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화. 돌아온 현실 (4)
<김수진, 장소정의 약점을 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Yes.’
그러자 지도창처럼 눈앞에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자신의 가게 탕꼬의 모습이다.
문가의 테이블에 앉은 김수진과 장소정이 보였다. 그녀들은 음식들을 포식한 뒤 배를 두들기며 말했다.
“맛있긴 정말 맛있네.”
갑자기 그녀들은 목소리를 낮추며 속닥거렸다.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보자. 정말 CCTV 없는 거 맞지?”
“그렇다니까. 오자마자 매의 눈으로 확인했지.”
“좋아. 그럼 사람들 좀 살펴봐.”
“오케이.”
소정은 가게를 둘러봤다. 손님들은 다들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틈에 수진은 가방에서 둘둘 말린 휴지를 꺼냈다. 휴지를 풀자 커다란 바퀴벌레 사체가 드러났다.
툭.
바퀴벌레를 크림소스에 떨구자마자 그녀들은 호들갑스럽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머, 여기 음식 상태가 왜 이래?”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그리고 상민이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며 영상이 종료됐다.
역시 이들의 소행이었군.
눈앞에 영상으로 떠오르다니. 봐 놓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CCTV 같은 게 아니라 영화처럼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리는 영상이다.
하지만 이 영상을 본다 한들 무슨 방법이 있을까. 이건 내 눈에만 보일 뿐인데.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불쑥 떠올랐다.
<영상을 저장할 저장 장치를 선택하십시오.>
<스마트폰/외장 하드/PC 내장 하드/ USB>
뭐야, 저장 장치?
설마 방금 본 영상을 기기에 저장할 수 있다는 건가.
스마트폰을 선택했다.
<선택하신 저장 장치로 영상이 저장됐습니다.>
혹시나 해서 스마트폰을 꺼내 봤다.
확인을 해 보니 방금 눈앞에서 봤던 영상이 저장되어 있다. 헐.
“이봐욧! 우리 말 듣고 있는 거예요?”
“계좌 번호 알려 드릴 테니까, 오늘 중으로 300만 원 부쳐 주시구요.”
계좌번호? 300만 원?
웃기지도 않는다. 날강도 같은 년들.
이제 주변 손님들까지 웅성거리며 그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대규는 그녀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만하시죠. 계속 이러시면 영업 방해로 신고하거나 경찰 부를 겁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나가 주세요.”
그러자 그녀들은 목소리를 더욱 높이기 시작했다.
“뭐, 뭐라구?”
“이봐! 당신! 우리가 누군지 알아? 우리 파워 블로거라구!”
“파워 블로거지겠죠.”
“거, 거지? 이봐!”
대규는 공략집에 적혀 있었던 내용을 기억하며 쏘아붙였다.
“홍보를 빌미로 식당을 찾아가 무전취식도 하시고, 가끔은 일부러 이물질을 넣어 트집을 잡으며 돈을 요구하는데 거지가 아니면 뭡니까? 공갈 협박범?”
그 말에 수진과 소정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CCTV가 있었던 건가? 아니다.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없었다.
그녀들은 이런 행동을 벌이는 데 있어선 프로였다. CCTV가 있는 가게에선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러 그녀들은 주방에서 멀리 떨어진 문가 쪽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야 대규가 있는 주방에선 그들의 위치가 보이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다른 손님들도 모두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물증은 없다.
이 자식은 지금 심증만으로 이러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건방지다.
이 건방진 자식은 자신들의 위력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팔로워가 수천 명이 되는 파워 블로그를 운영하는 그녀들은 인터넷 세계에선 거의 절대 권력자나 다름없었다. 이런 작은 가게 사장이면 자신들의 클릭 한 방에 폐업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데 거지에 공갈 협박범이라니?
그녀들은 악에 받쳐 더더욱 소리쳤다.
“뭐? 웃기고 있어, 정말! 그럼 우리가 일부러 바퀴벌레를 넣었다는 거야?”
“하, 여기 진짜 위생뿐만 아니라 사장 인성도 쓰레기네!”
“참 나, 우리가 찾아와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야,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오!”
턱.
대규는 말없이 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화면엔 좀 전에 저장했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당연히 볼륨은 최대치로 해 놨다.
