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6화. 협박(脅迫)
갑작스럽게 열린 대전의 문 앞에 등장한 태자의 모습에 사간원 관리들의 외침이 일순간에 멈추었다. 그런 사간원 관리들을 바라보며 태자가 말했다.
“내가 듣고, 내가 보고 있다. 다시 고하라. 감히 내게 그 아비의 잘못이 있으니 아내를 버리라 말 하는 자 누구인가! 그 자의 얼굴을 내 결단코 잊지 않을 것이다. 아비의 죄가 딸의 죄라 말하는 자, 그 아비의 죄가 그 아들의 죄일 것이다. 너희들의 주장이 그러하니 그 아비의 얼굴을 내 결단코 잊지 않을 것이다!”
협박이었다.
태자비를 폐하라 주청하는 자는 물론이고, 그 자손까지 결단코 가만두지 않겠다는 노골적인 협박.
다른 자도 아닌, 차기 조선의 군왕이 하는 협박에 사간원 관리들이 놀란 눈으로 입을 닫은 채 감히 나서는 이가 없었다.
태자에게서 14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의 패기와 위압감이 전신에서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련한 군왕이나 보일법한 위엄이었다.
그런 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광해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이 버거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멀지 않은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광해의 웃음을 확인한 총리대신은 이번 일이 이것에서 더 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멈추어야했다. 태왕의 결정이 섰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대신들이 더 나아가면 태자의 심기가 상하고, 대소신료들과의 화기까지 망가진다.
그것은 훗날 태자가 태왕이 되었을 때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 뻔했다. 지금의 조선처럼 군왕의 권한이 막강한 나라에서 태왕과 화기가 상하면 광해 등극 초기처럼 대신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는 제대로 나라를 운용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걱정한 총리대신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외교부대신을 손짓으로 제지했다.
작게 고개를 내젓는 총리대신을 확인한 외교부 대신이 반쯤 내딛었던 발을 들이고, 입을 다물었다. 광해가 그것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왕의 뜻과 태자의 협박에 준하는 선언으로 태자비의 폐위 추청 사태는 그렇게 봉합되었다. 불만과 탄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감히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자는 없었다.
그것이 어떤 대가로 돌아올지, 결의를 다지는 표정의 태자를 바라보며 대신들은 너무나 확연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전조회가 끝나고 그날 밤, 이항복이 태자를 찾아왔다.
“태자 전하.”
“예.”
“군왕은 무릇 범인(凡人)과 달라서 범인은 할 수 없는 일도 하여야 하며, 차마 사람은 하지 못할 일도 하여야 하는 자리옵니다.”
“압니다.”
“정녕 아시옵니까?”
“무슨 의미에서 하는 말인지도 압니다. 태자비에 대한 이야기이겠지요.”
“예. 일단락 된 일을 굳이 꺼내는 소신의 불충을 굽어 살피소서.”
“아닙니다. 내가 그 빌미를 준 것이니······. 여하간 나도 도제조의 말뜻을 압니다. 총리대신이 아내를 내칠 수 없다하나 나는, 조선의 태자인 나는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차후 내 명 하나로 수천, 수만의 목숨이 날아가기도 할 터이니.”
“바로 그러하옵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할 일도 없고, 할 수 없는 일도 없어야 하는 것이옵니다.”
이항복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태자가 말했다.
“그런데 도제조.”
“예.”
“그럼 내가 왜 태왕을 해야 하오?”
“예?”
“내가 왜 태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내 주변의 모두를 버리고, 상처를 주어가며 왜 그래야 하느냐 그 말이에요.”
“그, 그야, 태자 전하이시니까요.”
“아바마마께오서 이번 일을 간청하는 내게 하신 말씀이 있소. 나도 그것에 동의 하오.”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항복에게 태자가 답했다.
“네 뜻이 확고하게 섰다면 하고픈 대로 하라. 네가 조선의 태자이다. 네 아비가 조선의 태왕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네 아내 하나 지키지 못한데서야. 어디 창피해서 태자라고 말이나 하겠느냔 말이지.”
“저, 전하!”
“압니다. 도제조가 하고픈 말을. 군왕이라 하여, 태자라 하여,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니 된다고 말하고 싶겠지요.”
“그러하옵니다. 국정을 자신 마음대로 농단하는 왕은 백성들에게 악몽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옵니다.”
