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66화. 위기 (1)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 도시였다.
도시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신전들과 원형 경기장들이 보였고, 사람들은 하얀색의 하늘하늘한 토가를 입고 걸어 다녔다.
판테온을 거니는 사람들의 몸에선 헤르메스와 아폴론처럼 은은한 황금빛이 퍼져 나왔다. 어떤 사람들에게선 옅은 은백색의 빛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지하 감옥에서 만났던 이데처럼 피부가 하얗고 귀가 뾰족한 정령들, 그리고 판과 실레노스처럼 반인반수의 존재들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건……!’
상점 앞에 서 있는 몇 명의 사람을 본 대규의 눈이 커졌다.
인간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갑옷이나 무기에선 은은한 빛이 발하고 있었다. 그들의 위풍당당한 풍채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이제 막 튜토리얼을 벗어난 초짜 영웅인 자신과 달랐다.
아폴론은 분명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 이상만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저 인간 영웅들은 반신반인의 존재란 건가?’
도시의 광장엔 거대한 분수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동상 위로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의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밝은 태양이 따스하고 평화롭게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이곳이 신들이 사는 판테온이다.”
아폴론이 인간 영웅들을 인솔하며 말했다.
야외의 대리석 의자에 앉아 마사지를 받는 아름다운 남녀의 모습이 보였고 온갖 물건을 파는 상점들도 보였다.
대규는 여기저기 둘러보기 바빴다. 눈동자가 여덟 개쯤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걸어가며 가게며, 가게 바깥에 놓인 물건들이며, 쇼핑하거나 음식을 즐기는 신 등 모든 걸 한꺼번에 보려고 고개를 이곳저곳 돌렸다.
그러다 한 장소를 본 대규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저곳은……!’
뜨거운 열기가 치솟아 오르고 깡깡거리는 육중한 소리가 들리는 곳.
바로 대장간이었다.
모루 위에선 온갖 무기들이 제작되고 있었고, 대장간의 간판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
아폴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무기 제작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운영하는 대장간이지. 세상에서 가장 질이 좋은 무기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신께서 직접 무기를 만드십니까?”
영웅 중 누군가가 묻자 아폴론은 살짝 거만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신들이 쓸 무기는 당연히 그가 직접 만들지. 하지만 반신반인들이 사용하는 무기나 기타 나머지 것들은 그의 제자들이 만든다.”
대규는 대장간에 있는 모루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헤파이스토스의 모루와 닮았는데 그것보다 더 크고 색이 까맸다. 모루의 표면은 반질반질하고, 더 단단한 것 같았다.
대장장이들이 만든 무기들은 확실히 일반적인 무기들과 달랐다. 강철로 만든 칼의 검신엔 황금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또한 어떤 창의 경우 아누비스의 창처럼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아무래도 물리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특수한 마법이 깃든 장비들인 듯싶었다.
딱 봐도 전설 등급 이상의 무기들 같았다.
그때 한 영웅이 대장간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제가 주문한 무기가 완성됐습니까?”
그러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반인반수 염소 인간이 무두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완성됐네. 저기 있네.”
염소 인간 대장장이가 앞발굽으로 가리킨 곳엔 삼지창 트라이던트가 세워져 있었다.
영웅이 거대한 포크 같은 트라이던트를 집어 들자 대장장이가 말했다.
“특별히 히드라의 화염을 담았지. 한번 휘둘러 보게.”
휘익-
타타탁!
영웅이 힘을 줘 무기를 휘두르자 허공에 검붉은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그 위에 불꽃으로 만들어진 용의 형상이 나타났다.
대규를 포함한, 아폴론을 따라온 인간 영웅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불꽃으로 만들어진 용은 입을 쩍 벌리고 불꽃을 발사했다.
‘물리 공격과 화염 마법을 동시에 쓸 수 있는 무기라니!’
‘완전 사기적인 무기 아니야?’
‘저런 무기들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인간 영웅들은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대규 역시 저 놀라운 트라이던트의 설명이라도 알아 두고 싶어 트라이던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공략집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이러지?’
그사이 아폴론과 영웅들은 이동하고 있었다.
‘신수(神獸) 백화점’이란 간판이 붙은 상점엔 온갖 특이하게 생긴 생물들이 잔뜩 있었다. 머리가 둘 달린 뱀, 날개 달린 망아지, 황금 사자 등…….
그 앞에서 몇몇 신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것 봐,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드래곤의 알이 들어왔다는군.”
“하지만 저게 언제 부화할지 어떻게 알아?”
