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321화 (321/325)

제321화. 서기1617년 조선

광무 16년, 서기로는 1617년이 밝았다. 유라시아 전쟁이 끝난 직후 밝은 새해는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점령 전쟁이 북미에서 벌어지고 있다지만 사실상 전투는 그리 많이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속도가 늦었던 것은 가능한 원주민들과 마찰보다는 설득으로 점령을 진행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막바지에 와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올해 중반이면 북미 점령전도 끝이 난다. 이미 점령이 완료된 지역에 대해서는 원주민의 영토와 조선, 그리고 제후국들에게 분할 될 영토가 확정되어 있었다.

그 영토에 투입될 병력과 인원, 장비들을 마련하느라 새해 벽두부터 조선을 비롯해 대한제국 제후국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5년마다 열리기로 되어 있던 대한제국 최고회의는 2회까지 열렸다. 사실 3회는 작년에 열렸어야 하지만 전쟁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미루어졌다.

대한제국 성립 시 한성에서 개최되었던 1회를 제외하고는 제 시간에 열린 적이 없는 셈이었다. 명의 남창에서 열린 2회 때에도 전쟁으로 뒤로 밀려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광해는 3회 제국 최고회의를 오는 5월1일 후금의 왕도인 합비에서 개최하겠다는 의중을 제후국들에 통보했다.

지난 동일본 사태와 일련의 열도 반란 사태를 겪으면서 조선의 제후국에서 동일본이 탈락하고, 나고야는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현재 대한제국의 제후국은 명, 후금, 남진, 북원, 할하, 준가르, 위구르, 티베트, 카자흐, 북미 연합국의 10개 나라였다.

이번 회의에 처음 북미연합국의 대표에게도 참석하도록 황명이 떨어졌다.

그것을 위해 광해는 비행선을 보내주기로 했다. 다른 제후국들에게도 원한다면 비행선을 보내주겠노라고 제의했다.

물론 비행선의 위험도를 충분히 설명해서 육로와 비행선 이동을 제후국의 군왕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후금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비롯해 다수의 제후국 군왕들이 방문하는 것에 맞춰 대대적인 경비체계의 점검을 시작했다.

과거 2회 제국 최고회의가 개최되었던 명나라의 남창에서 벌어졌던 것과 불온한 이들의 준동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후금은 합비로 자그마치 3만의 병력을 불러들여 성을 이중 삼중으로 감싸는 경비체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개최가 통보된 직후부터 연습과 훈련에 들어갔다.

광해는 조선의 태왕이자 대한제국 황제의 자격으로 조선의 속국이 된 에스파냐의 왕과 리투아니아의 대공에게도 참석하도록 명했다.

이들에겐 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참석하여 대한제국의 힘과 권위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을 뿐이다.

자칫 조선의 힘과 권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용도로만 사용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두 나라는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비행선을 제외한 교통수단의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끌려가듯 가야 했던 두 나라 정상을 나머지 유럽국가의 군왕들이 비웃었다. 적어도 자신들은 자주국의 지위를 지켰다는 얄팍한 자만심 같은 것이었다.

유럽의 두 나라가 그런 주변국의 시선에 시무룩해져있었던 시기, 처음 대한제국 최고회의 참석을 명령받은 북미 연합국은 대표를 뽑는 일로 연일 소란스러웠다.

모두가 자신들의 부족이 우월하다고 주장했고, 북미 연합을 대표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 소란스러움은 교통수단이 비행선, 그러니까 하늘을 날아서 조선까지 가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 완전히 사라졌다.

각 부족의 추장들은 상대가 더 위대하고, 존경받을 사람이라고 추켜세우기 바빴다. 아직 신무물에 대한 배움이 많지 않았던 북미 원주민들 하늘을 날아간다는 말을 죽는다는 것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요즘 북미 연합국에 속한 원주민들 사이에서 조선이 하늘 위에 있는 나라이고, 그 나라의 왕은 신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다 헛소리고 그냥 자신들을 겁주기 위해서 하늘을 난다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원주민 부족도 있었다.

결국 북미 연합국의 대표는 그런 부족들 중 한곳의 추장이 선출되었다.

