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20화. 포탈 (1)
지영은 탑의 4층에 서 있었다.
쿠와왕!
쾅!
위층에선 거대한 굉음과 포효가 들려왔다. 소리만 들어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얼마 후 굉음이 멎었고 눈앞에 메시지창이 떴다.
[두 번째 히든 미션을 완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당신의 레벨이 추가로 1단계 상승합니다.]
‘이게 뭐지? 대규 씨가 몬스터를 쓰러뜨린 건가?’
곧 자신의 몸에서 하얀빛이 일었다. 레벨 업이 됐다는 신호.
하지만 별로 기쁘진 않았다.
솔직히 기쁘지만 불편하다.
대규가 수십 마리의 오르트로스를 해치울 때 자신은 고작 몇 마리 정도만 간신히 해치울 수 있었다. 그것마저도 그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그가 5층으로 혼자 올라갈 때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한다. 그와 함께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현재 대규와 자신의 실력 차이는 너무나도 크다. 함께 싸우기는커녕 그녀는 일방적으로 대규의 도움만 받고 있다.
대규가 도와주는 덕분에 안전하게 전투는 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녀는 그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강해지려면 더 이상 그에게 의지해선 안 돼.’
지영이 이런 결심을 한 순간 주변의 풍경이 사라졌다.
대규는 어느새 홍대입구 전철역의 승강장에 서 있었다.
지영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에 잠긴 듯한 태도로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그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어요.”
묘하게 차분한 목소리다. 태도도 살짝 변한 것 같고.
자신이 케르베로스를 상대하러 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일일이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대규는 지도창을 띄운 뒤 경쟁자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다행히 나머지 경쟁자들은 시청의 포탈과 동떨어져 있었다.
최대호는 영등포에서 부활한 뒤 문래동 쪽에서 배회하고 있었고 원영은 여의도에 있었다.
창동, 노원역에 있던 후보생들은 각각 광운대, 미아 삼거리 근처에 있었고, 잠실에서 부활했던 후보생은 이제 막 한강을 건너 건대입구에 진입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한걸?
공략집을 띄워 마지막 히든 미션 내용을 확인하려는데 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규 씨.”
“네?”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정중히 숙인 뒤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함께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우리 여기서 헤어지도록 해요.”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뭐, 떠나겠다는 사람을 굳이 잡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마지막 히든 미션은 분명 첫 번째, 두 번째 히든 미션을 수행한 자만 할 수 있다. 두 번째 미션만 수행한 그녀는 애초에 미션 장소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
하지만 그녀가 시청에 나보다 먼저 도착한다면?
홍대는 포탈이 있는 시청과 꽤 가까운 거리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대규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원영이 부활해서 오는 것도 기다릴 겸, 당분간 홀로 몬스터들과 싸워 보려고 해요. 오다 보니까 합정 쪽에는 키클롭스 몬스터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거기서 사냥을 하려구요.”
“그렇군요.”
“제가 먼저 같이 가자고 해 놓고 이렇게 멋대로 헤어지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전철역에서 나와 악수를 한 뒤 마지막 인사를 했다.
“지영 씨, 그럼 다음에 만나도록 합시다.”
“네. 그간 정말로 고마웠어요.”
지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당히 예의 바른 여자다.
이화여대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뒤를 돌아 그녀에게 외쳤다.
“키클롭스들의 약점은 외눈입니다. 다른 곳보다도 외눈을 위주로 공격하면 쉽게 잡으실 수 있을 거예요!”
“네?”
대규는 지영의 놀란 토끼 눈이 귀여웠다. 그래서 알려 준 건 아니다. 잠시 동안이지만 함께 팀을 이룬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여겨서 말해 준 거다.
“그럼 전 이만.”
말을 마친 대규는 이화여대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약의 장화를 신은 채로 뛰자 몸이 자동차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지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저 멀리 사라진 대규를 넋 놓고 바라봤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보다 더욱 강해지면, 그땐 저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지영은 메티스의 쌍검을 꺼내 든 뒤 합정 방향으로 달렸다.