그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타조 알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거대한 알이 있었다.
인간 영웅들은 몇몇 가게들을 더 지나쳤다. 상인들이 소리쳤다.
“생명력을 1시간 동안 10배 높여 주는 물약입니다!”
“스킬 시전 시 마나 소모량을 50% 줄여 주는 마법의 가루약입니다!”
저런 아이템이라면 전투할 때 몹시 유용하다. 특히 스킬 시전 시 마나 소모량을 절반으로 줄여 주는 가루약이라니. 마나 소모량이 큰 마신들의 상급 스킬을 빌려 올 때 쓰면 정말 좋을 것이다.
곧 정령들과 반신반인들이 모여들어 아이템을 사러 갔다.
대규를 포함한 영웅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곳은 차원의 틈이나 타르타로스와 다르다!
아폴론이 그런 그들을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대충 맛보기로 충분히 보여 준 것 같구나. 다시 돌아가자꾸나.”
순식간에 그들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너희들이 본 것은 진짜 판테온이 아니라 내가 불러온 가상현실이다. 실제 판테온과 동일하게 구성됐지.”
아무래도 가상현실이라 공략집이 뜨지 않았던 것 같았다.
가상현실이라지만 대규는 판테온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전에 헤르메스가 했던 말이 맞았다. 판테온의 세계는 신들의 세계라 그런지 보유하고 있는 무기나 아이템들의 질이 달랐다.
실제로 판테온의 세계에 가서 공략집을 작동시켜 그곳의 미션을 수행한다면?
그 대가로 떨어지는 보상은 어마어마하리라.
“오늘 연회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만족스러웠으면 좋겠군. 다음 소환까지 그대들이 나를 꼭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아폴론이 말을 마치자 인간 영웅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 * *
연회는 역시 스카우트 제의였다.
대신 아폴론은 헤르메스와 달리 맛있는 음식과 판테온의 모습을 보여 주며 회유했다.
‘하지만 너무 순조로운걸? 그 연회가 단순히 그 정도의 회유였을까?’
게다가 날이 갈수록 연회 때 먹었던 비루스 비덴스 양고기가 점점 먹고 싶어졌다. 그 고기를 구할 방법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공략집에서 봤던 아폴론의 성격이 걸렸다.
자신의 부탁이나 제안이 거절당하면 공격적으로 변한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인간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은연중에 드러나서 불편했다.
‘만약 같이 싸운다고 해도 그와는 거리를 좀 둬야겠어.’
하지만 아직도 누구랑 싸워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본 신은 헤르메스와 아폴론, 하지만 둘 다 마음에 쏙 들진 않았다.
소환까진 아직 열흘 정도 더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 * *
홈쇼핑에 주문 들어온 물량을 전부 팔았다.
컵밥과 도시락은 영등포의 테이크아웃 전문 지점에서 만들었다.
직원들과 열심히 컵밥, 도시락을 만드느라 영등포 지점의 장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가격 책정은 다음과 같았다.
컵밥은 3,000원,
일반 도시락은 3,500원,
다이어트 도시락은 4,000원,
발열 도시락은 5,500원.
주문은 총 4만 건이 들어왔다.
저 물건들이 무사히 팔리면 최소 몇억 원 단위의 매출을 올리게 된다.
그 매출을 올리게 되면 투자자들도 더욱 흥미를 보이고 투자 결정을 공고히 하게 될 것이다.
대규는 그래서 며칠간 정신없이 도시락과 컵밥을 만들며 입소문 양념 설비 공장도 계속해서 가동했다.
주문받은 물량을 거의 다 생산했을 때쯤 브레이크 타임에 준섭과 함께 밥을 먹었다.
시간이 없어 간단히 때우기 위해 탕꼬를 튀겨서 밥과 함께 먹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준섭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는 전화를 받으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홀로 밥을 먹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 접시에 놓인 건 탕수육 치킨 탕꼬였는데, 갑자기 아폴론의 연회에서 봤던 미루스 비덴스의 양 갈비로 바뀌어 보였다.
아무리 그 고기가 먹고 싶어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대규는 뭔가에 홀린 듯 젓가락으로 양 갈비 고기를 살짝 찔러 봤다.
적당히 익은 고기의 폭신한 질감이 젓가락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입에 군침이 돌았다.
전에 아폴론의 연회장에서 양 갈비 스테이크를 먹었을 때, 입안에서 육즙이 팡팡 터지고 사르르 녹던 게 떠올랐다.
