있겠어.’
그것보다 이 문서 파일들은 대박인걸.
이걸 갖고 있다면 경쟁사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정보다.
굳이 비열하게 이 약점들을 잡고 협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업을 진행하면서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공략집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자료를 저장할 저장 장치를 선택하십시오.>
<스마트폰/외장 하드/PC 내장 하드/USB>
옛날에 가게에서 진상을 피웠던 파워 블로거들의 약점 영상을 봤을 때도 떠올랐던 창이다.
이런 자료들도 다 저장할 수 있었던 거군.
마침 증거 수집을 위해 혹시 몰라 가져왔던 소형 USB가 있었고, 대규는 항목 중 USB를 선택해 기밀 폴더를 아예 통째로 저장했다.
<선택한 저장 장치로 자료가 저장됐습니다.>
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증거인 이들이 홈쇼핑 반품 사태를 계획했다는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보다 이게 정말 제일푸드시스템의 단독 범행일까?’
MPK가 가세했을 가능성도 떠올려 봤다.
그럴 만도 한 게 박람회에서 대한제당 이재신 전무가 투자를 한다고 했을 때 그들은 둘 다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배정현이라면 그와 손잡고 아예 크게 타격을 입힐 것 같았다.
‘그럼 분명 MPK 측에 연락을 했을 거다.’
대규는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해 정현의 사내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보낸 편지함을 클릭했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삭제되어 있었다.
‘철저한 인간.’
대규는 텅 빈 메일함의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설마… 공략집이 지워진 메일도 복구해 줄 수 있을까?
‘이것까지 해 주면 너무 사기인데. 아니지, 레드 젬스톤 5개, 현금으로 따지면 25억 원을 들여서 업데이트했는데!’
그때, 공략집이 떠올랐다.
<지워진 메일을 복구하시겠습니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