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 히든 미션 2 (2)
탑의 3층.
서걱-
서걱-
서걱-!
칼날 소리가 들렸고 열두 마리의 오르트로스 사체가 쓰러져 있었다.
“후…….”
대규는 숨을 고르며 검집에 칼을 넣었다. 칼에 묻혀 뒀던 마비 독의 효과는 훌륭했다. 놈들의 몸을 칼로 베었을 때 재생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던 것이다. 그 덕에 훨씬 쉽게 놈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키클롭스와 동급인 몬스터라 그런지 경험치가 생각만큼 많이 쌓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잡은 양이 워낙 많아 3층을 쓸자마자 중급 공략을 습득했다는 메시지창이 떴다. 레벨도 12로 올랐다.
“하앗!”
촤아악!
지영은 뒤쪽에서 대규가 흘린 녀석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적은 두 마리. 쉽지 않은 상대였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쌓은 경험 덕분인지 크게 밀리지 않고 있었다.
“바람의 걸음!”
3미터짜리 순간 이동 기술, 바람의 걸음.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오르트로스가 당황한 듯 고개를 쳐들었다.
“늦었어!”
그녀는 큰 소리로 외치며 쌍검을 휘둘렀다.
슈칵!
쿵!
두 마리의 몬스터가 동시에 목을 잃고 쓰러졌다.
지영은 대규가 나머지 몬스터를 모두 죽인 것을 확인하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다 잡으신 거예요?”
“그쪽보다 먼저요.”
지영은 그의 뒤에 쓰러져 있는 몬스터들을 보면서 낮은 감탄사를 흘렸다. 자신이 두 마리를 잡을 동안 열두 마리를 잡고도 시간이 남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실력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이 대단한 거야. 괜한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지영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대규가 오르트로스의 사체 위에 뜬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가죽 갑옷 상의였다.
그걸 지영에게 내밀자 그녀가 토끼눈이 되어 되물었다.
“이게 뭐죠?”
“당신 겁니다. 손으로 잡으면 설명이 떠요.”
“제, 제가 가져도 되나요?”
“당연히. 당신이 잡은 거니까요.”
“아…….”
당연하다.
당연한 것인데도 왠지 대규가 고맙게 느껴졌다.
‘아니… 당연할 리가.’
단지 자신의 마음이 편하라고 그렇게 말해 준 것이다. 이곳에서 대규 없이 그녀 혼자서 사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갑옷 역시 그녀가 아니라 대규가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건… 제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갑옷을 다시 대규에게 돌려주었다.
오르트로스를 잡으며 얻은 경험치만 해도 충분했다. 마비 독을 바른 검이나, 몬스터의 약점에 대해서 몰랐다면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건 자신일 것이다.
그러자 대규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곤란하네요… 사실 저는 이미 갑옷이 있는지라. 지영 씨가 안 가진다면 그냥 버려야 되는데…….”
대규는 그렇게 말하며 갑옷을 바닥에 던졌다. 어차피 어디 가서 팔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괜히 가지고 있어 봐야 보관함만 차지하는 물건이다. 차라리 여기서 이걸 주고 생색이라도 내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더 나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에 떨어진 갑옷을 손에 쥐었다.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부끄럽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았다. 자존심보다는 생존이 중요하니까.
촤악!
그녀가 갑옷을 들자 순식간에 그녀의 늘씬한 상체에 감겨들었다.
짙은 갈색의 가죽 갑옷이 그녀의 몸에 맞게 줄어들었다.
대규는 떨리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써야 했다.
‘가슴이 왜 이렇게 커?’
펑퍼짐한 상의를 입고 있어 몰랐다. 헌데 몸을 완전히 감싸는 갑옷을 입자 그녀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갑옷이 잘 어울려서요.”
“감사해요.”
그녀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규는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을 느끼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런 곳에서 변태 취급을 받고 싶진 않았다.
“후, 그럼 이제 4층을 공략해야 하는데…….”
대규는 지도창을 띄웠다.
놈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는, 일명 개 사육장.
일일이 세어 보니, 총 27마리.
저것들을 다 해치우면 총 50마리다. 그거면 두 번째 히든 미션을 달성하고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사자만한 놈들 27마리가 우글우글 몰려 있을 걸 생각하니, 참.
‘비산의 결계를 사용해야겠어.’
힘 스킬과 함께 사용한다면 위력이 엄청날 것이다. 스킬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11:51]
아직 여유는 있다.
하지만 결계를 사용한다고 한 번에 27마리가 다 죽진 않을 것이다.
결계의 사용 범위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반경 5미터. 놈들의 거대한 몸집을 고려한다면 별로 넓은 범위는 아니다. 게다가 스킬의 쿨 타임이 30분이기 때문에 한 번에 최대한 많은 놈들을 잡아야 했다.