“그럼 몇 가지만 물읍시다. 태자비를 버리지 않는다고 조선이 흔들리겠습니까? 아니면 태자비를 내치지 않아서 조선의 백성이 곤궁해지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곤궁한 입장에 처한 아내를 버린 왕은 백성들에게 본받아야 할 좋은 왕이겠습니까?”
“······.”
태자의 물음에 이항복은 답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 든 뜻을 알기 때문이었다. 해서 이항복은 답이 아니라 부탁을 꺼내놓았다.
“하면 소신이 한 가지만 태자 전하께 부탁을 드려도 되겠나이까?”
“말씀해 보세요.”
“태자비 전하를 아끼시는 그 마음처럼 백성들을 아끼소서. 버리고 내치기 전에 백성들을 태자비 전하처럼 돌보소서.”
이항복의 말에 빙긋이 미소 지은 태자가 답했다.
“나도 사람이니 어찌 같을까. 하나 그리 생각하도록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겠노라고 약조하겠습니다.”
“그것이면 되었나이다. 소신 태자 전하의 약조를 믿고 이만 물러가옵니다. 미신의 덧없는 소리를 들어주시고, 답을 주신 이 시간을 소신은 하늘의 부름을 받는 그 순간까지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살 것이옵니다.”
“나 또한 백성을 아끼는 도제조의 마음을 가슴 깊이 새겨 두리다.”
“망극하옵니다. 태자 전하.”
깊이 몸을 숙여 보인 이항복은 그렇게 태자전에서 물러났다.
*****
습격에 가까운 기동으로 파리를 공격해서 부르봉 왕가를 끝장낸 조선군의 소식을 들은 잉글랜드는 언제 격론을 벌였나 싶게 토론을 끝내고 재빨리 동맹군 파병을 결의했다.
해당 사실은 런던에 소재한 주(駐)잉글랜드 조선 대사관을 통해 조선에 전달되었다.
유럽에 존재하는 조선의 대사관들 중 무선전신소가 건설된 곳은 단 두 곳, 런던에 소재한 주잉글랜드 대사관과 마드리드에 소재한 주에스파냐 대사관이었다.
그 중 주에스파냐 대사관은 조선과 에스파냐간의 전쟁이 발발한 직후, 자체 결정에 따라 파괴 통신을 송신하고는 비화책을 완전 소각하고, 무선전신기와 발전기를 폭파해 폐기했다.
자칫 에스파냐군에게 탈취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 유럽에 존재하는 조선의 대사관들 중 유일하게 무선전신소를 운용하고 있는 곳은 주잉글랜드 대사관뿐이었다.
그 덕에 잉글랜드의 결정이 떨어진지 반나절 만에 조선은 그 결정을 인지할 수 있었다. 외교부를 통해 해당 사항을 보고받은 광해는 일부 문관들까지 참석하는 최고사령부의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잉글랜드의 참전에 동의했다.
조선의 답변에 잉글랜드는 3만의 병력을 조선군이 원하는 지역에 파병하여 함께 작전을 수행하고, 별도의 3만을 프랑스에 상륙시켜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하고자 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위기를 이용해 과거 백년전쟁으로 상실했던 프랑스 내의 자국 영토를 다시 회복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런 잉글랜드의 계획에도 조선은 동의했다. 다만 프랑스 영토에 대한 잉글랜드의 별도 작전에 대해서는 상호방위조약에 의한 조선군의 지원 의무를 면제하기로 합의했다.
조선으로써는 잉글랜드의 영토전쟁에 조선이 끌려들어가는 일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대서양군 사령부는 잉글랜드의 요청에 의해 조선군과 함께 작전을 펼칠 3만의 잉글랜드군을 실어 나르기 위해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을 급파했다.
20척의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이 잉글랜드의 폴리머스에서 3만의 잉글랜드군을 싣고서 에스파냐의 산탄데르로 상륙시켰다.
그와 함께 또 다른 3만의 잉글랜드군을 동인도 회사가 조선으로부터 확보했던 각종 함선과 조선무역선들을 총동원해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도버에서 출발한 이 병력은 지척인 칼레에 상륙했다.
해모수급 전열함의 상륙포격 후에 이루어진 이 상륙에 프랑스는 발칵 뒤집혔다.
