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59화. 신이 찾아오다 (3)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
방금 쓰러뜨린 간수가 지키고 있던 감옥에서 나오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대규는 감옥 쪽으로 다가갔다.
빽빽한 무쇠 창살 틈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의 모습.
갈색 생머리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피부는 백옥같이 하얗고 눈은 초록빛이었다. 게다가 귀는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엘프처럼 길고 뾰족했다.
그녀를 바라보자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정령 이름: 이데(Ide)
특징: 크레타 섬에 있는 이다산의 정령. 시간의 신 크로노스에게 죽임 당할 뻔한 아기 제우스를 섬의 동굴에서 몰래 키웠다. 모성애가 강하며 아말테이아의 젖을 지니고 있다.
스킬: 이데의 쉴드-적의 공격에 대해 보호막을 형성해 물리 공격과 마법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
신들의 왕 제우스를 키웠던 정령이란다.
그것보다 아말테이아의 젖은 무엇일까. 그녀가 지니고 있는 아이템인 것 같았다.
아말테이아의 젖을 바라보자 공략집이 떴다.
<아말테이아의 젖>
<제우스가 어린 시절 마셨던 신의 음료. 신들에겐 영양제 수준의 음료지만 인간에겐 뛰어난 효과를 보인다. 레벨이 5 추가 상승하고 권위 스탯이 5 오른다.>
레벨 추가 상승보다도 권위 스탯의 상승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지금 자신의 권위 스탯은 7. 거기에 라의 목걸이 때문에 추가 상승한 3을 더하면 10이다.
여기에 이 젖을 마시면 최종적으로 권위 스탯은 15가 된다.
그렇게 되면 전에 봤던 마신들의 스킬들 중 붉은빛으로 빛났던 상급 스킬 7개의 설명을 볼 수도 있고, 그것을 마신들에게 빌려 올 수도 있다.
정말 탐나는 아이템이다.
‘이 젖을 얻어 낼 방법이 없을까.’
대규는 감옥에 갇혀 있는 이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절박한 표정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제발 저를 구해 주세요. 여긴 너무 춥고 어두워요…….”
대규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구해 주면 넌 나에게 뭘 해 줄 수 있지?”
그러자 그녀가 창살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뭐든, 뭐든 다 해 드릴게요!”
대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네가 지니고 있는 아말테이아의 젖을 줘.”
이데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이, 이건…….”
“싫음 말고.”
대규는 냉정하게 말한 뒤 그녀가 갇혀 있는 감옥을 등지고 돌아섰다. 저렇게 상대가 머뭇거릴 땐 오히려 냉정하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데는 사라지는 대규의 뒷모습을 보며 울먹였다.
“제발 가지 마세요! 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구해 주세요!”
‘됐다.’
대규는 다시 뒤를 돌아 이데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좋아. 그런데 이 감옥은 어떻게 여는 거지?”
그녀가 갇힌 감옥엔 사람의 몸통만 한 거대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러자 이데가 재빨리 말했다.
“열쇠가 있는 곳은 제가 알아요! 100미터 정도 가시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꺾은 뒤 제일 처음 나오는 개미굴에 가시면 돼요. 거기엔 여기의 모든 감옥들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가 있어요.”
모든 감옥들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 그렇다면 실레노스와 판이 있는 감옥도 열 수 있다.
‘녀석들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잘됐다!’
공략집의 지도에 새로운 개미굴이 표시됐다.
갈림길에 좌측에 위치한 개미굴. 분명 그녀가 말한 위치였다.
개미굴 안에 노란 열쇠 모양 아이콘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붉은 점도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그곳은 간수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에요.”
* * *
지도를 따라 동굴의 통로를 걷다 보니 곧 갈림길이 나왔다.
거기서 좌회전하자마자 보이는 첫 번째 개미굴.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흑린갑의 투명화 옵션을 발휘해 개미굴 안을 살펴보니 거인 간수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조용히 저들을 단번에 처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여태까진 각 감옥 앞에 있는 간수를 기습해서 쓰러뜨렸는데 여기는 간수들이 너무 많았다. 한 번에 이 많은 녀석을 상대하면 아무리 급소를 신속하게 푹푹 찔러도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럼 나머지 간수들도 이쪽으로 달려올 거고.
‘어떡한다?’
그때 보관함의 라의 목걸이가 떠올랐다.
