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화. 북궁(北宮)
제3차 제국 최고회의가 후금의 합비에서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대한제국의 제후국 군왕들만이 아니라 제1차 유라시아 전쟁 결과 조선의 속국이 된 에스파냐의 국왕과 리투아니아의 대공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광해는 의류와 신발, 가죽 제품 등에 대한 제조업을 제후국들로 이전하는 대한제국 산업 분장 조정을 발표했다.
각 제후국 군왕들은 그 산업들을 자국으로 유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 결과 지루한 회의를 거쳐 의류는 명이, 신발은 후금이, 가죽 제품은 할하가 차지했다.
제후국 국력순위 1위부터 3위까지가 차지한 셈이었다. 대신 해당 제품의 증산 범위만큼의 원자재 생산량 증가분은 준가르와 위구르, 북원이 가져갔다.
카자흐가 다양한 지하자원이 매설된 자원 부국임을 알고 있던 태왕의 특명에 따라 지하자원 개발국으로 선정되어 장원의 기술자들과 개척조가 파견되어 본격적인 지하자원 개발에 나서기로 했다.
대월의 북부로까지 영토를 확대한 남진에는 식량생산 확대가 주어졌다. 그간 조선이 맡고 있던 대규모 식량생산 기지의 일익을 이젠 남진이 일부 나누어 맡게 된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산업기반의 변경과 분할이 이번 최고회의의 주 논의 대상이었다.
그 외 부수적으로 비행선을 통해 조선을 오갔던 경험을 한 군왕들의 요청으로 광해가 제후국을 잇는 비행선 노선을 만들기로 했다.
그것은 리투아니아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항공 교통망이 건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창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은 후금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합비의 경비를 강화한 덕인지 보름에 걸친 긴 회의는 별다른 불상사 없이 잘 마무리 되었다.
회의가 끝난 직후 제후국 및 속국의 군왕들은 조선이 마련해준 비행선 편으로 각자 자국으로 돌아갔다.
속국의 군왕들에겐 선택의 자유가 없었지만 제후국 군왕들의 경우엔 비행선의 위험성을 알리고 귀환 경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지만 모든 제후국 군왕들은 비행선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약세를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진짜 편리성을 우선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모든 제후국들에 조선 비행선의 우수함을 알리는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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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회의에서 돌아온 광해가 북미 점령 작전의 종료를 기해 각 대양군 사령관 인사를 단행했다.
대서양군 사령관이었던 이억기에게 조선군 중 가장 대규모 군세를 자랑하는 태평양군 사령관을 제수했다. 그로인해 비게 된 대서양군 사령관에 김경서가 임명되었다.
정왜전쟁에서 고위무장으로 활약했던 무장들 중 유일하게 현역에 남아있던 김시민에게 인도양군 사령관이 제수되었다.
올해 64살의 노장이 된 김시민은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듯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태왕의 명을 받고 인도양 사령부가 설치된 마드라스로 떠났다.
이미 상장군이었던 이억기와 달리 대장군이었던 김경서와 김시민은 상장군으로 승차한 인사였다. 이로써 조선에는 삼군 총사들을 포함해 6명의 상장군이 존재하게 되었다.
승차가 주어지지 않은 이억기에겐 대신 조선 최고 무공훈장인 삼족오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대서양군을 잘 이끌어 북미 점령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한 것에 대한 포상이었다. 이억기는 정왜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순신이 받은 이후, 두 번째로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그것에 이억기가 무한한 영광으로 삼았다.
얼마 전에 영면에 든 신립과 곽재우에겐 이화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조선의 훈장 서열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 훈장을 탄 첫 사례였다.
그 외 각 전쟁에서 활약했던 장병들에게 그 공로에 따라 다양한 훈포장이 수여되었다.
논공행상이 마무리 된 직후 태평양군 사령부에 광해의 특명이 떨어졌다. 그간 미루어두었던 호주와 뉴질랜드에 대한 점령 작전의 개시였다.
대서양군을 이끌고 북미 점령 작전을 성공리에 마무리 지었던 이억기의 능력을 믿고 내린 광해의 명령이었다.
태평양군 사령부가 위치한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태왕의 명령을 받은 이억기가 곧바로 점령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태평양군 사령부는 휘하에 조선본토 출신 육군병력으로 구성된 서미도 병단과 조선본토 출신 해병대 병력으로 구성된 웅다 여단, 북미 원주민들로 구성된 3개 병단급 육군과 하와이 원주민들로 구성된 2개 단급의 해병대, 그리고 대만도 각지에 분산 주둔 중인 대만 여단을 두고 있었다.
