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5화. 차원의 틈 (2)
대규는 구슬을 내밀며 물어봤다.
“설명에 알 수 없음, 이라고 나왔는데 이게 대체 뭡니까?”
그녀가 당황한 눈빛으로 구슬을 바라보았다.
저 여자도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
“이게 뭐냐고요?”
“저도 처음 보는 거라 알 수가 없네요.”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그녀는 표정을 원래대로 돌리곤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다음 설명으로 넘어가죠. 아이템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아까처럼 마음속으로 ‘창고’라고 생각하시면 허공에 개인 창고(inventory)가 보일 겁니다.”
무슨 소린가 싶으면서도 그녀의 말대로 창고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허공에 물품 보관함처럼 생긴 것들 열 칸이 보였다.
“이 창고 안에 아이템이나 물품들을 넣어 보관하면 됩니다. 포션의 경우 같은 종류는 한 칸에 10개까지 수납이 가능합니다.”
대규를 비롯한 사람들이 다들 선물 상자에서 얻은 아이템을 보관함에 넣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미션이 주어집니다.”
여자가 말을 마치자마자 대규의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미션 1: ‘차원의 틈’에서 타르타로스로 진입하는 포탈을 찾아라.]
[보상: 타르타로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등급의 선물 상자]
[제일 먼저 포탈을 통과하는 후보생에겐 추가로 보상이 더 주어집니다.]
“타르타로스로 진입하는 포탈을 찾아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종 목표. 포탈을 향해서 파티를 맺어서 가도 되고 혼자 가셔도 무방합니다. 그동안 가능한 한 강해지세요. 몬스터들과 싸워서 죽이면 레벨도 오르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최대한 많이 죽이고 강해지세요. 포탈을 넘어가는 순간 부활은 되지 않을 테니. 그럼 여러분들이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여자는 말을 마치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끝인가 싶은 순간 발밑의 마법진에서 눈부신 푸른빛이 촤악 뻗어 올랐다.
* * *
대규는 그의 가게 안에 서 있었다. 거대한 마법진은 온데간데없었고, 6명과 설명하던 여자도 사라져 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뭔가 가게가 평소와 달랐다. 모든 건 다 그대로인데 마치 흑백 사진처럼 잿빛으로 보였다.
‘불이 꺼져서 그런가?’
딸깍.
대규는 벽에 달린 스위치를 올렸다. 하지만 가게는 여전히 어두웠다.
정전?
초를 찾기 위해 카운터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은 텅 비어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도둑이라도 든 건가?
오늘 번 245만 원도 다 털린 거 아니야?
“내 매상!”
대규는 황급히 금고를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이 개 같은!”
그는 가게 문을 확인했다. 하지만 문은 분명 굳게 잠겨 있었고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맥이 탁 풀렸다. 그게 어떻게 번 돈인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설마 전부 꿈이었던 건가?”
차원의 틈인지 뭔지 하는 것도 그냥 술 먹고 잠드는 바람에 생긴 일인가?
혹시 포션을 먹은 것도, 245만 원의 매출을 올린 것도 전부 꿈이었던 걸까?
아니다. 그렇게 생생한 꿈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 창고. 그걸 확인해 보면 되겠지.’
대규는 자신이 선물로 지급받았던 아카나의 구슬을 떠올렸다.
그게 꿈이 아니라면, 창고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빛나는 구슬도 있겠지.
자신의 임기응변에 감탄하며 속으로 ‘창고’라고 외쳤다. 그러자 아까 보았던 개인 보관함이 눈앞에 좌르륵 떴다.
‘진짜다! 꿈이 아니었어.’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빛나는 아카나의 구슬을 꺼냈다. 어슴푸레 가게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을 잘 비출 수 있도록 구슬을 든 팔을 높게 쳐들고 주방 쪽으로 걸어가다가.
덜컹!
“으앗!”
의자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구슬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쨍!
헐! 이런, 젠장.
구슬이 깨져 버렸다. 선물로 받은 아이템을 받자마자 훼손하다니. 정말이지 운이 없어도 지지리도 없었다. 이거 진짜 좋은 아이템일 수도 있는 건데.
한숨을 푹 내쉬는 그 순간,
깨진 구슬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뭐, 뭐야, 이거?”
