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화. 루앙 슈발리에(Rouen chevaliers)
프랑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회심 차게 에스파냐로 파견했던 10만의 정예군은 포르투갈 진공에 실패했다. 그것도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잃은 참패를 동반한 실패였다.
향후 대책 수립에 프랑스가 골머리를 앓고 있던 시기, 조선군은 발 빠르게 프랑스에 직접 상륙했던 것이다.
조선군을 바다에서 막아보이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던 해군 제독들은 바다에서 죽음을 맞음으로써 자신들이 했던 헛된 약속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무방비 상태였던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대표적인 육군 대국 중 하나인 프랑스는 여전히 5만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중 2만은 숙적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 도버해협을 마주보고 있는 캉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이 상륙한 옹플레르와 캉은 지척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의 상륙 사실을 알자마자 캉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 2만은 급속기동을 통해 옹플레르로 진군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캉 군단이 도착했을 때 조선군은 이미 옹플레르를 떠나고 없었다.
해안에 남아있던 조선군 함대가 보였지만 감히 항구 쪽으로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해군 함정에 탑승하는 해전대원들이 항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해 놓은 데다 조선군 함포의 긴 사정거리를 아는 까닭이었다.
결국 캉 군단은 마차바퀴 자국을 따라 파리로 진격한 조선군을 따라 급히 남하하기 시작했다.
루앙 슈발리에.
프랑스 교구에 속한 루앙 주교회에 소속된 신전기사단을 이르는 이 말은 십자군 원정이 끝난 이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지휘권도 교황청에서 프랑스 국왕에게로 넘어갔다.
프랑스 왕실은 이 유서 깊은 기사단의 깃발을 없애는 대신 일단의 용기병(dragoon: 총을 가진 기마대)으로 양성했다.
1만에 달하는 이 용기병들이 루앙 남부를 가로질러 질주하던 조선군의 길목을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에 루앙 슈발리에의 지휘관들은 환호를 질렀다. 조선군이 총병으로 구성되었다지만 자신들도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다 상대는 마차, 자신들은 기동성이 더 좋은 기마, 누가 봐도 자신들이 유리했던 것이다.
그것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는 조선군 마차들을 향해 전군을 돌진시킨 이유였다. 조선군 마차를 스쳐지나가며 모조리 사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루앙 슈발리에의 돌격에 맞서 조선군 11장갑병단은 2열 종대로 달리던 진형 그대로 돌진해 왔다.
장갑마차처럼 완전 폐쇄형 총좌는 아니었지만 11장갑병단의 기동마차에는 마부석 바로 뒤쪽, 그러니까 탑승 칸 맨 앞에 회전식 현식총 거치대가 장착되어 있었다.
360도 완전 회전이 가능한 이 회전식 거치대는 탑승병력이 줄면서 생긴 공간을 활용해 부착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탑승공간의 3분지 1이 이 회전식 총좌에 할애되었지만 기존에 장착되어 있던 고정식 거치대에 비해 훨씬 작전운용도가 높았다.
완전히 뒤로 돌려 후방을 쫓아오는 적에 대한 사격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식총 거치 공간 좌우로 장갑판을 하나씩, 두 장을 세워 사수의 생존성도 높였다.
단지 사격 전방에 대한 방호력만 제공하는 장갑판이었지만 적군의 사격에 맞서 현식총을 잡아야 했던 사수들에겐 이것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기동마차가 기동 중에는 이 회전식 거치대에 현식총을 거치하고 사수가 경계를 서도록 되어 있었다.
1개 임무분대 당 배치된 4대의 마차 중 무장되지 않은 마차는 기01용 예비총탄을 실은 보급마차뿐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2천대의 11장갑병단의 마차들 중 5백대가 완전 폐쇄식 기01 총좌를 탑재한 장갑마차, 1천대가 현식총을 거치한 기동마차였던 셈이다.
한 마디로 1천5백 정의 기관총을 향해 루앙 슈발리에가 돌진해 왔던 셈이다.
선두에서 달리고 있던 지휘마차에 타고 있던 11병단장은 무서운 속도로 마주 달려오는 루앙 슈발리에를 발견하자마자 공격대기 명령을 뜻하는 깃발을 올렸다.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사격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휘마차의 깃발 신호를 확인한 마차들이 지휘마차를 따라 연달아 깃발을 올리면서 뒤를 따르는 마차에 지휘관의 뜻을 전달했고, 이내 11장갑병단 전체가 공격대기 상태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11장갑병단의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이미 선두에서 달리던 8대의 장갑마차의 사거리 안에 적이 들어왔음에도 공격 개시를 알리는 깃발은 올라오지 않았다.
