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303화 (303/325)

제303화. 파리 진공(進攻) 작전

오흐쥬발 요새는 높이 5M의 높은 성벽을 가지고 있어서 서부에서 파리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로 불린다.

평시에도 5백의 수비병과 30문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을 정도로 프랑스에서 중히 여기는 군사거점이었다. 그 오흐쥬발 요새에 1만1천의 프랑스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대기하고 있었다.

조선군 제11장갑병단도 그 사실을 인지했다. 파리가 가까워오면서 운용하기 시작한 선도 정찰대의 보고를 받은 것이다.

시크 여단장은 곧바로 진격해서 격파하고 지나가자고 했지만 11병단장은 굳이 힘을 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우회해서 기동한다. 여기 오흐쥬발로부터 30리(약11km) 남부지역의 벌판을 통해 파리 좌측의 남부로 접근한다.”

“그러다 뒤를 얻어맞으면 어찌 합니까?”

시크 여단장의 불만에 찬 물음에 11병단장이 싱긋 웃었다.

“돌벽 밖으로 나와 준다면 우리야 고맙지.”

현식총은 아예 불가능하고, 기01이 일부 석조 건물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지만 제한적일 뿐이다. 다시 말해 오흐쥬발의 두터운 석조 성벽을 격파하자면 포대를 방렬하여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거기다 포격으로 성벽을 격파한다 하더라도 요새 안의 적병을 정리하자면 결국 병력을 요새 안으로 들여보내야 했다.

포격으로 엉망이 된 데다 마차가 기동할 정도로는 보이지 않는 좁은 요새 안으로 장갑마차를 들여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 결국은 하차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11병단장은 그 사이 발생하는 아군의 피해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11병단장의 걱정에 시크 여단장이 자신들에게 맡겨 달라고 했지만 11병단장은 고개를 저어 단호히 거부했다.

“시크 여단의 자신감은 이해하지만 총탄은 자신감이 막아주지 않아. 입지 않아도 되는 피해를 굳이 자처해서 얻을 필요는 없다.”

파리 진공의 임무를 받은 이 연합부대의 지휘관은 어디까지나 상급자였던 11병단장이었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시크 여단장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이내 11장갑병단을 선두에 세운 파리 진공부대가 오흐쥬발을 멀리 두고, 크게 우회기동하기 시작했다.

오흐쥬발의 방어군은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른 채 이제나 저제나 조선군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파리도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남은 1천의 총사대가 왕궁의 수비를 위해 전념하는 동안 파리의 백성들을 성벽 안으로 옮기고 남성들을 징발해 창과 칼을 주어 성벽으로 올려 보냈다.

이 당시 파리의 성벽은 로마시대 때 지어진 세테 섬의 요새를 기준으로 센 강을 사이에 두고 파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물론 성벽 안으로 둘러싸인 공간보다 그 밖에 지어진 거주지가 더 많기는 했다.

실제로 센 강의 우측에는 그렇게 외부에 지어진 거주지를 보호하기 위해 샤를 5세가 1382년에 완공한 성벽이 확장되었지만 그조차도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파리의 방어시설 때문인지 총사대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왕궁에는 오히려 왕이 없었다.

어린 왕, 루이 13세는 모후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 몇몇 총신들과 함께 세테 섬으로 비밀리에 옮겨간 후였기 때문이다.

파리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센 강의 한복판에 있는 작은 섬인 세테 섬은 로마시대에 건설된 요새가 아직까지 자리하고 있어서 파리의 3중 성벽의 가장 안쪽에 해당했다.

이것은 조선군이 운용한다는 비행선의 폭격에 대한 방어 차원이기도 했다.

오스만이 조선군의 비행선 폭격으로 왕궁이 쑥대밭이 되는 바람에 오스만의 파디샤가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의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유사시에 대비해 이쪽으로 피신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에 따른 조치였던 것이다.

세테 섬엔 고래로부터 세테 섬 수비대가 주둔해 있었다.

총사대 산하의 총병들로 구성된 이 부대는 겨우 50명 남짓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6문의 대포도 가지고 있었다.

강 한복판에 지어졌다는 지형적 이점에다 구형이긴 해도 대포까지 배치되어 나름대로 요새를 방어할 전력은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왕이 없는 왕궁을 총사대가 사수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군은 센 강을 좌측에 두고 달렸다. 당연히 파리의 좌측으로 돌입했다.

파리의 좌측을 담당하는 방어 성벽은 필립 2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면서 짓기 시작해서 1210년에 완공한 오귀스트 성벽뿐이었다.

