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화. 시전(市廛)거리의 총성
조선은 다민족 국가다. 수많은 민족이 어울려 ‘조선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한없이 자랑스러운 그 이름이 간혹 누군가에겐 한없이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제 23살의 타츠오라는 청년이 그랬다.
한때는 서남도였지만 지금은 다시 주고쿠라 불리는 열도 땅의 시모노세키에서 태어난 타츠오는 상인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15년 전에 조선으로 이주 했다.
처음엔 부산포에서 살았고, 몇 년 후엔 한성에서 살다가 천도 때 태왕을 따라 신의주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능력이 있었는지 장사를 제법 크게 확장한 덕에 어려움 없이 자랐다.
아버지는 자신이 크게 성공한 것이 태왕 덕이라며 칭송하기 바빴지만 타츠오가 보기에 조선의 태왕은 무고한 이들의 생명을 취하고 피를 뿌려 자신의 권좌를 지킨 희대의 폭군이었다.
지금도 주고쿠와 간사이 지역은 태왕의 압제로 신음한다. 그 지명까지 잃어버린 동일본은 죄인들의 땅이라 불리며 각종 제약들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타츠오는 그런 모든 일들이 태왕의 독단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타츠오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넓게 세상 보기’라는 모임에 가입한 뒤였다. 일종의 사회독서 모임 중 하나였던 이 조직은 사실상 반황실, 반조선 조직이었다.
많은 이들이 동일본 출신이었지만 절반가량은 다른 지역 출신들로 채워져 있었다. 개중에는 심지어 조선 본토인들도 섞여 있었다.
서로의 신분을 캐지 않는다는 특이한 조직문화 때문에 상대가 하는 일, 거주지 등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넓게 세상 보기’라는 조직을 더 비밀리에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 당시 조선의 정보기관은 사간원의 감찰과와 어사대의 정보수집대, 포도청에서 운영하는 기밀수사대정도였다.
기관의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이 3곳의 정보기관들은 모두 비리와 범죄에 관련된 정보에 그 능력이 집중 되어 있었다.
이 당시 조선의 법제상 반황실도 범죄, 반조선도 범죄였다.
문제는 반황실, 반조선의 방법이었다. 태왕을 비난하고, 조선 조정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었다. 광해가 조선의 언로에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태왕을 욕할 수 있었다. 심지어 네 귀퉁이에 이화문양이 그려져 있고, 중심의 둥근 태양 안에 날개를 펴고 있는 삼족오가 그려져 있는 조선의 국기, 이화삼족오기를 불태우는 행위조차 처벌하지 않는다.
국기를 불태워 나라에 항거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까지 백성들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광해는 이 시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자유를 조선의 백성들에게 부여했다. 이주도 자유, 종교도 자유, 나라 선택조차 자유다.
물론 나라선택의 자유는 이민을 나가는 것에 국한된다. 조선인으로 다시 돌아오거나 외국인이 조선인이 되는 절차는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지 황실을 비난하고, 조선의 행동에 반대한다고 범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버젓이 넓게 세상 보기와 같은 반정부 집단이 활동할 수 있는 이유였다.
이들은 여러 가지 반정부 서적을 중심으로 읽고 의견을 교류하며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나 황실, 나아가 태왕의 잘못을 성토한다.
오스만 전역과 모스크바에서 벌어졌던 일을 학살이라 규정하고 시위를 주도한 것도 바로 이 넓게 세상 보기라는 모임이었다.
포도청 기밀수사대가 확보하고 있는 반정부 조직의 수가 조선 전역에 물경 37개에 이른다. 모스크바 폭격 사실이 알려진 직후, 수천 명이 상경하여 황궁 앞에서 학살 반대시위를 벌였던 것도 이들이 연계하여 벌인 일이었다.
당시 신의주 좌포청은 시위자들의 질서유지에만 나섰을 뿐 그들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단지 구호만 외친다고 잡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시위대가 황궁 앞 대로를 점령해서 시위를 벌인 탓에 교통에 큰 방해가 발생했고, 그로인해 사람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처벌할 마땅한 법이 없었다. 교통법규가 있긴 했지만 황실과 조정에 반대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부여된 권리였기 때문이다.
