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화. 신이 찾아오다 (2)
다음 날, 대규는 장사를 마치고 오피스텔로 돌아와 그리스 로마 신화 책을 읽었다.
헤르메스와 다른 신들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헤르메스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바로 헤르메스의 자식 중 두 아들인 실레노스(Silenus)와 판(Pan)에 관련된 사실이었다.
그들은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숲의 정령이었다. 그런데 두 녀석 모두 장난이 심하고 주색을 밝히는 음탕한 난봉꾼들이라 숲의 여자 정령들을 괴롭히며 추행하길 즐긴다고 적혀 있었다.
정령이라고 해서 신령스러운 존재인 줄 알았는데 하는 짓만 보면 양아치에 가까웠다.
그런데 공략집이 떠올랐다.
<실레노스와 판에 관련된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현재 헤르메스의 아들인 실레노스와 판은 아르고스의 주둔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음탕한 난봉꾼 정령 실레노스와 판은 아르고스의 꼬임에 빠져 거인들의 편에 제 발로 찾아갔다가 오히려 인질로 잡혔습니다. 아르고스는 전투를 치를 때마다 그의 두 아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해 헤르메스는 아주 골치가 아픈 상태입니다.>
그랬군.
아무래도 주둔지에 갇혀 있다는 두 명은 부하들이 아니라 아들들인 것 같았다.
그런데 거인들 편에 제 발로 찾아가 오히려 인질로 잡혔다니. 골치깨나 썩이는 사고뭉치 자식들이군.
헤르메스가 왜 자신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까지 임무를 맡기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부하가 아니라 자기 아들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다.
게다가 저 사고뭉치 아들들의 멍청하게 인질로 잡혔기 때문에 전투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다시 찾아올지도……?’
자존심이 상해 다른 영웅들에게 찾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대규는 고개를 저었다.
헤르메스는 공략집의 존재를 완전히 알진 못하지만 자신이 특별한 뭔가를 지니고 있다는 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영웅들이 이 임무를 순조롭게 해내지 못할 걸로 생각할 확률이 높다.
지도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약점 등 모든 정보를 지닌 채 적의 주둔지로 가는 것과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가는 건 천지 차이다. 아무리 능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헤르메스는 분명 다시 찾아올 거다. 더군다나 자기 아들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어쨌든 그가 다시 오면 자신의 몸값을 더 올려 볼 예정이었다. 신발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대규의 예상대로 헤르메스는 그날 밤에도 찾아왔다.
“이봐, 이런 식으로 신을 무시한다면 나중에 큰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약간 절박해졌다.
저런 식으로 협박성 멘트를 날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쫄리고 있단 증거다.
그에 비해 대규의 어제보다 훨씬 여유롭다. 이쪽은 헤르메스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그럼 이제 슬슬 몸값을 올려 볼 때다.
* * *
“대체 원하는 게 뭐냐?”
“레드 젬스톤 10개와 당신의 신발입니다.”
“이 신발은 안 된다고 했잖아.”
헤르메스가 회유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좋다. 레드 젬스톤 10개에 추가로 10개, 총 20개를 줄게.”
대규는 젬스톤보다 저 신발이 훨씬 탐났다.
“됐습니다. 저는 당신의 신발을 원합니다.”
참다못한 헤르메스가 분노를 터뜨렸다.
“이 건방진 자식! 신발에 흥분하는 신발 성애자라도 되냐?”
“싫으면 그냥 돌아가십시오. 저도 목숨 걸고 하는 일입니다. 부하 구출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세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결국 헤르메스는 대규에게 굴복하고 말했다.
“대신 임무를 똑바로 수행하지 못하면 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위엄에 찬 목소리가 헤르메스의 입에서 나왔다. 어린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목소리에서 신의 위엄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보상은 네가 임무를 완수하고 오면 주겠다. 어차피 신의 약속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당사자인 신조차도 그것을 어길 수 없다. 정 의심되면 약속의 징표를 네 녀석의 손등에 새겨 주마.”
그 순간, 공략집이 보였다.
<약속의 징표가 새겨지면, 신이라 해도 고의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로 고통의 늪으로 빠집니다.>
“좋습니다.”
헤르메스가 대규의 손등을 만지자 황금빛 문양이 손등으로 스며들었다.
“그래도 신발은 먼저 주십시오.”
“약속의 징표를 새겨 줬잖아!”
