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47화. 하토르(Hathor)
그는 검을 뽑아 들고 자신의 스킬 ‘회심의 일격’을 발동시켰다.
회심의 일격은 크리티컬 공격이 들어갈 확률을 높여 주는 스킬이었다. 대신 마나 소모가 엄청나서 중요한 순간에만 써야 했다.
‘바로 이 일격으로 쓰러뜨리고 젬스톤과 선물 상자를 받는다!’
검신에 시퍼런 빛이 돌기 시작했고 그는 장작을 패듯 칼을 괴물 머리 쪽으로 내리쳤다.
“키에엑!”
일격을 맞은 몬스터는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됐다! 어서 빨리 보상을 받으러 가자구.”
스즈키가 나머지 네 명에게 이렇게 외치는데 죽은 줄 알았던 몬스터가 다시 일어났다.
‘회심의 일격 스킬을 제대로 맞고 되살아난 몬스터는 없는데…….’
아무래도 스킬이 빗맞은 것 같았다. 제대로 다시 죽여 주마.
스즈키는 다시 달려들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이번엔 적중했다.
하지만 몬스터는 다시 일어났다.
“빌어먹을… 이게 대체 뭐야…….”
분명 공격력이나 전투 실력은 기존의 몬스터들과 같았다.
단 한 가지를 빼고는.
이 몬스터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다섯 명이 동시에 스킬을 사용해 한 번에 공격해도 다시 일어났다.
“젠장, 이건 함정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우우웅-!
피라미드 바깥에서 들려오는 굉음.
마신의 눈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황금빛의 광선이 피라미드를 파괴하며 지나고, 괴물과 다섯 남자를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스스슥-
한가운데 포탈이 생겨났고, 대규가 그곳에서 나왔다. 두 번째 피라미드에 도착했다.
직전의 어두컴컴했던 아누비스의 피라미드와는 달랐다. 아누비스의 피라미드는 컴컴하면서도 음습한 느낌이 더 컸다. 일렬로 줄지어 서 있던 관도 그렇고 말 그대로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 피라미드는 붉은 내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녀가 어우러져 있는 원색적인 벽화들이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선홍빛 조명이 은은하게 전체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피라미드의 끝에는 계단이 있었고, 그 위에는 화려한 왕좌가 하나 있었다.
왕좌 주변엔 분홍빛 비단 커튼이 장막처럼 드리워졌고, 그 너머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그림자로 보아 여자인 것 같았다.
[제2 피라미드의 시련이 시작됐습니다.]
[하토르 여신의 유혹을 버텨 내십시오.]
[시련의 보상: 낮은 확률로 아이템이나 스킬이 드롭. 다음 피라미드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보상이 하나 늘었다. 낮은 확률이지만 아이템이나 스킬이 드롭된다고 한다.
명당의 눈처럼 현실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스킬이었음 좋겠는데.
스륵-
그때 하얀 손이 분홍빛 커튼을 가르며 나왔다.
길쭉하고 늘씬한 손가락 끝에는 붉은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커튼이 완전히 걷히자 그곳엔 매우 아름다운 미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민소매의 황금빛 드레스에 칠흑 같은 까만 생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고 있었다.
코는 오뚝했고,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진 초록빛 눈동자는 아이처럼 맑고 순수했다. 하지만 앳돼 보이는 얼굴과 달리 몸매는 늘씬하면서도 볼륨감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엔 가느다란 뿔 두 개가 왕관처럼 솟아나 있었다. 두 개의 뿔 사이엔 커다란 황금빛 구체인 태양 원반(太陽圓盤)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공략집이 떴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하토르(Hathor)
보상: 높은 경험치와 마나, 낮은 확률로 희귀 아이템이나 스킬, 그레이 등급 젬스톤 드롭
특징: 이집트의 사랑과 미의 여신. 제2 타르타로스 마신의 피라미드 중 하나를 소유하고 있으며 상대방을 유혹해 혼을 빼놓은 뒤 공격한다. 머리 위의 태양 원반을 뺏기면 황금빛의 거대한 암소로 변해 공격한다.
스킬: 색안-색기 가득한 눈빛을 이용해 상대방을 유혹한다. 남자에게 효과적이다.
복종안-눈빛으로 상대방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켜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도록 만든다. 남자에게 효과적이다.
<하토르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하토르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하토르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하토르의 약점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Yes!’
대규는 흑린갑의 투명화를 발동시켜 공략집을 습득했다.
하토르의 공격 영상을 보니 그녀의 스킬들은 거의 눈빛을 이용하는 것들이었다.
색안의 경우 눈을 마주치면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고 발그레하게 물든다. 초록 눈동자에 서려 있는 색기가 블랙홀처럼 눈앞의 존재를 빨아들인다.
영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남자에게 효과적인 스킬인지 알겠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건 복종안 스킬이다.
영상 속 그녀의 초록 눈동자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쩍.
색기 어렸던 아름다운 눈동자와 달리 까만 동공이 뱀눈처럼 세로로 벌어져 수축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초록빛 홍채 안엔 까만색의 실핏줄 같은 게 수없이 돋아나 상대방을 주시하고 있다.
그 끔찍한 눈동자를 보자니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몸이 떨려 왔다.
유혹적인 기분이 들었던 색안과 달리 복종안은 두려움과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공포심으로 상대의 정신을 굴복시켜 복종하게 하는 기술!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대규에게 영상만으로도 영향을 미치는 걸로 보아 그녀의 스킬들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닥튈로이 반지의 저주 해제 효과나 마법 저항 효과로도 완전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뜨는 공략집의 메시지.