하토르의 복종안 스킬을 빌려 오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저 간주 녀석들에게 복종안을 써 버리면 꼼짝 못 하고 내 말에 복종할 테니까.
그럼 소란 없이 마스터키를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대규는 라의 목걸이를 꺼냈다.
[능력을 빌려 올 마신과 그의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눈앞에 좌르륵 뜬 스킬 중 하토르의 복종안을 선택했다.
그러자 눈앞에 메시지창이 떴다.
[하토르 여신이 흔쾌히 복종안 스킬을 빌려줍니다. 상태창의 보유 스킬란에 가 보면 복종안 스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마신의 능력을 빌려 올 기회가 소진됐습니다.]
하루에 한 번 능력을 빌릴 수 있다고 했으니.
대규는 메시지창이 사라지자마자 상태창의 보유 스킬란을 확인했다.
스킬들 맨 하단에 복종안이 생겨 있었다.
복종안(횟수 제한 0/1)-눈빛으로 상대방에게 두려움이나 공포를 불러일으켜 굴복시킨 뒤 자신의 말에 철썩같이 복종하게 한다. 마나 소모 20.
횟수 제한이 걸려 있었다. 0/1인 걸로 보아 1회 사용할 수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습득한 스킬이 아니라 빌려온 스킬이니 어쩔 수 없다.
휴게실로 들어가자 대규의 모습을 본 간수들이 움찔거렸다.
그들이 달려들 틈도 없이 재빨리 복종안을 시전했다.
눈가가 불타는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대규는 두 눈으로 간수들을 똑바로 바라봤다.
“으으으…….”
거인 간수들이 갑자기 두려움에 질린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몇몇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이내 그들은 모두 천천히 대규 앞에서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엄청나군.’
하긴, 이 스킬의 효과는 대규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제2 타르타로스 두 번째 피라미드에서 공략집의 영상으로 본 적이 있으니까.
물론 복종안을 물리치기 위해 눈을 감고 공략집의 도움을 받아 전투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서늘한 기분과 공포는 물밀 듯이 밀려들었던 게 생생히 기억났다.
거인 간수들은 이제 완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규는 그중 가장 덩치가 큰 간수에게 다가가 명령했다.
“마스터키를 내놓아라.”
간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휴게실 한쪽에 비치된 나무상자를 가져왔다. 나무 상자를 열자 하얀색의 열쇠가 들어 있었다.
간수는 털이 북실북실한 손으로 마스터키를 집어 들어 대규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넸다.
열쇠를 받아 들자 아이템 설명창이 떴다.
[지하 감옥의 마스터키]
[아르고스 주둔지 지하 감옥의 모든 감옥 문들을 열 수 있는 만능 열쇠.]
거인 간수는 다시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 충성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이제 마스터키는 얻었으니까 이 녀석들을 처리해야지.’
나중에 자신이 이곳에 침입한 걸 주둔지에 알리기라도 하면 일이 귀찮아 질 테니 다 없애 버려야 한다.
대규는 무릎을 꿇고 있는 녀석들 등 뒤로 다가갔다.
경동맥을 단번에 끊어 버리면 찍 소리도 못 내고 죽는다. 하지만 혹시 고통에 비명을 지를 수도 있으니 이렇게 명령했다.
“절대 어떤 소리도 내지 말아라.”
거인 간수들은 충직하게 그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주먹이나 나무 막대기 같은 것을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로 녀석들의 경동맥을 조용히 그었다.
서걱-서걱-
“끄으…….”
녀석들은 미세한 신음만 내며 조용히 쓰러졌다.
간수들을 처리한 뒤 체인 블레이드를 검집에 넣었다. 이제 마스터키를 얻었으니 우선 이데를 구출해 아말테이아의 젖을 받고 실레노스와 판이 갇힌 깊숙한 감옥으로 가야 한다.
지도를 띄운 뒤 이데의 감옥을 향해 달려갔다.
감옥에 도착해 마스터키로 이데를 풀어 주자 이데는 몇 번이고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 아말테이아의 젖이에요.”
그녀는 작은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건넸다.
[아말테이아의 젖]
[제우스가 어린 시절 마셨던 신의 음료. 신들에겐 영양제 수준의 음료지만 인간에겐 뛰어난 효과를 가져다 준다. 레벨이 5 추가 상승하고 권위 스탯이 5 오른다.]
공략집에서 본 설명과 동일했다.
일단 지금은 실레노스와 판을 구해야 하니까 보관함에 두고 나중에 마시자.