타다닷!
도약의 장화를 신고 미친 듯이 달리자 5분도 안 돼 이화여대 정문 앞에 도착했다.
천천히 정문 안쪽으로 걸어갔다.
대규는 눈앞에 우뚝 솟은 ECC 건물을 바라봤다.
마지막 히든 미션은 첫 번째, 두 번째 미션보다 힘들 것 같았다. 애초에 공략집에 적혀 있던 미션 내용과 보상도 비공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볼 수 있겠지.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공략집을 띄웠다.
-히든 미션 3-
장소: 이화 여자 대학교 ECC 중앙 통로.
조건: 히든 미션 1, 2를 클리어한 자만 입장 가능.
미션 내용: 보상이 들어 있는 황금 상자를 찾아라(제한 시간 3분).
보상: 황금 양털 조끼.
이해할 수 없었다.
여태까진 미션 장소에 가면 항상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 보상이 들어 있는 황금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상자를 찾는 게 미션 내용이라니.
명색이 마지막 히든 미션인데 이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더더욱 신경 쓰이는 건 그 옆에 적혀 있는 ‘제한 시간 3분’.
황금 상자를 찾으라고만 적혀 있는 걸로 봐서 이 미션의 내용은 몬스터와의 전투나 싸움 쪽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머리를 쓰는 미션인 거 아닐까. 흐음, 지능 수치가 몇이었더라.
일단 보상을 확인해 보자.
황금 양털 조끼라 적힌 단어를 손끝으로 터치했다.
<황금 양털 조끼(성장형 아이템)>
<제우스 신 소유 황금 양의 털가죽으로 만든 조끼로 착용자의 생명력이 10%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황금 양털의 신묘한 기운이 발동해 5초 동안 무적 상태에 돌입합니다. 황금 양털의 기운은 하루에 한 번만 발동됩니다.>
생명력이 10% 이하로 떨어지면 5초 동안 무적이라고?
입이 떡 벌어졌다.
생명력 10%의 상태는 말이 10%지, 거의 죽기 직전의 빈사 상태나 다름없다. 그때 무적 상태에 돌입한다는 것은 죽을 위기를 어떻게든 모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하루에 한 번만 발동된다 하더라도 엄청나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하루에 목숨을 하나씩 얻게 된다는 소리.
“뭐, 이런 사기적인 아이템이 다 있어…….”
3분 동안 눈에 불을 켜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금 상자를 찾아 주마!
의지를 불태우며 대규는 ECC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칠흙 같은 어둠이 온몸을 감쌌다.
얼마 후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문이 보였다. 여태까지의 히든 미션에서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러 가기 직전 열렸던 문과 비슷하게 생겼다.
[세 번째 히든 미션 장소에 진입했습니다.]
[미션: 보상이 들어 있는 황금 상자를 찾으십시오.]
굉음과 함께 문이 천천히 양옆으로 열렸다.
그곳은 여태까지 보스 몬스터들과 싸웠던 것보다 두 배 정도 넓은 공터였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혔다.
위쪽에서 들려오는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대규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높게 솟은 아치형의 천장을 반짝이는 수많은 작은 새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새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공터 끝에는 작은 제단이 있었지만 그 위에 황금 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광경이지? 저 반짝이는 새들은 뭐고.
잠깐.
대규는 다시 한 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것들은 새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날개가 달린 황금 상자들이었다!
적어도 수백 개쯤 되어 보이는 황금 상자들이 새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상자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
저 중에서 단 하나의 상자만 진짜 보상이 들어 있는 상자인 것 같았다.
그 순간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미션이 시작됐습니다.]
[02:59]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 미션을 만든 녀석은 악취미를 가진 자임에 분명하다.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수백 개의 똑같은 상자 속에서 단 하나를 3분 안에 찾아내라니.