하긴 이 일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 사람들 누구도 이런 시위가, 그것도 황궁 앞에서 벌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 당시 벌어졌던 시위를 태자가 굉장히 기분나빠했다. 태왕의 덕으로 잘 먹고 잘 사는 백성들이 감히 태왕의 면전에서 모욕을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태자에게 광해가 전한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저들의 손으로 일해서 저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가 얻어먹고 사는 것이다. 저들에겐 우릴 비난할 자격이 있고, 우린 그것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음이다. 잊지 말아라. 나와 너는 저들의 지배자가 아니라 저들을 태운 수레를 끄는 소이고, 말임을.”
“하면 저들의 망종을 그냥 보아 넘기라는 말씀이십니까?”
“어찌 그냥 넘길까? 귀 담아 듣고, 이 아비의, 또 너의 지난 발길을 돌아봐야겠지. 조선이라는 수레를 끄는 우리의 발 디딤 하나로 수레의 방향이 잘못되면 의당 수레에 타고 있는 이들이 코뚜레를 잡아당기는 법이다. 잘 못 가고 있노라고 말이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노여워 할 것도, 분해 할 것도 없다.”
“하면 저들의 말대로 움직여야 한단 말이옵니까?
“생각해야 한다. 고심해야 한다. 저들의 말이 옳은지, 이 아비와 네 생각이 옳은지. 그래도 모르겠거든 주변의 대신들에게 묻고, 그래도 답이 없거든 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생각을 엿보고, 그들의 생활을 지켜보아야 한단다. 이 아비와 선황들이 밀행을 나갔던 것은 그저 놀기 위함이 아니었음이니.”
그 날 이후, 태자의 밀행이 잦았다. 그것을 광해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광해는 태자의 치세가 자신의 세상보다 훨씬 넓고 안정적이길 바랬다. 그리하여 후대에 태자가 조선을 반석위에 올려둔 성군으로 기록되길 바라고 또 바라마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길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황후가 승하한 이후 잠시 주춤했던 것을 버리고 다시금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취해서라도 조선을 굳건히 세우려 노력했던 것은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다.
적어도 태자의 치세에서는 감히 조선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이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
태자는 동궁전 장번내시인 상호와 태자익위사(太子翊衛司 : 태자 경호대) 둘만을 대동하고 밀행을 나왔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주워듣고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되지만 시전((市廛 : 일종의 시장)에 있는 주막에 앉아 들고나는 이들의 말을 듣는 것이 가장 다양하고 넓은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점심 식사도 할 겸 태자와 일행이 신의주 동문 시전에 있는 한 주막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자에게 백성들의 생각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당장 자신이 밀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인 모스크바 폭격만 해도 그랬다.
잘 죽였다고, 감히 조선에 총칼을 들이댄 이들이니 의당 그리했어야 했다는 이들이 있는 반면, 잘못된 일이라고 침을 튀겨가며 황실의 결정을 비난하는 백성들도 있었다.
전자가 황실에 충성스러운 백성들이고, 후자가 역적이다 싶다가도 쌀값 인상 문제 하나를 가지고 그 상황이 뒤바뀌기도 했다.
후자를 주장했던 이들이 황실의 쌀값 인상이 날씨가 여상치 않으니 대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옹호하는가 하면 모스크바 폭격을 지지했던 백성들이 태왕이 제배 불리려고 없는 백성들 거 알겨먹으려는 짓거리라고 원색적인 비방을 퍼붓기도 했다.
시전 좌판이나 주막에 앉아 그런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누가 충신이고, 누가 역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때때론 자기들끼리 의견충돌을 보이다 열이 올라 삿대질이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백성들이 간간히 생긴다.
그렇게 와락 싸움까지 붙었다가도 주변에서 뜯어말리고, 탁주 몇 사발 돌아가면 또 언제 그랬냐 싶게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고 논다.
그런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백성들이 참······. 역동적으로 산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알고자 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바람에 휩쓸리는 갈대와 같아서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것도 알았다.
처음엔 지조가 없다고 생각했다.
굳은 의지와 강인한 믿음이 있다면 흔들 릴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단순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태자 호는 느껴가고 있었다.
지금도 신의주 여기저기 붙어있는 황실 비방 벽보를 가지고 태왕이 잘못하긴 했다는 이들과 뭘 잘못했냐고 따지고 드는 이들끼리 대판 붙었다.
며칠 전만해도 태왕은 하늘이 내린 신인이라 모든 것이 옳다고 주장했던 사내가 태왕이 잘못했다고 말한 이들 속에 섞여 있다는 것에 태자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자는 일전에 부황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백성만이 아니라 사람이 누구나 같다. 내게 이로운 일이면 달고, 내게 이롭지 않으면 쓰다. 쓴 걸 억지로 먹이려드는 이가 어찌 고와 보일까? 아빠가 돌아가신 네 엄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그런 아빠도 네 엄마가 취두부를 해줄 때마다 얼마나 미웠는지. 세상이 그런 법이다.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일이 미운 것이니까.”