북미의 남서부 지역에 주로 살던 나바호 부족 중 하나였던 이들의 지도자는 나크 야지라는 이름의 추장이었다. 그는 자신들의 성지인 암석들의 계곡에서 신께 제를 올림으로써 자신이 북미 원주민들의 대표가 되었음을 알리고 축복을 기원했다.

모계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원주민들 중에서도 여자를 경제의 중심으로 삼는 나바호족의 사내는 용맹한 전사이자 능숙한 사냥꾼이었다.

아직 몇 달이나 남았다는 북미연합국에 개설된 조선 사무국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북미연합국 초대 총추장으로 선출된 나크 야지는 부족 특유의 전사 복장으로 자신들의 성지라 여겨지는 암석들의 계곡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일로 북미 연합국 원주민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북미 원주민들이 토템이즘과 근거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전통에 너무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철산 학당을 중심으로 북미 연합국에 대한 교육기관 설립 방안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여전히 조선은 북미를 개척 및 개발할 여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곳에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조선이 영유권을 확보한 함부르크를 비롯한 독일 지역의 도시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대의 러시아 도시들에 대한 개척 및 개발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자금부족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해당 도시들은 대서양군에서 파견한 일부 병력이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다.

사실 조선의 황실 상단들이 벌어들이는 금액은 천문학적이다. 매일같이 ‘헉’소리가 날만큼 많은 금괴들이 소득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그만큼의 금괴들이 다시금 각종 명목의 지출로 빠져나간다. 요사이 내탕금을 관리하는 환관들 사이에서는 금괴들이 내탕금 금고를 스쳐지나간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현대시대 직장인들의 통장을 월급이 스쳐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소득과 지출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막대한 지출은 대부분 철도 부설 등 각종 기간시설 공사비용으로 투입되고 있었다.

특히 준가르의 왕도인 우르무치(乌鲁木齐市, 오로목제시)에서 시작해 카자흐의 왕도인 누르술탄을 거쳐 카자흐의 서남부 끝자락 도시인 코타예바카까지 이어지는 철도의 부설 공사에 막대한 비용이 들고 있었다.

카자흐 선이라 명명된 이 철도는 총연장이 8천1백리(약3,181km)에 달한다. 이 구간에 복선으로 철도를 부설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조선이 최근 지출하고 있는 내탕금의 1할을 차지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 공사였지만 인건비는 모두 카자흐가 부담했다. 그럼에도 워낙 부수적인 공사가 많아서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인건비를 모두 부담하기로 한 카자흐는 이 공사에 자그마치 27만 명을 동시에 투입해두고 있을 정도로 공사의 규모는 컸다.

이 대규모 공사인원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조선의 방식이 아닌 카자흐의 방식에 맞춰 지급되었다. 만일 조선의 방식으로 임금을 지급했다면 소요되는 비용은 지금 들어가는 자금의 몇 배가 들어갔을 터였다.

이 공사에 맞춰 현재 유럽 내 조선 및 대한제국의 모든 영토를 통할하는 리스본 총독부가 새해 들어 흑해에 접한 로스토프에서 카자흐선의 종착지인 코타예바까지 연결하는 철도 부설공사를 시작했다.

조선은 그 건설비용으로도 막대한 지출을 시작한 상태였다.

조선 황실로 막대한 부가 쌓이듯이 조선 백성들에게도 상당한 재물이 풀어졌다. 조선 왕실의 소득 분배원칙에 따라 상당량의 재물이 ‘성과급’이란 명목으로 왕실 상단에 근무하는 조선인들에게 배분되었기 때문이다.

세상 그 어디의 백성들보다 많은 소득을 올리는 조선인들이었다.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던 이야기는 노인들과 장년층의 소위 ‘나 때는’으로 시작되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각 상단마다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디든 막대한 이익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 상단들은 소득의 재분배에 맞추어 가격조정을 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든, 상단의 서기로 있든 성과급에 큰 차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작은 차이는 있었다.

가장 큰 이득을 벌어들이고 있는 상단은 여전히 철산 제철단지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의 성과급이 가장 적게 받는 이들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시기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철산 제철단지의 근로자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을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막말로 그 정도 강도의 노동을 한다면 어디의, 어떤 상단의 근로자도 비슷한 성과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철산 제철단지의 노동자들도 불만이 별로 없었다. 힘든 만큼 풍족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까닭이다.

