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화. 돌아온 현실 (5)
다음 날 오전 11시.
오늘도 점심부터 장사를 준비했다. 정직원이 된 상민과 진섭은 빠릿빠릿하게 30분 일찍 출근했다. 확실히 기본이 되어 있는 친구들이다.
도형에겐 방금 전 전화를 했다. 목소리를 보아하니 여태까지 늦잠을 자다가 받은 것 같았다. 옆에선 여자의 코맹맹이 소리도 들렸다.
받자마자 신경질을 내면서 왜 전화했냐고 쌍욕을 하며 지랄했지만, 밀린 월세를 오늘 다 주겠다고 하자 툴툴대면서도 알았다며 별말 없이 끊었다. 이따 오후에 녀석이 월세를 받으러 들르면 그때 김치찌개집 임대 이야기를 꺼낼 작정이었다.
아마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녀석으로서도 지금 비어 있는 가게를 그냥 놔두느니 차라리 누가 들어가서 월세를 다달이 내는 게 이득이었다. 재수 없고 건방진 자식이지만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하면 바로 수락할 놈이다.
참, 가게 벽과 밖의 문에도 알바 모집 공고를 붙여 놔야겠다.
마침 주문한 오늘 분 재료가 도착했고, 대규는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 * *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신촌의 대로.
건물주 이도형은 자신의 애마 페라리 오픈 스포츠카 안에서 눈을 의심했다. 뒷골목에서 대로까지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저 골목에 저렇게 잘나가는 가게가 있었나?’
분명 자신의 건물 하나도 저 뒷골목에 있었다. 쓰러져 가는 주택을 개조해 만든 허름한 상가. 전 건물주에게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서 넘겨받았지만 워낙 허름한 곳이라 건물 값은 똥값이었다.
나중에 세입자들을 강제로 쫓아내 건물을 비운 뒤 대충 리모델링해 건물 값을 확 올려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오빠~ 저기, 줄 장난 아니다. 엄청 맛있는 집인가 봐?”
조수석에서 반쯤 벗은 여자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그의 팔에 착 안겼다. 그 전과 다른 여자였지만, 같은 성형외과에서 복제한 듯 비슷하게 생겼다.
‘그런데 그 자식 가게도 저 골목에 있었지.’
도형은 여자를 향해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밀린 월세부터 받고 가자구. 먹고 싶은 거 있음 말만 해! 그 돈으로 다 시켜 줄 테니까!”
“우리 오빠 짱 멋있어!”
평소처럼 부릉부릉 간지 나는 배기음을 내며 뒷골목에 보란 듯이 척 행차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차가 진입할 수 없었다.
젠장. 그 새끼는 하필 왜 오늘 같은 날 오라는 거야.
월세 낸다니까 봐준다.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 후 도형은 눈을 의심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곳은 바로 자신의 건물이었다.
게다가 가게는 바로 녀석의 가게 탕꼬!
다시 봐도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가게를 잘못 찾아왔나 싶어 선글라스를 벗고 확인했지만 분명 녀석의 가게가 맞았다.
‘말도 안 돼. 김대규, 이 새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파리 날릴 정도로 손님이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도형은 다짜고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상민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대기 줄은 저쪽입니다.”
그러자 도형 옆에 팔짱을 낀 여자가 재수 없는 목소리로 징징거렸다.
“줄? 헐! 오빠, 나 힐 신어서 다리 아프단 말이야!”
도형은 짝다리를 짚은 채 상민을 꼬나보며 말했다.
“너, 지금 뭐라 그랬냐?”
“저쪽이 대기 손님 줄이세요. 일행이 없으시다면 저기 뒤에 가서 줄을…….”
“이봐요! 울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염?”
“예?”
도형은 상민의 어깨를 툭 치며 외쳤다.
“야, 이 안에 김대규 있지? 빨리 나오라고 해. 얼른!”
그때 대규가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새끼야. 밀린 월세 받으러 왔다. 그것보다 이렇게 세워 두는 건 대체 무슨 예의냐? 엉?”
도형이 대규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빌어먹을 새끼. 하지만 참자.
“…죄송합니다. 지금은 가게가 꽉 차서 그런데 비어 있는 옆 가게 가서 얘기하시죠. 진섭아! 주방 좀 부탁할게. 요리를 다 되어 있으니까, 서빙만 하면 돼.”
대규는 여자와 도형을 김치찌개으로 들이고는 준비한 음식과 음료수를 들고 갔다.
“약소하지만 방금 튀긴 거라 맛있습니다. 한 조각 드시면서 얘기하시죠.”
여자가 실리콘 가슴을 흔들며 툴툴거렸다.
“오빠, 치킨 탕수육이 뭐야? 이거 싸구려 아냐? 난 싼 거 싫은데… 격 떨어지게.”
“가난뱅이 새끼들이 싼 맛에 개떼처럼 먹으러 왔나 보지.”
재수 없는 놈. 말을 해도 지랄 맞은 말만 골라서 하네.
“호호호… 오빠, 정말 멋있다. 이래서 사람은 비싼 곳에 가야 해. 그치, 오빠?”
실리콘이 더 재수 없었다.
말을 마친 여자는 젓가락을 들고 깨작거리면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번쩍!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대애애박~! 오빠! 이거 완전 대박!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먹스타그램에 올려야징.”
여자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찰칵찰칵 찍기 시작했다. SNS에 올린 뒤엔 젓가락도 팽개치고 손으로 탕수육을 집어 든 뒤 게걸스럽게 폭풍 흡입했다.
그렇게 맛있나?