11병단장은 원거리 사격에 놀라 적이 도주하는 사태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이쪽은 거의 전부가 장갑화 되어 있었다.
완전 철제 장갑판으로 뒤덮인 장갑마차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동마차도 두꺼운 나무와 얇은 철판으로 탑승병들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사용되는 가총급 화기로는 뚫리지 않을 정도의 방호력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조선군 11장갑병단을 스쳐지나가면서 루앙 슈발리에가 요란하게 사격해대었다.
뚫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병력탑승부를 때리는 수많은 총탄의 타격음에 병사들은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현식총 거치대에 서있던 현식총 사수들은 작은 장갑판에 잔뜩 웅크려 적탄에서 몸을 감췄다.
따다다다당.
그런 현식총 사수를 노리고 발사된 루앙 슈발리에의 총탄들이 장갑판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나마 루랑 슈발리에가 한쪽 방향으로 스쳐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현식총을 돌리고 장갑판 안쪽으로 숨을 수 있었지 양쪽으로 들어왔다면 난감했을 터였다.
그렇게 루앙 슈발리에의 선두가 11장갑병단의 전열 중간쯤에 도달했을 때였다.
공격개시를 알리는 깃발이 지휘마차에서 올라왔다.
그것을 보자마자 선두의 장갑마차 8대에 장착된 기01총좌가 불을 뿜었다.
사격개시 깃발신호가 마차와 마차를 건너 뛰어 부대 끝까지 도달하는 시간보다 전 부대가 사격을 개시한 시간이 빨랐다.
선두의 총소리로 모든 마차들이 사격 개시 명령이 떨어진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자그마치 1천5백정의 기관총 사격이 11장갑병단의 곁을 고속으로 스치고 지나가던 루앙 슈발리에를 덮쳤다.
루앙 슈발리에 역사상 가장 처참한 전투가 그렇게 막을 올렸다.
치열한 전투는 아니었다. 서로가 스쳐지나 달리며 단 한차례 사격을 주고받은 것이 다였으니까.
하지만 그 단순한 전투로 유서 깊은 루앙 슈발리에는 완전히 전멸 당했다. 단 한명의 기병도, 단 한 필의 전마도 살아남지 못했다.
11장갑병단의 뒤를 따라 달리던 시크여단의 기동마차에 서있던 현식총 사수들이 지나면서 길가를 따라 길게 늘어선 루앙 슈발리에의 시체들을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시크 여단의 기동마차들은 11장갑병단의 기동마차들과 달리 기존의 고정식 현식총 거치대를 가지고 있었다.
기동 중 사격 범위가 제한되고 사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갑판도 없는 탓에 사수의 상체가 온전히 드러나는 그들은 보고 싶지 않아도 1만 필의 말들과 함께 넝마가 되다시피 한 모습으로 들판에 널브러진 루앙 슈발리에의 시신들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군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용기병, 루앙 슈발리에를 전멸시킨 조선군은 고속으로 파리를 향해 진군을 지속했다.
조선군이 루앙의 동남쪽에 위치한 루비에를 돌파했다는 급로를 접한 파리는 아직 루앙 슈발리에의 전멸 소식은 알지 못했다.
단지 국왕을 비롯한 파리의 프랑스 위정자들은 루앙 슈발리에가 고속으로 질주하는 조선군의 뒤를 따라 잡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조선군은 루앙 슈발리에와 캉 군단을 뒤에 달고 달려오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판단에 입각해 파리의 방어군 지휘관들은 파리 수비군으로 조선군의 앞을 막고, 뒤따라 달려오고 있을 루앙 슈발리에와 캉 군단으로 뒤를 쳐 조선군을 가운데 가둔 채 전멸 시킨다는 작전을 수립했다.
파리에 주둔하는 병력은 왕궁을 수비하는 2천의 총사대와 1만의 파리군단이었다.