올해는 조선에 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했다. 본래대로라면 내년 봄에 열리는 것이었는데 광해는 한해 앞당겨 올해 겨울에 치르도록 했다.

선거의 범위가 커지면서 너무 오랜 기간 선거회가 개최됨에 따라 기존 관리들의 임기가 만료된 후에 선거가 끝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그 선거의 범위가 더 커진다.

광해는 이번 선거에서 총리대신까지 백성들이 직접 뽑도록 했다. 물론 여전히 간접선거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직접 뽑는 것은 이장까지였다.

그렇게 뽑힌 이장들이 모여 시장을 뽑고, 다시 그렇게 뽑힌 시장들이 모여 관찰사를 선출하고, 그렇게 선출된 관찰사들이 모여 총리대신을 뽑도록 했기 때문이다.

각부 대신들은 총리대신이 5명을 지명하면 조선 최고의 사정기관인 사간원이 결격사유를 검토하여 통과한 이들을 추린다.

총리대신은 이렇게 사간원의 검토를 통과한 이들 중에서 2명을 태왕에게 천거하고, 태왕은 그중 한명을 지목해 임명하기로 했다.

만약 천거한 이들이 모두 태왕에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못을 박아두었다.

이 경우 총리대신은 다시 동일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사람들을 선발하여 추천하여야 했다.

이 과정이 태왕의 거부권으로 인해 세 번 반복된다면 사간원이 기존 추천 인원 외의 사람들을 5명 추천하고, 이중 총리대신이 2명을 지목하면 태왕은 그중 한명을 반드시 선택해 최종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와 같은 인사 규정을 광해는 황실 법규와 조선대전이라 불리는 조선의 국법에 명시했다.

아울러 광해는 해외 영토를 포함한 조선의 행정권을 이번 선거로 선출된 총리대신에게 전임하고자 했다. 다만 외교권과 군권은 계속해서 태왕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못을 박았다.

이 경우 총리대신의 행정권이 약화되는 것을 우려해 태왕은 외교권을 총리대신에게 위임해두고 필요시 환수할 수 있도록 했다.

군권의 경우엔 군 최상위 지휘관인 원수가 총리대신과 같은 품계로써 예하가 될 수 없음으로 이전처럼 병무대신을 통해 군과 협의하던 기조를 유지하고 군권은 태왕에게 귀속시켰다.

광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입법 기관을 만들기로 하고 입법의원 선거를 추가로 시행하기로 했다. 인구 1백만 명 당 한명을 선발하게 한 이 입법의원은 도 단위로 선출하기로 했다.

이 입법의원 후보는 선거 시 이장과 마찬가지로 각 리 당 한명씩을 선발하고, 이들이 모여 시에서 다시 한명씩 후보를 선출하고, 이들이 다시 모여 도 단위에서 할당된 인원수만큼의 입법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광해는 적절한 직접 선거 방안이 마련될 때 까지 이처럼 모든 선거를 직접과 간접방식을 섞은 선거제도로 운용하기로 하고 해당 내용을 조선대전에 명시했다.

입법의원들이 선발되면 이들을 통해 조선에서 사용될 법을 추가로 정하거나 개정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모든 입법과 개정은 태왕의 동의를 반드시 구하도록 해서 황실의 존엄을 세웠다.

물론 황실 법규엔 가능한 입법의원들이 만든 법에 심각한 하자가 없는 한 반대하거나 거부하지 말 것을 규정해 두었다.

태왕에게 주어진 권한이 작지 않기 때문에 언제라도 황실 법규가 변할 수 있겠지만 후손들이 가능한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는 소회를 특별히 광해가 황실 법규에 적어 넣었다.

그와 같이 소회를 적어 넣은 것은 선황의 뜻을 어겨야 한다는 부담을 주어 그러지 못하도록 약간의 견제를 두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조선이 입헌군주제와 정통군주제를 적절히 섞은 특이한 체제로 나아가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 몇 가지 이상한 조짐들이 조선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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