불가능하다.
‘설마… 공략집이 이런 미션도 해결해 줄 수 있는 건가?’
-차원의 틈 공략집-
<3분 안에 진짜 황금 상자를 찾으면 보상 황금 양털 조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짜 황금 상자는 회색으로 표시됩니다.>
대규는 날아다니는 상자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럴 수가.
날아다니는 상자들이 모두 회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 단 하나의 상자만이 황금색으로 번뜩였다.
“하하…….”
설마설마했는데 이런 것까지 가능하다니. 이 정도면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진짜 황금 상자를 찾았다 해도 그걸 잡아 제단에 올려놓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상자들이 날고 있는 높이는 대략 땅에서 10미터는 떨어져 있다. 웬만한 인간의 점프력으론 당연히 힘들다.
하지만 도약의 장화가 있다면 어떨까?
팟!
힘차게 땅을 박차고 상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있는 천장을 향해 점프한 뒤 손을 죽 뻗어 황금색으로 빛나는 상자를 잡아챘다. 하지만 상자는 재빨리 날개를 푸드덕대며 손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림없다.
팟!
상자가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허공에서 발을 다시 한 번 굴렀다.
어느새 상자의 날개를 잡아 착지하고는 바닥에 상자를 대고 꼼짝 못하게 눌렀다. 상자는 반항하듯 날개를 거칠게 푸드덕댔다.
케르베로스를 쓰러뜨리고 얻은 이 장화가 아니었다면 절대 상자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칠게 푸드덕대던 날개는 얼마 후 잠잠해졌다. 그때 줄어들고 있던 시간 창이 사라졌고, 천장을 떠돌던 나머지 상자들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보상이 들어 있는 황금 상자를 제한 시간 내에 찾은 대가로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마나를 20 흡수하였습니다.]
[모든 히든 미션을 완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당신의 레벨이 추가로 1단계 상승합니다.]
대규는 상자를 제단 위로 가져갔다.
상자가 딸깍, 하고 열렸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상자 속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노란 조끼가 들어 있었다. 꼭 손가락 인형에나 맞을 사이즈였다. 가만히 쳐다보자 공략집에서 봤던 아이템 설명과 동일한 것이 눈앞에 떴다.
그것을 손끝으로 건드리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어?”
그때 착용한 가죽 갑옷 상의가 은은하게 황금빛으로 빛났다.
조끼가 갑옷 위에 덧입혀진 게 아니라 꼭 흡수된 것 같았다.
역시 성장형 아이템이라 그런지 젬스톤이란 광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창도 떴다.
그걸 보니 빨리 타르타로스에 가서 젬스톤을 얻고 싶었다.
‘드디어 모든 히든 미션을 다 했다.’
남은 건 이제 누구보다도 빨리 시청의 포탈로 가는 것이다.
대규는 공터 중앙에 생긴 푸른색 마법진이 생기자마자 그곳으로 뛰어갔다.
타다닷!
“헉헉…….”
도약의 장화를 신고 숨 가쁘게 달렸다.
눈앞에 서울 시청 건물이 보였다. 시청 앞의 광장 허공엔 틈이 갈라져 있었다. 꼭 공간을 예리한 칼로 베어 버린 것 같았다.
대규는 틈새 앞으로 다가갔다.
좌악-
틈새가 열리며 거대한 원형의 구멍이 생겼다. 구멍 너머는 칠흑 같은 암흑뿐이었다.
지도를 띄워 봤지만 경쟁자들의 모습은 시청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자신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
대규의 마음을 확인시켜 주듯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후보생들 중에서 가장 먼저 타르타로스로 진입하는 포탈을 찾았습니다.]
[보상과 선착자 추가 보상은 포탈을 통과한 이후에 주어집니다. 포탈에 들어가시겠습니까? Yes/No?]
Yes.
당연하지.
대규는 심호흡을 한 뒤 검은 암흑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쑤욱-
온몸이 순식간에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