그 밖으로 지어진 거주지가 상당히 많아서 조선군은 좁은 도시의 길을 따라 여섯 갈래로 나뉘어 파리 내부로 진입했다.

파리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인 덕인지 시내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텅텅 빈 파리로 진입한 조선군의 긴장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주변에 잡다하게 널린 건물들로 인해 시가전은 언제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건물이 있다면 사격하여 위험요인을 확인, 제거해도 좋다는 명령이 내려와 있어서 달려가는 내내 여기저기서 현식총과 기01 사격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다행히 공격을 받은 조선군은 아직 없었다.

여섯 갈래였다고는 해도 목적지는 어차피 하나였다. 오귀스트 성벽에 도착한 조선군은 곧바로 포를 방렬하기 시작했다.

기동마차에서 뛰어내린 포병들이 마차 뒤에 달고 있던 삼포를 분리해서 방렬하느라 분주했다. 포는 11장갑병단이 3백문, 시크 여단이 150문을 장비하고 있었지만 공간의 협소 때문에 정작 방렬이 진행 된 것은 11병단의 삼포 1백 문 뿐이었다.

그조차도 건물 사이사이에 시야를 방해받지 않는 공간을 찾아 방렬한 터라 사방으로 분산 배치되어있었다.

11장갑병단은 그 외곽으로 3개 단을 배치해서 혹시라도 뒤에서 가해질 공격에도 대비해야 했다.

“방렬 완료했습니다.”

포병대장의 보고에 11병단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방포.”

짧은 병단장의 명령을 복창한 포병대장의 명령에 사방으로 분산 배치되어 있던 1백문의 삼포가 오귀스트 성벽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3치(90mm) 작렬탄이 연속해서 오귀스트 성벽을 때렸다. 일장함포의 9치(272mm) 포탄에 비해 파괴력이 작다고는 해도 파괴력의 6할을 전방으로 투사하는 작렬탄의 충격은 상당했다.

그런 작렬탄 1백발이 반경 20척(약6m)안에 몰렸다.

조선군 포병이 두터운 성벽을 파괴하기 위해 자주 써먹는 일점포화였다. 하나의 좌표에 모든 포가 사격을 퍼부은 것이다.

아무리 두꺼운 성벽도 이정도의 포격에는 버티기 힘들다.

두어 차례 포격이 가해지자 성벽의 일부가 우르르 무너졌다. 그것을 지켜본 조선군 병사들의 환호성 속에 포병대는 무너진 성벽의 바로 옆 성벽을 새로운 좌표로 선정하여 곧바로 포격을 재개했다.

그런 식으로 차례차례 성벽을 무너트려 기동마차 서너 대가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를 파괴하자 11병단장이 곧바로 진입을 명령했다.

선도부대로 선정된 112장갑 단이 곧바로 8대의 장갑마차를 선두에 세운 채 성안으로 진입했다.

여기저기서 총탄이 날아왔지만 장갑마차를 둘러싼 철제 장갑판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그런 프랑스군의 저항에 장갑마차에 장착된 폐쇄형 기01 총좌가 선회하며 총탄이 날아온 지역을 아예 벌집을 만들어버렸다.

투두두두두퉁.

현식총과 유사하면서도 훨씬 무거운 기01 연발 사격음이 소란스럽게 울려나왔다. 조선군의 파리 진공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수천의 파리 백성들에 총사대에서 차출된 2백 남짓의 병력을 섞어 급조한 방어부대는 순식간에 분쇄되었다.

장갑마차들을 선두에 세운 채 진입한 112장갑 단을 위시해 속속 11장갑병단의 기동마차들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파리 백성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머지 총사대가 결사의 의지를 보이며 지키고 있는 르부르궁에 대한 정령작전은 시크 여단에 할당되었다.

시크여단은 곧바로 르부르궁으로 몰려갔다.

그렇게 떠나는 시크여단장에게 11병단장은 신신당부했다.

“하차 전투대신 포격으로 쑥대밭을 내게. 프랑스의 왕 따위 사로잡지 않아도 좋으니 자네 휘하의 병사들의 안전을 우선시 하라 그 말이야.”

“생포······. 안 해도 되는 겁니까?”

“태왕 폐하의 명령은 격멸이야. 아예 파리를 지워버려도 좋다고 하셨네. 프랑스 왕의 생포에 대해선 아무런 명이 없으셨단 말이지.”