<스킬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눈을 감으십시오.>
캄캄한 장님이 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란 건가.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공략집도 무슨 수가 있으니까 저렇게 나오는 거겠지. 괜히 그레이 젬스톤 30개를 써서 업데이트를 한 건 아닐 테니까 말이다.
눈을 감았다.
그러자 지도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지도창이란 본래 자신의 의지로 불러내는 거라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 볼 수도 있는 거였다.
그걸 지금 알긴 했지만.
노란색으로 그녀의 위치가 표시됐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눈을 감고 있는데 피라미드 내부의 광경이 흐릿하게나마 보인다는 사실!
마치 이마에 CCTV를 달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흐릿하고 흑백이라 해상도는 상당히 떨어진다. 하토르 여신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도 않고 실루엣만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실루엣이라지만 뿔 사이에 있는 둥그런 태양 원반은 똑똑하게 보인다.
공략 영상에 따르면 그녀의 약점은 저 뿔 사이의 태양 원반이었다. 저걸 빼앗아 버리면 그녀는 스킬을 못 쓰고 황금빛 암소로 변해 빼앗긴 원반을 무력으로 되찾으려 한다.
무력을 사용한다 해도 원반을 빼앗긴 상태라 공격력은 높지 않아 쉽게 상대할 수 있다.
게다가 조금 전에 떠오른 공략집의 메시지.
<태앙 원반은 마신의 눈을 파괴하는 데 필요한 도구 중 하나입니다.>
더더욱 저 원반을 빼앗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대규는 흑린갑의 투명화를 풀고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흐릿한 실루엣이 천천히 다가왔다.
“영웅이여, 이곳에 온 걸 환영하노라.”
아름다운 목소리가 실루엣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실루엣의 얼굴 부분, 정확히는 눈가 부분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색안 스킬을 쓴 것 같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음속으로 애국가 사절까지 불러야 하나.’
“…멋진 갑옷이구나. 그걸 벗고 나와 함께 이곳에서 쉬는 게 어떻겠느냐.”
대규의 손이 천천히 갑옷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정신은 다잡고 있어서 멀쩡했다. 하지만 겉으로 그녀의 스킬에 걸려든 척하는 것뿐이다.
그래야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저 머리 위의 태양 원반을 빼앗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심장은 왜 이렇게 두근거리냐.’
하토르 여신은 대규가 자신의 유혹에 걸려든 줄 알고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복종안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스킬인 색안을 발휘할 때 저 원반을 뺏어야 한다. 그편이 훨씬 수월하다.
거의 다 왔다.
반짝!
그때 닥튈로이의 반지가 빛났다.
갑자기 다가오던 여신이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반지의 마법 저항 효과를 알아챈 여신이 뒤로 물러났다.
“그깟 마법 저항 아이템으로는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이놈의 반지는 왜 이렇게 화려하게 빛나는 걸까.
실루엣의 눈 위치가 새카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귀여운 반항아로구나. 이제 긴장을 풀고 시키는 대로 하거라.”
두 눈은 꾹 감고 있지만 온몸이 서늘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복종안이다. 곧 두려움과 공포심이 머릿속에 밀려들어 왔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쿵쿵쿵.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밀릴 순 없었다. 빨리 마신의 눈을 파괴해 보상을 받고 현실로 돌아가 열심히 인생을 살아야 한다.
강인한 의지를 발휘하자 두려움과 공포심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정신도 서서히 맑아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무릎을 꿇어라.”
“여신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무릎을 천천히 꿇는 척하다가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체인화시켜 휘둘렀다.
홱!
휘리릭-
체인 칼날이 그녀 머리 위의 태양 원반을 감쌌다.
“으읏!”
하토르가 당황하는 사이 체인 블레이드를 잡아당기자 뿔 사이의 태양 원반이 떨어져 나왔다. 대규는 바로 그것을 보관함에 집어넣었다.
실루엣에 보였던 눈가의 검은 빛이 사라졌다.
스킬이 무효화되었다는 표시.
대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름다운 여신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가, 감히… 빌어먹을 인간 녀석이…….”
관능적인 붉은 입술 사이로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튀어나왔고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얼굴엔 털이 숭숭 솟아났고 늘씬한 몸매는 갑자기 거대해졌다.
[여신 하토르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태양 원반을 빼앗기면 황금빛 암소로 변한다고 했지.
“우어어어어-”
그녀가 괴성을 내질렀다.
변신을 마친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암소와 인간이 합쳐진 수인의 모습. 키는 거의 3m에 육박했다.
미모의 얼굴은 흉악한 소로 변해 콧구멍에서 씩씩 콧김을 뿜어냈다. 늘씬하고 볼륨감 있던 몸매는 울룩불룩 거대한 근육질로 변했고 매끄러운 피부도 두꺼운 짐승 거죽이 됐다. 손엔 우악스러운 도끼를 쥐고 있었다.
‘이건 뭐, 어지간히 변해야지. 괴리감이 너무 심하네.’
착용하고 있는 황금 가슴 가리개 갑옷이 아니면 성별도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도끼날이 피라미드 바닥을 가격했다.
쿠구구궁!
쩌억!
도끼날에 몇 미터는 패여 버린 바닥.
피라미드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버렸다. 그 아래로 지상의 사막이 조그맣게 보였다.
2층 피라미드라지만 지상과 수십 미터는 떨어진 것 같았다.
구멍 사이로 거센 모래 바람이 불어와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때 메시지창이 떴다.
[새로운 시련이 시작됐습니다.]
[하토르를 해치우십시오.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