대만 여단은 각 주둔지의 현지인들로 구성된 해병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대만 현지인들로 구성된 2개 단과 유구인들로 구성된 1개 단, 포라중 현지인들로 구성된 1개 단, 그리고 사라왁 현지인들로 구성된 1개 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억기는 이중에서 대만 여단 소속 대만 제1 산악단과 하와이 제2해병 단, 그리고 북미 제3병단을 동원했다.
조선 본토 출신 병력으로 구성된 웅다 여단과 서미도 병단이 가장 전투력이 좋았지만 그들은 웅다반도를 비롯해 서미도 전역에 대한 분산 방어 작전의 수행만으로도 벅차서 차출이 불가능했다.
해당 부대가 보유한 병력에 비해 워낙 넓은 구역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이다.
투입할 지상군이 선정되자 이억기는 곧바로 해군 총사부로 수송함대의 동원을 요청했다.
해군 총사부는 태평양군 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즉각 13수송함대를 급파했다.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30척으로 구성된 13함대가 대만과 하와이로 분산되어 병력과 장비를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이 수송함대의 호위를 위해 태평양 함대 소속 하와이 증파전대와 포라중 전대의 일부 함선들이 투입되었다.
점령 작전이 시작된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렇다 할 해군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규모 함대의 동원은 생략되었다.
대만 제1산악 단이 뉴질랜드로 상륙하고, 하와이 제2해병 단은 호주로 상륙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북미 제3병단이 7개 단과 3개 단으로 나뉘어 각기 호주와 뉴질랜드에 추가 상륙했다.
훈련은 조선식으로 제대로 받은 병력이었지만 경험이 부족한 이 세 부대가 작전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오히려 그 출신 성향들이 더 좋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군의 점령 작전으로 원주민 입장에서 자신들이 겪었던 혼란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현지인 출신 장병들이 호주와 뉴질랜드 원주민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잘 설득했던 것이다.
물론 설득이 먹히지 않은 몇몇 부족과는 전투도 벌였다.
제후국 군대가 아니라 조선군으로써 다총과 삼포로 무장한 병력에 조잡한 목궁과 창칼로 대항한 원주민들의 피해가 컸다.
협조엔 당근을, 대항엔 무자비한 살육으로 응답한다는 조선군의 기조는 해외 영토 현지인들로 구성된 부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특히 북미 원주민 특유의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는 북미 3병단 병사들의 돌파력이 오히려 해병대 병력으로 구성된 하와이 제2해병 단보다 거칠고 과감할 정도였다.
그렇게 현지인 부대들이 충실히 작전에 임한 덕인지 호주와 뉴질랜드에 대한 점령 작전은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어 갔다.
거의 3년이 넘게 걸렸던 북미 원정과 달리 뉴질랜드는 1년, 호주는 2년 만에 원정이 마무리되었다.
광해가 이 두 땅을 호주도로 삼고, 조선 백성들의 이주를 단행했다. 아울러 현지인들에게 허락된 호주부족 연합과 뉴질랜드 연맹에 각기 제후국 지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두 현지인 국가들은 워낙 낙후된 문화 탓에 당장 제후국으로써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조선은 원주민 고유의 문화를 지키겠다고 나선 부족과 개발에 동참하겠다고 나선 부족들을 분리해서 대응하는 정책을 펼쳤다.
고유문화를 지키겠다고 나선 부족들의 거주지는 보호구역으로 설정하여 지정된 교류마을 외에는 접근을 가능한 차단했다.
외부의 문화의 접촉을 가능한 차단해 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다만 그렇게 보호하기는 하되 교류는 이어가야 한다는 조건에 따라 원주민들은 교류 마을에 들려 의무적으로 교역에 응해야 했다.
물론 그와 같은 원주민 보호구역은 조선의 영토가 아니라 호주부족 연합과 뉴질랜드 연맹의 부속 관할지로 관리되었다.
호주부족 연합과 뉴질랜드 연맹의 중추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개발에 동참하기로 한 부족들에겐 대한제국 차원에서 대량의 자원과 비용이 투입되었다.