도형은 접시에 담긴 음식을 못마땅하다는 듯 꼬나봤다. 싸구려만 먹던 년이라 어쩔 수 없구만. 그러나 궁금하긴 했다.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었다.
씨발, 그래 봤자 닭튀김이…….
“……!”
톡톡톡.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핸드폰을 들어 SNS에 올리고 있었다.
‘이런, 미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가오가 있는 대로 상했다. 이따위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다니.
하지만 한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씨발, 왜 이렇게 맛있어?'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릇에 남은 소스를 숟가락으로 퍼먹고 있었다.
‘이 새끼, 이거 월세 준다고 불러내 음식 접대해서 밀린 월세 깎으려는 수작 아니야?’
아무리 장사가 잘된다고 해도 저 쥐똥만 한 가게에서 며칠 만에 900만 원을 버는 건 무리일 테니까.
분명 그런 것이다!
‘900만 원에서 1원이라도 부족해 봐라. 개지랄을 해 주마.’
도형은 대규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야, 김대규! 빨리 월세나 내놔!”
“현금으로 드릴까요, 아니면 계좌로 보내 드릴까요?”
“여기까지 왔는데 현금으로 줘.”
‘부모님 몰래 돌려 막기 하느라 현금을 달라고 하겠지. 이럴 줄 알았다, 한심한 놈.’
대규는 쇼핑백을 들고 다가가 돈다발을 꺼냈다. 일부러 만 원권으로 바꿔서 챙겼다. 부피가 커서 더 많아 보이게.
도형은 묶여 있는 돈다발을 모조리 푼 뒤 일일이 손으로 돈을 한 장 한 장 다 세어 봤다.
조금이라도 모자라길 바라면서.
하지만 정확히 900만 원이었다.
‘크윽…….’
그런데 대규가 또 다른 돈다발 한 뭉치를 꺼내더니 테이블에 척 올려놓았다.
“뭐야, 이건?”
“계약금 100만 원입니다. 사장님이 지금 계신 이곳 김치찌개집까지 임대하려구요. 보증금하고 월세는 말일까지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며칠 사이 1,000만 원을 벌었다는 건가.
입이 떡 벌어졌지만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몇 달째 비어 있는 가게. 건물주인 자신으로선 녀석의 제안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저 자식의 당당한 모습을 보니까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것도 무지하게.
“그럼 오늘부터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아 여기 영수증에 사인도 좀 해 주시고.”
* * *
가게를 나서는 도형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젠장. 세입자들을 빨리 내보내서 이 건물을 싹 리모델링하려고 했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잖아.’
그는 선글라스를 낀 뒤 거들먹거리며 골목길을 벗어났다. 코맹맹이 여자는 양손에 한가득 포장한 탕꼬를 들고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여기 너무 맛있다! 다음에 또 오자. 너무너무 좋아.”
“닥쳐!”
도형이 성을 내자 여자는 입을 쭉 내민 뒤 저만치 앞서 걸어갔다.
귀찮은 계집애. 안 그래도 가오 상해 죽겠는데.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는데 탕꼬 앞에 길게 늘어선 손님 줄이 눈에 들어왔다.
‘씨발, 사람 존나게 많네.’
잠깐만.
그는 가만히 서서 손님 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정도로 장사가 잘된다면 굳이 리모델링을 하지 않아도 될지도……?
담배를 물고 있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도형에게 허락을 받은 대규는 얼른 상민과 다른 친구들을 불러 김치찌개집을 청소시켰다. 그리고 박 사장에게 전화해 닭 100마리를 추가로 주문했다.
청소가 끝나자 김치찌개집 문을 열고 손님들을 받기 시작했다.
“이리로 들어오세요!”
손님들이 마구 들어갔다.
김치찌개집까지 손님을 받았지만 대규의 가게 앞에 선 줄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여기가 탕꼬야? 그게 그렇게 맛있다며?”
“응. 요 며칠간 인스타랑 페북, 그리고 맛집 블로그에서 난리도 아니래.”
“한 번 오면 계속 찾게 된다고 해서 마약 탕수육이라던데.”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먹을 만한 가치가 있다니까!”
몇몇 손님은 길게 늘어선 줄을 찍어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 * *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테이블에 태블릿 PC가 놓여 있었다.
태블릿 PC에는 손님들이 길게 늘어선 줄과 탕꼬의 가게 앞 전경, 그리고 음식 사진들이 줄줄이 떠 있었다. 블로그 및 SNS에 불티나게 떠돌아다니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본부장이 보기엔 이 가게, 어떤 것 같은가?”
제일푸드 시스템 기획본부장 배정현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초로의 남자가 내민 태블릿 PC를 받아 들며 말했다.
“젊은 청년 사장이 운영하는 곳이고, 최근 며칠 동안 SNS 및 인터넷에서 폭발적으로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도 탕수육 치킨이란 품목으로요.”
“흥미로워. 이번에 우리 회사가 새로 론칭할 프랜차이즈 식당 후보에 넣을 건가?”
남자가 묻자 정현은 잠깐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말했다.
“아직 다른 식당들과 함께 검토 중입니다. 메뉴가 적고, 요 며칠 사이 갑자기 확 인지도를 얻은 곳이라 유행처럼 떴다가 갑자기 사그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탕수육 치킨이란 메뉴 자체는 눈여겨볼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음…….”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정현이 조심스럽게 묻자 테이블 너머 초로의 남자, 제일푸드 시스템 회장 이희승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일세. 탕수육 치킨이란 메뉴로 단기간에 이렇게까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참 재미있군. 그 가게를 좀 더 지켜보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