조선과의 전쟁도 국운을 걸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지만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프랑스에게 또 다른 의미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군 파리 진공부대가 퇴각하면서 뒤늦게 따라오던 캉 군단을 완전히 격파해 버림으로써 사실상 프랑스의 서북부에서 잉글랜드를 견제하던 군세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였다.
그나마 칼레 포구에 소수의 경비대가 있었지만 그들은 잉글랜드 해군 소속 해모수급 전열함의 상륙포격으로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그렇게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어진 칼레로 잉글랜드군 3만이 상륙을 시작했다.
칼레에 투입된 잉글랜드군과 별도로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에스파냐의 산탄데르에 도착한 잉글랜드군에게 조선군 대서양군 사령부는 과거 포르투갈 전쟁 때처럼 후방 정리 임무를 맡겼다.
물론 상황은 달랐다.
과거 포르투갈 전쟁 때는 조선군이 적군을 분쇄한 후 후방의 치안유지와 점령지 관리를 맡긴 것이었지만 이번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군으로 이루어진 대서양군은 상륙과 동시에 고속으로 기동 중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최단시간 안에 마드리드에 도착해서 도려내듯 마드리드를 완전히 파괴하고 왕실을 생포하거나 모조리 사살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대서양군 사령관 이억기는 태왕으로부터 가능한 에스파냐 국왕과 그 가족을 생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만 그로인해 병사들의 피해가 발생할 것 같다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사살하라는 명을 받고 있었다.
왕실을 완전히 말살시켰던 프랑스와는 분명히 조금 다른 대응책이었다. 하긴 사돈이자 며느리의 가족들이니······.
광해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던지 이억기는 일체의 불필요한 전투를 자제시키고 5만 전체를 마드리드를 향해 고속 이동 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그 후방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제법 매섭고, 규모가 컸다.
그런 전투에 내몰린 잉글랜드군이 당황도 잠시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하며 제법 전투를 잘 이끌어갔다. 조선 군사고문단의 지도하에 훈련을 받은, 신형 소총과 폭발탄을 사용하는 철포로 무장된 병사들을 보내왔던 덕이었다.
최근 잉글랜드가 만들어낸, 흔히 런던1616이라 불리는 신형 소총은 조선군이 초기에 사용했던 가총을 여러 면에서 복제한 총이었다.
그로인해 이 런던1616은 제한적이나마 볼트액션형 소총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다만 초기에 조선군도 애를 먹었던 것처럼 후방 가스 누출에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던 무기였다.
그럼에도 이것이 이전 세대에 사용되었던 아쿼버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무기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만 런던1616은 아직도 강선은 갖추지 못했다. 그로인해 외형은 가총과 유사했으나 실제 성능은 조선이 제후국에 보급했던 일총과 유사하거나 살짝 미흡했다.
여하간 잉글랜드는 최신무기로 무장한 정예 병력을 조선군을 돕는 에스파냐 전선으로 파병한 셈이니 체면치레나 하자는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드리드에 머물고 있던 에스파냐 왕실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5만에 달하는 대한제국군이 맹렬한 속도로 진군해 오고 있었고, 3만의 잉글랜드군이 에스파냐의 북부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전선 모두 중요했고, 만만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에스파냐군 지휘관들은 일단 마드리드를 지키는 것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기로 하고 징집을 실시해 모은 병력을 모조리 마드리드 성벽으로 올려 보내는 한편 한창 바다호스에서부터 돌아오고 있는 3만의 정규군에겐 귀환을 독촉했다.
사람들이 흔히 조선군이라 부르는 대서양군 소속 대한제국군의 무서운 진군속도로 인해 최악의 경우 회군중인 정규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군이 마드리드에 먼저 도달할 수도 있었다.
그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에스파냐 지휘부는 정규군급 병력의 소집에도 열을 올렸다. 마드리드 인근 마을의 경비대원들을 모조리 소집한 것이다.
일정한 무장을 갖추고 훈련까지 받은 병력이었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징집해서 나무창 하나 쥐어주고 성벽으로 올려 보낸 이들보다 나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드리드에도 수비대는 있었다. 5천 남짓한 이 수비대는 ‘핼버드’라는 이름이 붙은 스위스군이 사용해서 유명해진 커다란 미늘창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말은 총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조선과의 전쟁이후 에스파냐도 군현대화 작업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무장을 갖춘 구시대 부대들이 상당수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에스파냐군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