대규는 젓가락으로 양 갈비 조각을 집었다. 집어서 입에 넣는 순간,
‘어?’
양 갈비 고기가 사라졌다. 분명 입에 넣었는데 아무것도 없다.
접시 위에 놓인 다른 고기 조각을 집어 다시 입에 넣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씹히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는데 못 먹으니까 미칠 것만 같았다.
오직 저 양 갈비를 먹고 싶단 생각만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차원의 열쇠를 꺼내 그곳으로 가 양고기를 마음껏 먹고 싶었다.
그때 멀리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님… 사장님……!”
준섭의 목소리!
어느새 준섭을 전화 통화를 마치고 대규 앞에 앉아 있었다.
대규는 정신을 차리고 준섭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몹시 심각해 보였다.
접시 위엔 원래대로 탕꼬가 놓여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규가 묻자 준섭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다급한 표정으로 외치는 준섭에게 대규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준섭의 얼굴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사업을 함께한 이래 저런 표정은 처음 봤다.
준섭이 입을 열었다.
“…홈쇼핑 회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갑자기 반품 주문이 빗발치고 있답니다.”
“뭐라고요?”
“거의 전체 주문의 30%나 반품 요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게 대체 무슨 일이죠?”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그쪽과 얘기를 더 해 봐야…….”
머릿속이 멍해졌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제품에 하자가 있나?’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자체 시식회도 꼼꼼하게 했고 심지어 HMR 박람회에서도 호평을 받았던 식품들이다. 게다가 입소문 양념을 사용했기 때문에 맛을 내기 위해 해로운 식품첨가물을 쓰지도 않았다.
준섭 역시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론…….”
준섭이 뒷말을 머뭇거리자 대규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솔직하게 얘기해 주세요.”
준섭은 대규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홈쇼핑 방송에 재차 방영하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게다가 대한제당에서 연결해 준 투자자들도 이 소식을 듣자마자 발을 빼고 뒤돌아서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는 대규에게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다 제 잘못입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사장님.”
“이러지 마세요. 이게 왜 부사장님 잘못입니까.”
대규가 고개를 숙이는 준섭을 만류했지만 준섭을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맡은 업무인데 이렇게 됐으니까요. 이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사업이니까 같이 책임을 져야죠. 우선 차근차근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알아보도록 해요.”
대규는 준섭과 함께 홈쇼핑 대량 반품 사태의 원인을 짚어 보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이 상황에서 반품 사태가 점점 확산된다면 물건을 받은 다른 고객들도 환불 신청을 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일단 일반적인 반품 사태와 다른 현상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둘이서 제조 과정을 되짚어 보고 맛도 확인해 봤지만, 이상이 없었다. 음식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의심스러운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고객들이 물건도 받기도 전에 취소를 해 버렸다는 점.
물론 단순히 변심해서 취소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가 이렇게 대량으로 일어나긴 힘들다.
소비자들은 다른 소비자들의 행동과 반응에 민감하니까 말이다.
“사장님, 이번 반품 사태는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군요.”
그러자 준섭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음… 사실 우리 회사가 단기간에 업계에서 폭풍 성장하다시피 해 엄청 주목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죠.”
“외람된 말이긴 하지만… 이 경우 가끔 경쟁사들이 방해 공작을 펼치기도 합니다.”
“뭐라고요? 방해 공작?”
대규가 놀라서 외치자 준섭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합적으로 점검해 보건대, 아무래도 경쟁사에서 작전을 부린 게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짚이는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무조건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제가 인맥 네트워크를 동원해 최대한 정보를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예, 저도 짚이는 곳이 한군데 있기는 한데. 그럼 서로 알아보기로 하지요. 만약에 실제로 방해 공작을 한 거라면 제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 * *
하지만 반품 사태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대한제당의 투자자들이 발을 뺀 것은 물론, 이번 반품 사태로 탕꼬의 브랜드 이미지가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나빠지면 대한제당의 투자자뿐만 아니라 향후 다른 투자자들을 유치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특히나 이런 반품 사태는 이유를 불문하고 투자자들에게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인다.
투자자들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다. 이익이 날 것 같으면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지만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리스크가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바로 재빠르게 발을 빼고 투자를 철회한다.
물론 대규는 변심한 투자자들을 무턱대고 원망하고 싶진 않았다. 기분은 우울했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돌아선 투자자들을 원망하는 것보다 이 반품 사태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대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결국, 준섭은 대규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 지금 현 상황에서 당장 투자를 받는 건 포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대신 독자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