그 말을 해준 부황이 그날 수라간에 취두부를 구해오라 명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태자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조선에 여러 민족이 얽히고 살면서 조선 각지는 물론이고 제후국의 유명한 음식들도 황도인 신의주의 시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취두부도 있었다.
승하한 모후 덕에 어렸을 때부터 먹어서인지 태자는 취두부도 잘 먹었다.
유난히 모후가 해주던 음식을 좋아했던 부황 때문에 모후는 수라간에서 음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 모후가 가장 잘한다고 자부했던 것이 취두부였다.
솔직히 명나라의 공주가 요리를 해본 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다보니 요리를 배워야 했던 모후가 요리선생으로 삼은 상대가 명나라에서부터 따라온 시녀였고, 그 시녀가 가장 잘 하는 요리가 취두부였던 탓이다.
태자가 보기에 부황은 취두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젓가락이 갈 때마다 부들부들 떠는 부황의 손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부황은 잘 먹었다. 맛있다며 모후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덕에 부황은 입에 맞지도 않는 취두부를 거의 보름에 한 번씩은 먹어야 했지만.
생각이 그것에 이르다보니 승하한 모후가 그리웠다. 취두부를 사먹을 걸 그랬나 싶던 차에 주문한 국밥이 나왔다.
그 구수한 냄새에 언제 취두부를 생각했나 싶게 태자는 국밥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취두부를 먹는 것에서도 알겠지만 태자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부황인 광해가 태자를 데리고 밀행을 나와 시전의 이런저런 잡다한 음식을 사서 함께 먹은 덕이다.
내장으로 끓인 내장국밥은 없어서 못 먹는다. 소피를 굳혀 만든 선지로 끓인 선지국밥도 태자가 좋아하는 음식들 중 하나다.
태자비와도 가끔 밀행을 함께 나오는데 처음 밀행을 나와서 국밥을 먹었을 땐 온갖 내장으로 끓인 국밥을 맛있게 먹는 태자를 신기하게 바라봤을 정도였다.
그날 태자비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예의상 한 숟가락 떴지만 그것조차 반도 못 먹었으니까.
하지만 태자가 밀행을 함께 나가자고 하면 태자비는 군말 없이 따랐다. 비밀 여행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다면서 말이다.
그런 일이 하루 이틀, 늘어가면서 요샌 태자비가 더 잘 먹는다. 특히 태자비는 머리고기를 좋아했다. 야들야들해서 좋다면서.
오늘도 함께 나올 걸 괜히 두고 나왔나 싶었던 그 때였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져 고개를 들어 시선을 돌린 태자의 시야로 자신과 함께 국밥을 먹다말고 갑자기 뛰어나가는 익위사 둘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상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저만치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총을 들고 있는 모습도.
탕!
시전 저자거리에 총성이 울렸다.
태자가 한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들 속에서 느닷없이 총을 꺼내든 청년을 먼저 발견했던 상호가 몸을 날려 태자를 보호하려 했지만 늦었다.
익위사 둘이 자리를 박차고 나섰지만 그들도 총이 발사되는 시점을 막지 못했다.
놀란 사람들의 신고로 출동한 좌포청 포교들의 도움으로 태자는 곧바로 신의주 황립 조선종합병원으로 긴급히 수송되었다.
내금위 소속 익위사 14명 전원이 소집되어 수술실을 차단했고, 내금위에서 5백여 명이 긴급 출동해 수술실과 병실이 있는 층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
신의주 좌포청 소속 포교와 포졸 2백 명이 출동해 병원의 출입을 통제하고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내금위에 1급 비상사태가 발령되면서 완전 중무장한 내금위 위사들에 의해 황궁이 특급 경계상태로 들어갔다.
황도방위부대였던 11장갑병단이 외국으로 출정 상태인 상황에서 벌어진 이 일로 인해 14개마돌격병단에 긴급 전개 명령이 떨어졌다.
함경도 일원에 분산 배치되어 있던 14개마돌격 병단이 일제히 황도인 신의주로 몰려들었다.
태자의 피격 소식을 들은 태자비가 혼절하고, 태왕이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태자 호의 나이 15, 광해의 나이 43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