구슬에서 새어 나온 빛은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대규의 머리를 향해 몰아쳤다.
“으아아아!”
빛이 대규의 머리에 닿자마자 어마어마한 두통이 몰려왔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수많은 문자가 그의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대규의 눈앞엔 온갖 문자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극심한 몸살이 온 것처럼 온몸이 사정없이 떨려 왔다. 고막에는 이상한 고주파 괴음 같은 이명이 들려왔고.
“끄아악!”
대규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 귀를 막으며 소리를 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얼마 후 눈앞을 휘몰아치던 문자들이 사라졌고 이명과 두통도 잦아들었다. 온몸이 힘이 빠진 것처럼 나른해졌고 대규는 가게의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후우… 미친, 죽는 줄 알았네.”
몸은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가 이상했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마구 기억나기 시작했다. 아니, 기억이 난다기보다는… 새로운 정보들이 기록되고 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어느새 몸의 떨림이 멎은 상태였다.
대규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현실의 가게가 아니다. 현실처럼 보이지만 차원의 틈의 세계였다.
마법진이 있던 공간은 후보생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장소 같은 곳이었고, 이곳은 후보생들의 수련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튜토리얼 공간이었다. 되도록 후보생들이 살았던 현실 세계와 비슷하게 복원시켜 놓았지만 어쨌든 차원의 틈의 세계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런 걸 다 알고 있는 거지? 방금 전에 머릿속으로 들어온 빛의 영향인가?’
의문이 드는 순간, 대규의 앞에 이상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차원의 틈 공략집을 습득하였습니다.]
[영구적으로 운 수치가 +5 상승합니다.]
차원의 틈 공략집이라고?
대규는 바닥에 놓인 깨어진 구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구슬 이름도 아카나 구슬이었지. 뭔가 연관이 있는 건가?
그런데 운 수치가 상승했다니! 대규는 상태창을 황급히 불러 보았다.
김대규(후보생)
Lv.1(경험치 0.00%)
생명력 110/110
마나 0/80
근력 7
민첩 6
지능 6
운 3(+5)
권위 5
정말 상승했잖아! 그런데 운이 8이면 얼마나 높은 거지?
다음에 로또라도 한번 사 봐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새로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메시지창이다.
-차원의 틈 공략집-
<공략집의 지도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도……?”
대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갑자기 허공에 거대한 홀로그램창이 나타났다.
그것은 서울시 전체가 표시된 지도였으며 곳곳에 다양한 색의 점들이 찍혀 있었다.
우선 파란 점 일곱 곳과 노란 점 세 곳, 그리고 서울의 중심부 쪽에는 거대한 하얀색 원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지도 옆엔 점들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파란 점은 그를 포함한 7명의 후보생이 있는 위치다. 실제로 신촌의 뒷골목, 자신이 있는 위치에도 파란 점이 찍혀 있었다. 나머지 후보생들과는 다른 독특한 삼각형 모양이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노란색 물음표가 3개.
그곳은 히든 미션이 숨겨져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 가서 미션을 해치우면 타르타로스와 현실에서 유용하게 쓰일 아이템을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저 거대한 하얀색 원은 타르타로스로 이어지는 포탈.
하얀 원으로부터 작은 붉은 점들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붉은 점들은 순식간에 서울시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저 작은 점들의 정체는 바로…….
몬스터!
설명을 본 대규는 깜짝 놀라 외쳤다.
“미친, 몬스터라고?!”
영화나 게임에 나오는 그런 괴물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점들은 대규가 있는 곳 주변에도 몇 개가 보였다. 그럼 지금 가게 밖에 몬스터들이 배회하고 있단 말인가.
좀 전에 아이템으로 무기와 방어구를 받는 걸 보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진짜로 괴물들과 싸우고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미션을 수행해야 했다.
이 지도가 있다는 건 대규에게 상당히 유리하다. 다른 후보생들이 길을 헤매고 있을 때 제일 먼저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다행인 건 몬스터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모르는 히든 미션까지 수행하면서 포탈까지 몬스터와 싸우지 않고 피해 다니면서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다는 거지.
잠깐, 안전하게 피해서 가면 레벨 업을 할 수 없잖아.
정말로 몬스터와 싸워야 한다는 건가?
다시 다리가 떨려 온다. 갑자기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취소하고 현실로 되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돌아간다고 뭐가 달라지지?