핸드폰에서 그녀들의 음성이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 CCTV는 성능이 좋아서 사운드까지 다 잡히거든요.”
대체 언제 저런 걸 촬영한 거지?
좀 전까지 미친 듯이 소리 질렀던 그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떡 벌린 채 대규를 바라보았다.
주변 손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박 사건! 자기들이 벌레 넣고 위자료 달라고 한 거야?”
“블로거 ‘하늘나그네’? 유명한가? 야, 핸드폰으로 검색 한번 해 보자.”
“이거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면 쩔겠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녀들은 얼굴을 가렸다.
찍지 마, 찍지 말라구!
이게 온라인에 퍼져 버리면 블로그 팔로워만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니라 경찰에 잡혀갈지도 몰랐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인터넷에 신상 털리는 건 기본이고.
걸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분명 CCTV도 없었고, 항상 철저하게 해 왔는데.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해야 해. 안 그럼 블로그뿐만 아니라 내 인생도 끝이야.’
수진은 두 손을 맞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사, 사장님… 저기,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대신 저희가 공짜로 가게 홍보해 드릴게요!”
소정도 옆에서 거들었다.
“저희 팔로워 대박 많아요. 홍보하면 여기 장사 더 대박 날 거예요…….”
그녀들은 블로그 글을 보여 주며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제발… 경찰에 신고만 하지 말아 주세요!”
“알았으니까 드신 것들이나 계산하세요. 총 21만 7천 원 나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들은 대규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계산을 하고 나갔다.
여기선 저런 모습을 보였지만 다른 가게에 가면 또 저런 갑질을 하겠지. 저런 악질 블로거들은 용서할 수 없었다. 한번 호되게 혼쭐이 나서 다시는 저런 짓 못 하게 만들어야 했다.
경찰에 신고하는 건 직접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
대규는 핸드폰을 상민이에게 건넸다.
“이거, 니 전문이지?”
상민이는 옛날부터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를 꿰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엔 취업도 못하고 피시방에서만 줄곧 살아서 거의 모든 커뮤니티의 네임드 회원이었다.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SNS도 빼놓지 않고 했다.
게다가 영상 편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건 덤.
이런 상민에게 이 영상을 맡기면 인터넷과 SNS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엔 경찰에 신고하는 것보다 인터넷에 흘리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물론 경찰 신고도 할 거다. 상민이가.
핸드폰을 받은 상민은 씨익 웃었다.
“나만 믿어.”
“잘하면 보너스 줄게.”
“콜! 아주 이것들 작살을 내 놓을게.”
* * *
새벽 1시.
장사를 종료하고 대규는 친구들을 보낸 뒤 매상을 확인했다.
오늘 매상은 320만 원을 돌파했다. 재료가 없어서 일찍 문을 닫지 않았다면 훨씬 많이 벌어들였을 것이다. 내일은 박 사장에게 닭을 150마리로 늘려서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가게가 작아서 150마리 이상은 팔기가 힘들었다.
‘가게가 좀 넓어서 손님들을 더 받았다면 더 팔 수도 있을 텐데.’
잠깐만.
옆집 김치찌개 가게가 떠올랐다. 주인아줌마는 과하게 오른 월세와 건물주 이도형의 성추행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결국 지금 그 가게는 비어 있는 상태다.
‘그 가게까지 임대해서 장사를 하면 어떨까?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새로 다른 가게로 이전 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보증금도 문제고 그보다는 권리금까지 모으려면 언제가 될지 모를 일이었다. 조금만 앞쪽으로 나가도 권리금만 억 단위가 넘는다. 당분간은 옆 가게를 확장하고 돈을 더 모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밀린 6개월 치 월세 900만 원을 빨리 모아야 했다. 박 사장이 재료비 결제를 일주일에 한 번 해 달라고 했으니까, 내일 하루까지 장사를 잘만 하면 900만 원을 모을 수 있다.
이걸로 밀린 월세를 갚고 하루라도 빨리 김치찌개 가게를 임대하기로 결심했다. 테이블과 집기도 다 그대로 있으니까 간판만 떼어 내면 될 것이다. 확장 공사나 인테리어는 나중에 돈 모아서 한다 치면 당장 손님을 받아 장사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내일은 오전 11시부터 오픈해 점심 장사도 하기로 했다. 그럼 충분히 900만 원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럼 닭을 200마리 주문해도 되겠는걸.
