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57화. 신이 찾아오다 (1)
자체 시식회를 마친 그날 밤도 대규는 신촌의 탕꼬 건물 옥상에서 신체 단련을 하고 있었다.
요즘 시식회 준비에 메뉴 개발, 영등포 매장 오픈 등으로 바빠서 신체 단련을 소홀히 했다.
불현듯 언젠가 공략집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보다도 공략집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더 실감나게 두렵고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노력을 꾸준히 했을 때 사람은 두려움보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법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매우 게을러졌다는 증거였다. 대규는 게을러지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나의 노력으로 몸에 익힌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안일함에 젖은 자신을 다잡으며 그는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피칭 머신 네 대를 동시에 가동하고 체인 블레이드를 꺼내 휘둘렀다.
팡팡팡!
휙휙휙-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들을 피해 검을 열심히 휘둘렀다.
[검술 +14]
좋아, 또 올랐다.
다음 소환 때까지 남은 기간은 이제 두 달. 그때까지 검술 실력이 20 정도 됐으면 좋겠다.
열심히 날아오는 공들을 체인 블레이드로 쳐내고 있었다.
“으악!”
젊은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대규는 피칭 머신을 끄고 뒤로 물러나 발소리를 죽인 채 옥상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옥상엔 자신 말고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목소리를 들었는데…….’
황급히 보관함에서 흑린갑을 꺼내 입고 가만히 서 있었다.
스스슥-
갑옷의 투명화가 발동됐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투명화를 발동시켜도 나에겐 다 보여.”
‘뭐라고?’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쥔 채 전투태세를 갖춘 뒤 소리쳤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스르륵-
옥상 한가운데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곱슬곱슬한 짧은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젊은 미청년이었다. 얼굴은 이제 갓 스무 살 정도로 몹시 어려 보였다.
청년의 눈빛과 표정은 상당히 장난스러워 보였다. 심지어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짓궂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신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청년의 몸에선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 빛은 감각을 흐리게 하고 엄숙하고 장중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청년은 머리에 날개가 달린 투구를 쓰고 있었다. 손엔 역시 날개가 달린 지팡이를 쥐고 있었고 발엔 날개 달린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쥐고 있는 대규에게 다가와 말했다.
“네가 그 유명한 인간 영웅 김대규로구나. 생각보다 나이가 어린걸.”
그때 차원의 공략집이 떠올랐다.
공략집을 본 대규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 말도 안 돼…….’
-차원의 틈 공략집-
신 이름: 헤르메스(Hermes).
특징: 제우스와 아틀라스의 딸 마미아 사이에서 태어난 신. 전령, 상업, 거짓말의 신으로 잔꾀를 잘 부리고 머리가 잘 굴러간다. 거짓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고, 남을 잘 속여 이득을 취하기도 한다. 날개 달린 신발을 사용해 어디든 오가며 신들의 왕 제우스의 심부름을 한다.
그리고 연달아 떠오른 공략집의 메시지.
<신에 대한 추가 정보를 알고 싶으면 공략집을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레드 등급 젬스톤 5개를 사용해 공략집을 업데이트 하시겠습니까? Yes/No>
지금은 업데이트하지 않는 게 낫겠다.
안내인 여자 말로는 다음 소환에서 신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다고 했다. 굳이 신들에 대한 약점이나 공략 영상 등 추가 정보를 지금 당장은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신이 나타나다니!
안내인 여자가 말했던,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하는 신 중 한 명인 것 같다.
어쨌든 기간토마키아나 타르타로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개념들이다. 헤르메스 역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이고.
그런데 신이 나를 찾아오다니,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게다가 거짓말의 신이라니…….’
대규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헤르메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규에게 말했다.
“인상 좀 풀지 그래? 너의 얘기는 많이 들었다. 너 요즘 신들 사이에서 엄청 핫한 존재거든. 나도 니가 엄청 보고 싶었다구.”
그는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게다가 조사해 보니까, 너 현실에선 장사하고 있더라? 탕꼬… 였나? 엄청나게 잘나가는 것 같던데. 소유 건물 두 채에 매장 세 곳. 심지어 앞으론 도시락 사업까지 벌일 예정이라지?”
“그걸 어떻게…….”
하지만 헤르메스는 대답 대신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대규를 쳐다보기만 했다.
대규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빙 돌려서 말하지 않을게. 너도 두 달 뒤에 전쟁터로 소환되는 건 알고 있지?”
대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을 이었다.
“전쟁터에 소환되면 다른 신들 말고 나랑 같이 싸우자. 난 다른 멍청하고 무식한 젊은 신들과 달리 널 잘 도와줄 수 있거든. 그래, 이거 스카우트 제의 맞아.”
안내인 여자가 현실로 돌아오기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당신의 경우엔 어떤 전쟁터로 소환될지 궁금하군요. 당신을 눈독 들이는 신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직접 찾아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할래? 빨리 결정하라고.”
헤르메스가 재촉했지만 대규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우선 공략집에 떠오른 내용이 걸렸다. 공략집엔 헤르메스가 거짓말의 귀재에 남을 속여 이득을 잘 취한다고 적혀 있었다. 섣불리 오케이를 하기엔 불안하다.
그리고 헤르메스 말고 다른 신들도 분명 존재한다. 아직 그들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들 중에 더욱 자신과 잘 맞는 신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안내인 여자는 여러 전쟁터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대규는 핵심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헤르메스의 전쟁터가 그곳일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대규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헤르메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민하고 있구나. 좋아, 그럼 네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나와 전쟁터에서 같이 싸우면 내가 현실 세계에서 너의 사업을 도와줄게. 내 능력을 나눠 줄 수도 있어. 난 상업의 신이기도 하거든. 게다가 인간 세계의 장사라… 나에게는 껌이지. 그리고 전투에서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아이템이나 장비도 지원해 줄 수 있다구. 어때?”