대규는 헤르메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신발을 신으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어 더욱 빠르고 안전하게 부하들을 구출할 수 있을 텐데요. 빨리 구출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대신 제가 임무에 실패하면 이 신발은 도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알았다. 대신 레드 젬스톤은 구출해 오면 주겠다.”
“좋습니다.”
대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젬스톤보다도 신발이 훨씬 갖고 싶었다.
헤르메스는 약속의 증표를 하나 더 남기곤, 손을 내밀자 황금빛이 번쩍이며 날개 달린 신발이 허공에 떠올랐다. 대규가 신발을 받아 들고 신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저절로 신겨졌다.
‘오!’
신발을 신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헤르메스의 신발은 도약의 장화보다 훨씬 가벼웠다. 착용한 것만으로도 벌써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참, 이걸 들고 가야 할 거다.”
헤르메스는 대규에게 작은 손가방을 건넸다.
“이게 뭡니까?”
“내 부하 녀석들을 감옥에서 구출한 뒤 여기에 넣어서 안전하게 들고 와.”
이 작은 손가방에? 그리스 로마 신화 책에서 본 실레노스와 판은 덩치가 대규보다 훨씬 컸다. 이 손가방으론 그들의 머리에 난 뿔도 담지 못할 것 같았다.
“작아 보여도 그 가방은 뭐든지 넣을 수 있는 가방이다. 네가 서 있는 이 건물도 넣는 게 가능하지.”
곧 아이템을 설명하는 메시지창이 떴다.
[인피니투스]
[작아 보이지만 안에는 무한한 공간이 펼쳐져 있는 헤르메스의 마법 손가방.]
이런 물건도 있구나.
대규는 인피니투스를 받아 들고 보관함에서 안내인 여자가 준 차원의 열쇠를 꺼낸 뒤 헤르메스에게 물었다.
“이 열쇠를 사용하면 바로 아르고스의 주둔지에 있는 지하 감옥으로 갈 수 있습니까?”
“아니. 우선 나의 주둔지로 간다. 거기서 지하 감옥으로 바로 갈 수 있는 포탈을 열어 주마. 일단 열쇠를 내 손 위에 올려놓아라.”
“알겠습니다.”
대규는 차원의 열쇠를 헤르메스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의 손에 올라간 열쇠에서 영롱한 무지갯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스슥-
그러자 그들이 서 있는 건물 옥상 바닥에 마법진이 생겨났다. 안내인 여자가 등장할 때 생기는 푸른 마법진과 달리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대규와 헤르메스는 황금색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촤악.
뿜어져 나온 황금빛이 물결치듯 솟아올랐고 주변 풍경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 * *
정신을 차리자 헤르메스의 주둔지에 도착해 있었다.
주둔지 가장자리엔 나무로 만든 벽이 거대한 전체를 빙 둘러싸고 있었고 동서남북엔 망루가 높게 솟아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지휘 사령부 막사가 있었고 지휘 사령부 오른쪽으론 대장간과 병원 막사가 있었다.
또한 주둔지의 입구 좌우로는 마구간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병사들의 막사들은 질서정연하게 가득 들어서 있었다.
꼭 로마 시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뭘 그리 둘러봐. 어서 오지 않고!”
헤르메스는 대규에게 이렇게 말한 뒤 중앙에 있는 지휘 사령부의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간 대규는 깜짝 놀랐다.
지휘 사령부의 막사는 밖에서 봤을 때도 일반 병사들의 막사보다 5배는 컸다. 하지만 막상 들어오니 그 내부는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천막의 내부 공간이라기보다는 꼭 신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높다랗게 세워져 있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바닥엔 부드러운 카펫이 쭉 깔려 있었다.
심지어 카펫이 끝나는 부분엔 화려하게 생긴 제단과 왕좌가 놓여 있었다.
헤르메스는 카펫을 걸어 왕좌에 올라가 가슴을 쭉 펴고 앉았다. 앉아 있는 모습에서 신의 위엄이 느껴졌다. 주위로 장군처럼 보이는 자들이 고개를 숙이며 양쪽으로 도열해 있었다.
자신에게 매달리며 두 아들의 목숨을 구걸하던 자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가 손가락을 한 번 가볍게 튕기자 커다란 동굴의 모형도가 그들의 눈앞에 떠올랐다.
“이게 뭡니까?”
“아르고스 주둔지의 지하 감옥 모형도다. 내 부하들은 이 감옥의 깊숙한 곳에 갇혀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
동굴 형태의 지하 감옥은 상당히 특이하게 생겼다.