대규는 보관함에 아말테이아의 젖을 넣은 뒤 이데에게 말했다.
“그럼 수고. 조심히 가라구.”
그러자 이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죄송한데… 인간 영웅님, 저도 헤르메스의 주둔지까지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저 혼자선 이 감옥을 빠져나갈 수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
그녀는 대규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을 이었지만 대규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공짜로 데려가 달라곤 안 할게요. 주둔지까지 데려다주시면 젖을 한 병 더 드릴게요.”
이 기막힌 음료를 한 병 더?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좋아. 그럼 이 가방에 들어가.”
대규는 인피니투스를 꺼내 열었다. 작은 손가방의 벌어진 틈에 이데가 발을 넣자 휘리릭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고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어디로 갔지?’
그때 가방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 영웅님, 여기예요.”
벌어진 틈으로 작아진 이데가 대규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말 들어갔다.
“그럼 거기 안전히 있어.”
대규는 인피니투스를 닫은 뒤 실레노스와 판이 갇혀 있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통로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지하 감옥.
두 개의 개미굴 감옥이 나란히 있었으며 앞에는 무시무시한 거인 간수들 수십 명이 지키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중 한 감옥에 앉아 있는 헤르메스의 아들인 염소 인간 판이 욕을 씨부렁거렸다.
수염이 북슬북슬하게 난 그의 얼굴은 추악하면서도 교활한 빛이 엿보였으며 머리엔 뾰족한 뿔 두 개가 돋아나 있었다.
판은 동굴의 벽 쪽으로 다가가 벽에 대고 말했다.
“형! 내 목소리 들려?”
옆 감옥에 있던 실레노스 역시 판의 목소리를 듣고 대답했다. 그 역시 판처럼 염소 인간이었다.
“들린다.”
“형, 우리 언제까지 여기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거야? 아 진짜 짜증 나네.”
“그니까 말이다. 아버지는 왜 이렇게 우릴 구하러 안 오는 거야! 배고파 죽겠는데. 나가면 아버지한테 최상급 연회를 차려 달라고 해서 배 터지게 음식들을 먹을 거다.”
“흐흐흐…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들도…….”
형제들은 음흉한 목소리로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실 헤르메스와 아름다운 숲의 정령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였다. 하지만 이들의 엄마인 숲의 정령은 털이 북슬북슬하고 추악한 이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자기의 아들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헤르메스는 이 형제들을 불쌍히 여겨 자신이 손수 거둬, 신들의 세계인 판테온에 데려가 키웠다. 하지만 불쌍하다고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지 형제들은 점점 버릇이 없어졌다.
형제는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겐 오만방자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특히 숲에 가서는 신인 아버지 헤르메스의 권위를 내세우며 여자 정령들을 추행하고 괴롭히고 다녔다. 정령들을 괴롭히면서 그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고. 크헤헤!’
이들은 숲의 정령들에게나 헤르메스의 권위를 내세워 재수 없게 굴지만 사실 판테온의 신들에겐 항상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이에 형제들은 신들에게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거인 아르고스는 그들을 꼬드겼다.
“위대한 형제들이여! 너희들이 신보다 훨씬 훌륭하고 유능하다. 너희를 항상 무시하는 신들을 혼내 주고 싶지 않은가? 기간토마키아에서 우리 편에 서서 싸운다면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포로로 잡아 너희들에게 주겠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아르고스는 이들이 헤르메스의 아들들이며 헤르메스가 이들을 끔찍하게 여긴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인질로 잡으려 유혹한 것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이 멍청한 형제는 그의 제안에 혹해 아르고스의 주둔지로 발굽을 힘차게 굴리며 달려갔다. 전쟁 후 여신들과 즐길 생각에 침까지 질질 흘렸다.
물론 오자마자 이곳 지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이 사고뭉치 형제들은 감옥에서도 소란을 피웠다.
“씨발,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음식 진짜 맛없네! 더 맛있는 거 가져와!”
“내 발굽을 닦을 하인을 빨리 데려오라고!”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의 멍청한 행동을 뉘우치긴커녕 아버지인 헤르메스가 빨리 안 구하러 온다고 원망만 해대거나 나가서 연회를 벌일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들이 한참 주색잡기 연회를 벌이는 상상에 빠져들고 있을 때, 감옥 밖에서 웬 소란이 들렸다.
타타탓.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