당장 이달 말이면 그는 가게에서 쫓겨나 노숙자 신세가 된다. 현실에서 노숙자가 돼서 굶어 죽으나, 몬스터와 전투를 하다 죽으나 죽는 건 똑같다.
아니지, 여기선 죽어도 부활을 시켜 준다 했잖아. 그리고 보상도 얻을 수 있고. 안내인 여자는 분명 1년 안에 대규가 박 주부보다 더 유명해지고 성공할 거라고 했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 뒈질 거면 뭐라도 하다 뒤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나에겐 차원의 틈 공략집이 있다. 이 공략집을 이용해서 한 마리씩 차근차근 해치워 나간다면 미션을 잘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적응해야 될 필요가 있다.
그는 주방으로 뛰어가 열심히 물건들을 살폈다. 몬스터와 정말 전투를 한다면, 이중에서 가장 위협적으로 보이는,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아야 할 테니까.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칼 한 자루.
비싸게 주고 산 요리 칼이었다. 자신의 롤 모델인 박 주부가 쓰는 칼이라고 해서 야심차게 장만한 ‘브라이또(Brieto) M1186 중화클리빙 나이프’!
무려 가격이 30만 원에 육박하는 이 칼을 질렀다. 자신이 존경하는 박 주부처럼 되겠다는 일념으로!
칼을 쥐고 나오려는데 뭔가 허전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재료들을 볶을 수 있는 팬인 웍(wok) 여러 개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그 대딩 녀석은 간지 나는 갑옷을 지급받았지. 나도 방어구가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을까?
대규는 주방에 쌓여 있는 여러 개의 웍들 중에서 가장 튼튼해 보이는 웍을 꺼내 왼손에 쥐었다. 그건 재료들을 볶을 수 있는 손잡이가 달린 32cm 웍이었다. 3~4인분의 재료는 거뜬히 볶을 수 있으며 티타늄으로 만들어져 가볍고 내구도 역시 훌륭했다.
칼과 웍을 손에 쥐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티타늄 웍(32cm)]
[3~4인분의 재료를 충분히 볶을 수 있는 고급 티타늄 웍. 요리뿐만 아니라 방어에도 요긴함.]
[브라이또(Brieto) M1186 중화클리빙 나이프]
[어떤 재료도 잘라버리는 절삭력 좋은 중식 칼. 날카로운 칼날은 고기들을 다 썰어 버림.]
이제 시간이 없었다. 3개의 히든 미션까지 클리어하면서 타르타로스의 포탈로 가야 했다. 심호흡을 한 뒤 지도를 보았다.
몬스터의 위치를 나타내는 작은 점 하나가 그가 있는 곳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대규는 가게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 사이로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헉!”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몬스터의 모습은 몹시 괴상했다.
그것은 1미터 정도의 키에 몸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이마 한가운데에는 붉은 외눈박이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놀라서 얼른 문을 닫아 버렸다.
빌어먹을, 생각보다 훨씬 무섭게 생겼잖아.
‘저놈을 잡기는커녕 잡아먹히지 않으면 다행이다.’
저런 거랑 싸우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칼을 쥔 손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때 차원의 틈 공략집의 창이 떴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미니 키클롭스(mini cyclops)
보상: 약간의 경험치와 마나, 낮은 확률로 포션이나 아이템 드롭
특징: 타르타로스에 있는 거인 키클롭스족의 하급 몬스터.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힘이 세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 적에게 미친 듯이 달려든다.
<미니 키클롭스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미니 키클롭스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미니 키클롭스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미니 키클롭스는 외눈박이기 때문에 원근감을 인지하는 능력과 시력이 낮습니다. 따라서 공격의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면 헛손질을 많이 합니다. 때를 노려 뒷목을 공격하면 쉽게 해치울 수 있습니다.>
지도뿐만 아니라 이런 것도 뜨다니.
저 괴물의 이름이 미니 키클롭스라는 것 같았다. 정말 저 공략창의 정보대로 싸운다면 녀석을 잡을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여기서 계속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미션을 달성하려면 몬스터와의 전투를 피할 수만은 없다. 공략집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저걸 달달 외워서라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공략집의 내용을 몇 번이고 되뇐 뒤 가게 문을 살며시 열었다.
중식 칼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