놈들을 최대한 범위 내로 몰아넣으려면 어그로를 끌어 놈들이 자신을 향해 꾸역꾸역 달려들도록 만들어야 한다. 설사 놈들의 머리에 돋아난 갈기 뱀들에게 물리는 한이 있어도.
어차피 갑옷과 닥튈로이의 반지, 그리고 층마다 틈틈이 만들어 둔 해독제가 있으니 목숨을 잃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규는 그렇다 쳐도 지영은 어떨까?
그녀가 입은 가죽 갑옷의 효과는 물리 방어력 10퍼센트 상승.
그 정도로는 무리다.
대규는 입을 열었다.
“위층엔 녀석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저와 항상 5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세요. 혹시 전투 도중 제가 신호를 보내면 최대한 바람의 걸음을 사용해 저와 몸을 떨어뜨리세요.”
“알겠어요. 짐이 되지 않게 노력할게요.”
그녀가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4층으로 올라서자 탑의 문 너머로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바로 뒤쪽에 몬스터가 있다. 지도로 다시 한 번 확인한 대규는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들어갑니다.”
“네.”
“이야앗!”
벌컥!
문을 열자마자 대규는 기합을 내지른 뒤 보레아스의 검을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오르트로스들을 베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검날이 스칠 때마다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오르트로스들을 보며 지영은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닫았다.
‘말도 안 돼…….’
저건 인간의 능력이 아니다.
저 정도로 우글우글 몰려 있는 몬스터 사이를 뚫고 가려면 대체 얼마나 강해야 하는 걸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저 사람이 자신과 같은 후보생이라는 것이, 얼마 전까지 보통 사람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극심하게 실력 차이가 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질투나 부러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커허엉!”
놈들은 대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들었고 대규는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놈들의 앞발, 뒷발, 꼬리, 머리통, 갈기뱀들이 사정없이 날아가 버렸다.
대규는 이를 악물었다. 적들이 너무 많았다.
‘오른쪽 머리를 자를 틈이 없군.’
놈들의 잘린 사지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마비 독 덕분에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놈들은 대규가 어려워하는 것을 알고는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의 사방으로 몬스터가 빽빽하게 모여들었다.
지금이다.
“피해!”
지영이 스킬을 사용해 황급히 뒤쪽으로 빠지는 게 보였다.
대규는 검을 크게 회전하며 허공으로 치켜세웠다.
쿠르르르르!
터져 나오는 굉음과 함께 반경 5미터짜리 투명한 결계막이 형성되었다.
“쿠워어엉!?”
몬스터들이 당황하며 대규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이 빠져나가지 못했다.
“비산의 결계!”
대규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번쩍!
결계막 한가운데 거대한 빛이 떠올랐다.
곧 빛은 수백 갈래로 쪼개졌고, 검격이 되어 오르트로스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번쩍.
번쩌억-!
눈 깜짝할 사이에 퍼져나간 빛의 검날들!
놈들이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검날들은 그들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꾸에에엑!”
“쿠워어엉!
“끼에엑!”
사방에서 몬스터들의 단발마가 터져 나왔다.
빛이 번득일 때마다 몬스터가 죽어나갔다. 오른쪽 머리를 벨 필요도 없었다. 온몸이 조각나 버리니까.
잠시 후.
결계가 사라진 곳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오르트로스 시체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지영은 입을 떡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갈기갈기 찢어진 오르트로스들의 시체를 보니 대규가 왜 최대한 멀리 떨어지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처참했다. 만약 내가 저기 있었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이제 남은 오르트로스는 다섯 마리.
놈들은 방금 전의 공격을 보고 대규에게 쉽게 덤벼들지 못했다. 역시 서열 관계가 확실한 야수형 몬스터답게 대규의 강함에 압도되어 버렸다.
“크르릉…….”
하지만 동료들의 죽음에 감정이 격양된 것도 사실.
결국 놈들은 이판사판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오르트로스들을 모두 해치웠습니다.]
<두 번째 히든 미션의 보상을 얻기 위해선 탑의 마지막 층에 올라 케르베로스의 분신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조건: 두 번째 히든 미션을 완료한 자>
<수락하시면 탑의 마지막 층으로 가는 문이 열립니다.>
놈들을 모두 죽이자 바로 공략집이 떴다.
보스에 관한 정보였다.
케르베로스라면 대규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을 지킨다는 머리 셋 달린 개. 그게 뭐가 되었든, 대규는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대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지영이 몸을 일으켜 그를 따라왔다.
“어디가요? 모두 해치웠잖아요.”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올라가선 안 된다. 짐만 될 뿐이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히든 미션의 최종 보상은 둘이 나눌 수 없는 거니까.
단호한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영 씨는 여기에 있어요. 이 위에 있는 녀석은 정말로 위험한 놈입니다.”
그의 말에 지영은 걸음을 멈췄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대규가 고개를 끄덕이곤 마지막 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듬직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