11병단장의 말에 시크 여단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미 저만치 달려간 휘하 병력을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르부르궁 방향으로 달려가는 시크 여단을 11병단장이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해병대는 그 호전성 때문에 굳이 입지 않아도 되는 피해를 가끔 입기 때문이었다.

11병단장의 걱정과 달리 시크 여단장은 제법 명령을 잘 따랐다. 여단이 보유하고 있던 150문의 삼포 중 공간이 허락하는 50문을 방렬하여 일제포격으로 르부르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성벽이 무너지자 삼포의 고각 사격 능력을 사용해서 성안으로 화염탄을 사용한 격멸 포격을 개시했다.

건물들이 포격의 충격과 화염에 불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총사대는 죽음으로 왕과 궁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조선군은 총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포격으로만 궁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로인해 총사대는 적과 교전한번 해보지 못한 채 속절없이 죽음을 당할 뿐이었다.

궁 안에 화광이 충천하고 적병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한 여단장이 포격을 중지시키고, 진입을 명령했다.

그러자 무너진 성벽 안으로 기동마차 수십 대가 몰려 들어갔다. 진입사격이 그렇게 달려가는 기동마차들에 거치된 현식총에서 퍼부어지고 있었다.

궁 안으로 들어간 기동마차들의 뒷문이 열리면서 시크 여단 병사들의 하차전투가 개시되었다.

커다란 함성과 함께 마차에서 뛰어내린 시크 여단 병사들이 사방으로 분산되며 요란하게 사격을 가했다. 그에 맞서 살아남은 소수의 총사대가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다총에 수탄, 거기다 현식총의 지원사격까지 받는 시크 여단의 공격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차례차례 제압되는 총사대원들의 시신을 지나쳐 시크 여단 병사들이 궁 안으로 진입했다.

*****

파리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이 개시된 시점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포격음으로 조선군이 우회해서 파리를 공격한 사실을 알게 된 오흐쥬발의 방어군이 서둘러 파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1만의 파리군단에 1천의 총사대로 구성된 이 오흐쥬발 방어군의 회군은 후방에 남겨졌던 11장갑병단 정찰대에 의해 탐지되었다.

그 사실을 전달받은 11병단장은 후위에 대기 시켜두었던 3개 단 중 2개단을 파리 외곽으로 진출시켜 이들에 대한 요격을 명령했다.

2개 단, 2천의 병력이 곧바로 파리외곽을 향해 달렸다.

2개 단의 지휘관들은 사전 협의에 따라 장갑마차들을 선두에 세웠다. 1개 단이 보유한 장갑마차의 수는 50대다.

따라서 2개 단이 선두로 내세운 장갑마차의 수는 1백대에 달했다. 그들이 넓게 퍼져나가면서 파리 외곽의 들판을 가득 메우며 달려오고 있던 오흐쥬발 방어군을 향해 돌진해 나갔다.

1천 총사대가 2열 횡대로 벌여서며 그렇게 달려오는 조선군을 맞아 사격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들의 총이 닿지 못하는 거리에서 조선군 장갑마차들이 장비한 기01의 사격이 개시되었다. 자그마치 1백문의 기01이 2열 횡대로 늘어선 총사대를 훑었다.

3분의 2치(20mm)총탄에 직격당한 총사대원의 몸이 뜯겨나갔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석조 돌벽도 뚫는 파괴력이 사람의 몸에 가해진 탓이었다.

그런 기01 1백문의 집중사격엔 2열 횡대로 늘어선 총사대는 그저 손쉬운 사격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총사대를 벌집으로 만들어 놓은 장갑마차들이 창칼로 무장한 나머지 병력에 기01 사격을 퍼부으며 돌입했다.

그런 장갑마차 뒤를 현식총을 퍼붓는 기동마차들이 따랐다.

벌판에서 장갑화 된 마차부대와 부딪친 보병의 최후가 어떠한지 여실히 증명해주는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도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8필의 말이 끄는 기동마차의 속도를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숨을 곳이 하나도 없는 벌판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는 마차에겐 최적의 전투공간이었던 것이다.

전투는 1시간 만에 끝났다.

사실상 개전과 동시에 승패는 갈렸음에도 1시간씩이나 걸린 것은 도주하는 적병을 쫓아 사살하고, 항복한 이들을 추려 포박하는데 걸린 시간 때문이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프랑스 오흐쥬발 방어군은 1천의 총사대와 4천의 파리군단 병사들을 잃었다.

나머지는 모두 항복하고 포로로 잡혔다. 나름 정예군으로 평가되는 파리군단의 투항병이 많았던 이유는 도저히 항거 불능의 전투력 차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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