가운데 기다란 메인 통로를 기준으로 그 옆엔 곁가지처럼 생긴 개미굴들이 잔뜩 나 있었다.
“이 개미굴들이 다 감옥이다. 내 부하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네가 알아내야 한다.”
“가서 다 일일이 뒤지란 말입니까?”
물론 공략집의 지도가 실레노스와 판이 있는 위치를 표시해 줄 것이란 걸 알고 있지만 대규는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헤르메스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너는 여태까지 그런 어려운 미션들도 신속하게 잘해 왔던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너를 고른 거다.”
“그런데 저 감옥엔 주로 누가 갇혀 있습니까?”
“그건 왜 묻지?”
“거인 아르고스는 우리의 적군이잖아요. 적의 감옥에 갇혀 있는 존재라면 우리 편일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까?”
그러자 헤르메스는 관심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알 수 없지. 거인 녀석들은 워낙 이상한 놈들이라 이것저것 다 잡아들이거든.”
그러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내 부하 두 녀석만 구해 주면 된다. 무조건 안전하게 구출해라. 명심해. 안전하게 구출!”
말을 마친 헤르메스는 왕좌에서 일어나 모형도에 표시된 지하 감옥 입구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우우웅.
묘한 진동 소리와 함께 모형도 옆에 포탈이 크게 열렸다.
“지하 감옥 입구 앞으로 바로 가는 포탈이다. 포탈로는 입구까지밖에 못 가지. 그럼 출발해.”
대규는 포탈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지하 감옥 동굴 앞.
대규는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공략집의 지도를 띄웠다.
모형도에서 본 것처럼 공략집의 지도 역시 개미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실레노스와 판의 위치도 표시됐다.
헤르메스의 추측대로 가장 깊숙한 곳에 나란히 위치한 개미굴에 각각 하얀 점으로 표시됐다.
문제는 각 개미굴 감옥마다 붉은 점들이 있다는 것.
아마도 감옥을 지키는 간수들일 것이다.
심지어 실레노스와 판이 갇혀 있는 감옥 앞에는 간수들이 각각 열 명씩이나 있다.
‘하긴, 헤르메스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인질인데 감시가 삼엄하겠지.’
대규는 흑린갑과 체인 블레이드를 장착했다.
그리고 일부러 헤르메스의 신발을 이용해 두 발을 바닥에서 살짝 띄웠다. 이렇게 하면 발소리를 죽일 수 있다.
이곳은 적의 주둔지.
지하 감옥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주둔지의 나머지 병사들이 몰려올 수 있다.
그렇기에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신속하고 조용하게 간수들을 처리해야 한다.
대규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지하 감옥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 감옥의 통로 중 통로가 갈라지는 곳마다 거인 간수들이 서 있었다.
대규는 저 멀리 보이는 두 마리의 간수를 보곤 흑린갑의 투명화를 발동시켰다.
곧 공략집이 떴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지하 감옥의 거인 간수
보상: 낮은 경험치와 마나, 아주 낮은 확률로 그레이 등급 젬스톤 드롭
특징: 힘이 세고 도끼나 철퇴 같은 둔기를 잘 다룬다. 항상 두 마리씩 짝지어 다닌다.
<지하 감옥의 거인 간수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지하 감옥의 거인 간수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지하 감옥의 거인 간수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지하 감옥의 거인 간수의 약점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떨어지는 보상을 보니 거의 잡몹 수준이다.
약점 영상을 보니 인간형이라 그런지 급소는 인간과 같았다.
그동안 검술 실력이 얼마나 상승했는지 직접 시험해 보기로 했다.
대규는 거인 간수들을 향해 체인 블레이드를 꺼냈다.
칼날을 체인화하며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살짝 휘둘렀다.
휘리릭-
체인화된 칼날이 늘어나 두 녀석의 목을 순식간에 휘감아 옥좼다.
서걱-
아주 약간의 힘만 줬을 뿐인데 녀석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체력 단련과 검술을 익힌 결과로구나.’
지도를 보니 아직 초입이었다. 감옥 깊숙한 곳까진 한참 남았다.
‘휴, 갈 길이 멀다.’
적어도 개미굴 감옥 수십 개는 더 지나야 했다.
대체 이 거인 녀석들은 어떤 존재들을 이 수많은 감옥 안에 가둬 둔 걸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이내 생각을 지웠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빨리 실레노스와 판을 구해 헤르메스의 주둔지로 돌아가야 한다.
대규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살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