이런 대량 투자에 제후국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제후국들도 이미 이러한 개척 사업이 시장의 확대를 가져오고 결국 자신들의 이익 확대에 기여한다는 것을 경험한 후였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호주와 뉴질랜드의 제후국 개발에 투입되는 자금 중 절반가량은 제후국들에서 걷힌 세금에서 충당되고 있었다.
점령 작전 시점부터 다양한 전염병의 창궐에 대비한 덕에 원주민들에 대한 각종 예방 접종이 실시되어 실제 역사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원주민들의 대규모 질병 사망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조선에 협조를 거부한 부족들 중에서 홍역과 수두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해서 많은 이들이 죽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본 다른 부족들이 오히려 조선군에 협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들이 생기지 않게 도와준다는 조선군의 이야기에 상당수의 부족들이 협조해온 까닭이었다.
그로인해 가장 걱정했던 질병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점을 찾았지만 정작 호주와 뉴질랜드 점령군이 가장 큰 고역을 겪었던 것은 의사소통 문제였다. 원주민들 사이에 사용되는 언어가 수백 가지도 넘었기 때문이다.
때론 원주민들끼리도 소통이 불가능해서 설득을 해나가는데 상당히 고전해야만 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점령군이 작전 중에도, 또 작전이 종료된 후에도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소통을 위한 언어교육이었다.
당연히 공용어는 조선어가 선택되었다.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철산학당의 지원을 얻어 부족마다 학당을 세웠다.
이것은 순전히 조선의 글과 조선의 말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학당이라 불렸다. 호주와 뉴질랜드 부족들의 마을마다 이 어학당이 들어섰고, 훈장들이 파견되었다.
깊은 학식을 요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초기엔 점령군 병사들이 주로 활용되었고, 작전이 종료된 후에는 중학당 졸업 이상의 자격이 있는 이주민들을 호주도 감영이 고용하여 운용했다.
이렇게 호주와 뉴질랜드의 점령이 마무리되면서 조선은 함경, 평안, 황해, 강원, 경기, 충청, 전라, 경상의 본토8도, 남간도, 서간도, 북간도, 동간도의 만주4도, 하북, 산동, 강소의 서부3도, 구주, 사국, 북해, 나고야의 해외 4도, 그리고 대만도, 녹주도, 남포르투갈도, 북미도, 서미도, 호주도의 원해7도에다가 독일의 함부르크와 러시아의 상태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일원의 영토를 보유하는 세계 영토를 거느린 대국이 되었다.
죄인들의 땅이라 불리는 동일본은 여전히 태자의 개인 봉지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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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22년, 서기 1624년. 광해가 상황으로 물러나며 태자에게 양위하였다. 이로 인해 태자 호가 조선의 16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태왕을 호칭으로 삼는 조선의 왕으로는 두 번째였고, 대한제국의 황제로도 2대 째였다.
이것으로 조선에 살아서 황위를 잇는 전통이 생긴 시점이었다.
광해의 나이 50, 태자 호의 나이 21살의 일이었다.
새로 황위에 오른 호는 연호를 ‘대한(大韓)’이라 지었다. 그것으로 대한제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광무를 연호로 썼던 광해의 시대가 저물어갔다.
상황으로 물러난 광해는 연호에 빗대어 광무제라 불렸다. 그는 태왕이 조언을 구하는 일이 아니면 국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이미 내정의 일은 백성들의 손에 의해 뽑힌 총리와 대신들에 의해 운용되었고, 군권을 움켜 쥔 태왕은 외교에만 간섭했다.
물론 원한다면 내정에도 얼마든지 태왕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경향은 줄어들 것이라고 광무제는 생각했다.
대한1년, 서기로는 1625년. 광무제가 먼저 떠난 황후의 묘역이 있던 화릉 인근에 작은 궁을 지어 황궁을 떠나 살기 시작했다. 태왕의 만류가 있었지만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을 수 없다는 말로 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광해가 황궁을 나왔다.
사람들은 이 궁을 북궁, 또는 상황궁이라 불렀다. 향후 조선의 상황들이 모두 황궁을 물러나와 이곳에 기거하게 된 시초가 된 셈이었다.
광무제는 이곳에 기거하면서 화원을 가꾸고, 죽은 황후를 추억하며 조용히 여생을 지냈다.
수많은 전쟁을 지휘하며 조선을 세계 제국으로 키워낸 철혈의 황제이자 혈황이라 불렸던 정복군주의 이 조용한 칩거는 온 조선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