현실의 사업을 도와주고 아이템에 장비 지원이라니. 실로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의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대규는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당신이 원하시는 건… 오직 제가 당신과 같이 싸우는 것뿐입니까?”
헤르메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거든. 저승 세계부터 인간 세계, 그리고 신들이 있는 판테온의 세계 어디든! 다른 얼빵한 신들은 무식하고 싸움만 할 줄 알지, 이런 건 못 한다.”
“판테온의 세계요?”
“그래. 참, 너 차원의 틈과 타르타로스에서 온갖 보상을 노렸다지? 판테온의 세계는 냄새나는 몬스터들이 있는 타르타로스랑 차원이 다르다. 훨씬 좋은 아이템이나 보상들이 많다구.”
이곳보다 훨씬 좋은 아이템이나 보상들이라니.
듣기만 해도 설렜다. 하지만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너무 좋아 보이는 말들이 가득해서 수상했다. 게다가 대규의 질문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략집으로 헤르메스의 속마음을 들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무래도 신의 속마음까지 듣는 건 공략집의 능력 밖인 것 같았다.
대규는 큰맘을 먹고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정말 당신이 원하시는 건 제가 같이 싸우기만 하는 겁니까? 이에 대답하지 않으시면 저는 제안을 거절하겠습니다.”
“넌 참으로 신중한 인간이로구나.”
그러자 헤르메스는 묘한 눈빛을 하며 말했다.
“…정확히는 나를 도와서 한 임무도 해 줬으면 해. 다음 소환이 되기 전에 말이야. 가능하면 지금 당장. 자유롭게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차원의 열쇠는 받았겠지?”
“무슨 임무입니까?”
“거인들의 장수인 아르고스의 주둔지에 몰래 들어가서 거기 잡혀 있는 내 부하 녀석들 두 명을 구해 줘.”
“부하들을 구출해 달라구요?”
대규의 마음속에 의구심이 들었다.
왜 자신에게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하는 걸까. 신이라면 고작 인간 영웅인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일 것이다. 당장 저 얼굴을 보기만 해도 저절로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인데.
게다가 헤르메스와 이미 전투를 같이 하는 인간 영웅 중엔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자들이 많은 것이다.
“왜 하필 저입니까? 뛰어난 영웅들도 많고… 아님 당신이 직접 가서 구출하는 게 훨씬 편할 텐데요.”
그러자 헤르메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직접 들어갈 수 있으면 너에게 부탁을 하겠냐? 네 말대로 너보다 강력한 영웅은 전쟁터에 많다. 하지만 이 임무엔 네가 제일 적합할 것 같아서 찾아왔지.”
“저보다 강력한 영웅도 있는데 왜 제가 제일 적합합니까?”
그 말에 헤르메스는 대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뭔가 다르다. 우리 신들이 지켜본 바에 의하면.”
“뭐가 다르단 말이죠?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우리 신들도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넌 다른 녀석들과 달라. 뭔가 특별한 게 있단 말이지.”
대규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특별한 거라면 혹시 공략집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헤르메스가 공략집이라고 콕 짚어 말하지 않은 거로 보아 신들 역시 정확한 건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이걸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지.
“어쨌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보상은 섭섭하지 않게 주지. 명당 레드 등급 젬스톤 5개씩 총 10개. 어때?”
레드 등급 젬스톤 10개면 50억 원의 가치!
그때 대규의 눈에 헤르메스가 신고 있는 날개 달린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 공략집의 아이템 설명창이 떴다.
[헤르메스의 신발(신화 등급)]
[공중을 걸어 다니거나 날 수 있으며 한번 가 본 곳은 신발이 좌표를 기억해 다음번엔 그 장소로 순간 이동할 수 있다. 모든 스탯 +10 추가 상승. 회피율 30%.]
그러고 보니 헤르메스의 발이 미세하게 바닥에서 떨어져 있었다. 정말 공중을 둥둥 날아다니는 신발이 맞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한번 가 본 곳은 신발이 기억해서 다음번 그곳으로 갈 때,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니.
확실히 신이 지닌 아이템이라 그런지 그 능력도 상상 이상이었다.
‘저 신발도 달라고 해 볼까.’
대규는 가만히 그의 신발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헤르메스는 자신을 스카우트하고 임무를 맡기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 그는 신이고 자신은 인간이지만 부탁하는 쪽은 분명 그였다.
거절하면 아쉬운 쪽은 오히려 자신이 아니라 헤르메스였다. 게다가 안내인 여자의 말대로 다른 신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면 헤르메스 말고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신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레드 젬스톤 10개에 추가로 당신이 신고 있는 신발을 주십시오.”
헤르메스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감추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 상당히 배짱이 있구나. 난 너 같은 인간을 좋아하지. 하지만 이 신발은 신의 아이템이라 너에게 줄 수 없다. 대신 원래 주기로 한 레드 젬스톤 10개에 추가로 10개 더 주도록 하지.”
“그럼 거절합니다.”
대규는 딱 잘라 단호하게 말했다.
헤르메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감히 인간 주제에 날 거절해?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다.
‘쫄지 말자. 이쪽이 우위에 있다.’
“건방진 인간 녀석. 후회하게 될 거다.”
“그래도 거절합니다.”
“고통에 찬 눈물이 강이 되어도 마르지 않을 것이며, 몸이 썩고 뼈가 삭을 때까지도 고통에 울부짖게 될 것이다.”
헤르메스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인 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