그러고 보니 오늘 장사 종료 직전 요리 스킬 중급 등급을 획득했다. 이젠 포션 없이도 입소문을 낼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혹시 다음 등급도 있는 것 아닐까?
분명 차원의 틈에서 봤던 몬스터에 대한 공략집도 상급까지 총 3등급이었다.
대규는 상태창을 불러 요리 스킬 글자를 손으로 눌렀다.
<요리를 통해 경험치를 얻을수록 스킬의 등급이 오릅니다(0/1000).>
<다음 등급은 상급입니다.>
<요리(상급): 아주 맛있는 음식을 만들게 됩니다. 추가 옵션으로 입소문 양념도 제작이 가능합니다.>
경험치를 1,000이나 채워야 한다니. 중급의 세 배가 좀 넘었다.
그것보다 설명에 붙은 입소문 양념이란 건 뭘까?
궁금해 하지만 말고 손끝으로 눌러 보자.
<입소문 양념: 요리(상급)의 스킬로 만들 수 있는 신비한 양념. 이 양념이 들어간 어떤 음식이라도 그것을 먹은 사람은 무조건 3인 이상의 지인에게 맛있다고 입소문을 내게 됩니다.>
어떤 음식이란 뜻은 내가 만든 음식이 아니어도 된다는 건가.
아무래도 이 양념은 라면 스프나 MSG 같은 조미료 개념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맛없는 요리라도 내가 만든 이 입소문 양념을 넣기만 하면 입소문을 낼 만큼 맛있는 음식이 된다는 뜻이다.
이건 거의 마법 수준이잖아.
1,000이면 500인분. 장사 이틀 동안 잘하면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이제 슬슬 자자!”
대규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매상이 들어 있는 돈 통을 개인 보관함에 넣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곳이라면 안전하다.
* * *
다음 날 새벽 1시.
대규는 장사를 마감한 뒤 서빙을 도와준 친구들에게 일당이 담긴 돈 봉투를 나눠 줬다.
그리고 친구들 중 상민과 진섭에겐 따로 남으라고 했다.
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대규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규야, 무슨 일이야? 설마 우릴 자르려는 건 아니지?”
“돈 좀 덜 줘도 좋으니까 우리 계속 고용해 주라! 부탁이야.”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너희 둘은 직원으로 채용하려고 해.”
그 말을 듣자마자 상민과 진섭은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했다.
“고마워, 대규야! 엄마, 나 드디어 취업했어!”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게!”
상민과 진섭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대학교 졸업 후 취업이 안 된다고 좌절하며 맨날 피시방에서 게임으로 시간을 축내던 백수 녀석들이었는데 탕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한 이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을 해 줬다. 친한 친구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성실 근면한 모습을 믿고 직원으로 채용하기로 결심했다.
대규는 그들에게 옆집인 김치찌개 가게까지 확장할 계획을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 서빙할 사람도 너희들과 다른 친구들 말고 더 필요할 것 같아. 두 명 정도 아르바이트생으로 더 뽑으려고.”
“여자로 뽑자. 예쁜 여자로.”
상민이 입을 헤벌쭉 벌리며 말했다.
“예쁜 것보다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성실한 사람이었음 좋겠어. 참, 내일도 오픈 11시에 할 거니까, 일찍 나오고.”
“넵! 알겠습니다, 김 사장님!”
그들은 꾸벅 인사까지 하면서 가게를 나섰다.
그럼 오늘 매상을 계산해 볼까.
친구들의 일당을 주고 남은 매상은 480만 원.
점심부터 장사를 해서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그 전의 매상들과 합치면 총 1,045만 원!
드디어 1,000만 원을 돌파했다.
이걸로 밀린 월세 900만 원을 갚고 옆 가게에 계약금 100만 원을 낸 뒤 일단 임대해야겠다.
내일은 오전에 건물주 도형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물론 그 건방진 새끼와 전화 통화를 하는 건 상당히 불쾌한 일이지만.
대규는 인터넷에 알바 모집 공고를 올린 뒤 접이식 침대를 펴고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