본래 파리군단은 최근 추세에 맞춰 대량의 총병을 보유한 2만의 정예부대였지만 에스파냐로 파견한 병력에 총병들을 모두 지원한 탓에 남은 1만의 병력은 모두가 궁병과 창병, 그리고 검병으로 이루어진 구시대의 무장을 갖춘 부대가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위정자들은 조선군의 진군을 파리 이전에 막아야 한다는 명제에 따라 이들을 파리에서 빼내 센강에 기댄 오흐쥬발의 벌판에 세워진 작은 요새에 배치했다.
30문의 대포가 요새에 배치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선정된 방어거점이었다. 프랑스 왕실은 이 방어 작전에 2천의 총사대 중 1천을 지원했다.
총사대를 지원받은 파리군단은 오흐쥬발 요새에 형성한 방어선을 공고히 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루앙 슈발리에를 격파한 이후, 조선군과 파리 사이에는 이렇다 할 방어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소수의 경비대가 어떻게든 저지하려 들기는 했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기에는 조선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랐다.
기본적으로 조선 육군의 전시 고속기동은 하루에 3백리(약118km)를 주파한다. 대략 420리(약165km) 정도인 옹플레르와 파리의 거리를 감안하면 조선 육군은 2일이면 도착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지친 말들을 쉬게 하기 위해 전진을 멈추고 숙영지를 건설한 11장갑병단과 시크여단은 파리에서 120리(약47km)까지 접근해 있었다.
게흐발르라는 이름의 작은 도시 인근의 벌판에 임시 숙영지를 건설한 11장갑병단과 시크여단은 지친 말들을 쉬게 하고, 하루 온종일 흔들리는 마차에 타고 있느라 녹초가 된 병사들을 먹였다.
후방 정찰을 통해 뒤를 쫓아오고 있는 캉 군단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도 사람인 이상 쉬지 않고 따라올 수는 없었다. 더구나 대부분이 보병인 그들의 진군속도는 11장갑병단과 시크여단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러니 하룻밤의 휴식은 큰 차이를 만들지 않을 터였다. 더구나 쉬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말들은 지쳐있었고, 병사들도 녹초가 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하루 온종일 걸어야 하는 보병들이 보기엔 편해 보이겠지만 마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진동을 온몸으로 겪어야 하는 기동보병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병사의 피로도는 전투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다수의 충격완화 장치가 마차에 부착되어 있었지만 완전히 충격을 해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수많은 충격 완화장치가 있는 덕분에 하루 온종일 탑승이동이 가능한 셈이었다. 아니었다면 병사들은 마치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의 축적으로 몸 져 누워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무런 충격완화 장치가 달려있지 않은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던 초기 기동보병들이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전투는커녕 병사들이 극심한 몸살에 걸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조선 육군 기동보병은 충격완화 장치가 개발되어 부착되기 전까지 하루에 8시간 이상의 탑승 이동이 금지되었을 정도였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감내가 가능한 충격으로 줄어들었다지만 그 때를 기억하는 일부 고위 지휘관들은 기동보병들의 휴식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체력을 최대한 빨리 회복시켜야 제대로 된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기동보병들은 급식이 좋은 편이었다. 고기도 아낌없이 배식되었고, 식사의 질도 좋았다.
하긴 전원이 마차로 이동하는 병력이라 보급품의 소지량이 일반 보병에 비해 월등히 많은 덕에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하지만 같은 기동보병으로 구성된 시크 여단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이들은 전통적인 조선 육군이 아니라 대한제국 해병대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전통을 내려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제국군이 아니라 조선군으로 편입된 후에도 시크 여단은 육군이 아니라 조선 해병대 총사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해병대 병력인 셈이었다.
조선의 해병대는 열악한 환경을 즐기고, 최악의 전투에 서서, 누구도 발휘할 수 없는 전투력을 뿜어낸다, 라는 기치를 내건 이들이었다.
특히 시크교의 교리에 따르는 시크 여단 병사들은 육군 11장갑병단 병사들의 호화스러운 식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간단한 먹거리를 먹으면서도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11장갑병단 병사들에게 소풍 온 거냐며 비아냥 거렸을 정도였다.
육군과 해병, 본토군과 인도양군, 최신병기로 무장한 정예 황방군과 특수전 부대라는 구분이 주는 묘한 호승심이 양 부대 사이에 팽팽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두 부대의 지휘관들은 그 호승심이 전투에 긍정적으로 발휘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밤을 보낸 조선군이 숙영지를 걷고 다시금 전진을 시작했다.
이제 파리가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