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완전 격파 공습
포르투갈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프랑스-에스파냐 연합군의 돌파전투가 실패하던 시기, 오스만 제국은 연일 벌어지는 조선군의 폭격에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조선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된 직후, 콘스탄티니예가 긴 역사의 종지부를 찍고 완전히 폐허가 된 이후로 오스만 제국의 동부 지역 대도시들에 대한 비행선의 폭격이 연일 벌어지고 있었다.
조선군 비행선에 의한 파괴는 너무나 광범위해서 오스만 제국이 과거에 수도로 사용했던 쇠우트와 동부 최대의 무역 거점 도시인 앙카라도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조선군은 오스만 제국의 도시란 도시는 모조리 파괴시킬 요량처럼 굴었다.
지상군끼리 격돌하는 통상적인 전투에 대비해 오스만 제국이 20만이나 하는 대군을 대기시켜 두고 있었지만 조선군은 아예 상륙할 생각이 없는지 지상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채 공중 폭격에만 치중했다.
그런 조선군의 공중폭격은 묘하게도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점으로 동쪽의 영토에만 집중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동쪽 영토에 대기시켜둔 병력은 15만에 달했다.
5만이 보스포루스 해협 서쪽의 영토에 모여 있었고, 폴란드와 러시아가 지원한 20만의 병력도 모두 서쪽에 집결해 있었다.
합해 40만의 대병력이 손가락만 빨고 있는 동안 오스만은 제국을 지탱하는 동부의 대도시를 거의 모두 잃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 대도시는 그저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의 역할만 수행하지 않는다. 대규모의 산업시설과 상업시설이 몰려있고, 다량의 식량도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조선군의 공중폭격으로 날아갔다.
어느 한두 개의 대도시에 들이닥친 불행이 아니었다. 규모가 조금 있다싶으면 여지없이 조선의 비행선들이 날아와 공투탄을 쏟아 붓고, 기01 총탄으로 지상을 유린했다.
석조건물은 폭격의 충격에 무너졌고, 목조건물들은 폭격으로 일어난 화염에 소실되었다.
7일에 걸친 공중폭격에 조선군이 쏟아 부은 가급 공투탄의 수가 9만 3천발에 달했다. 이것은 20발의 공투탄을 적재하는 날틀03의 폭장력(爆裝力: 폭탄 적재량)을 감안할 때 하루 평균 3번의 폭격이 진행되었음을 뜻했다.
그 살인적인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날틀03 비행선들은 설계 시 허용된 연속비행 한계까지 운용되고 있었다.
그나마 각 비행선 당 비행대원들은 두 개 조씩 구성되어 있어 교대로 비행에 나섰던 터라 비행대원들의 피로도는 극한에 다다를 정도는 아니었다.
이 무지막지한 피해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피신한 오스만 황실은 막대한 피해에 놀란 나머지 조선군과 협상을 진행하고자 했다.
최소한 정전, 가능하다면 종전을 이루기 위한 임무를 띠고 콘스탄티니예 앞바다에 머물고 있는 조선군 함대로 찾아왔던 오스만의 사절은 선수에 충무01이라 쓰인 이순신 함대의 기함, ‘한산함’엔 오르지도 못한 채 돌아가야만 했다.
이순신 원수가 오스만 제국과의 그 어떤 협상도 진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조선군은 오스만의 완벽한 패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비행선을 통한 조선군의 폭격 형태가 변화를 맞이했다. 도시의 파괴에서 병력의 살상으로 방향을 틀은 것이다.
이전에는 병력이 대규모로 집결한 지역을 그냥 지나쳐 도시를 폭격했었는데 8일째에 접어들면서 병력이 집결한 곳이면 어김없이 공투탄을 쏟아냈다.
오스만군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첫 폭격보고와 함께 들어왔던 병사들의 사상자 수가 백 단위에서 이내 천을 넘어 만 단위를 돌파했다.
초기 몇 번을 제외하면 오스만군이 멍하니 폭탄이 떨어지는 걸 구경만 한 것도 아니다. 조선군 비행선이 나타나면 꽁지가 빠지게 도주했다.
하지만 어떤 오스만의 기마대도 비행선의 속도를 따돌리지 못했고, 보병은 비행선의 손쉬운 먹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히 보병에겐 기01의 공중사격이 치명적이었다.
기01 사격이 도주하는 오스만 제국 육군 군열을 한번 죽, 긁고 지나가면 수백의 병사들이 피 떡이 되어 나뒹굴었다.
그런 공격 두어 번이면 부대 하나가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그런 공격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졌다. 종래엔 피해를 이기지 못한 오스만 육군 병력이 숲으로 숨어들었다.
그러자 조선군 비행선들이 그렇게 오스만군이 숨어든 숲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남부 항구도시인 이즈미르 인근의 숲에 가해진 이 공습에서 최초로 나급 공투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급 공투탄이 파편과 화염을 동시에 일으키는 통산탄이라면 나급 공투탄은 화염탄이다. 채굴한 원유를 내연기관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유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가연물질들을 잔뜩 구겨 넣은 이 나급 공투탄은 끔찍하게도 공중에서 폭발한다.
나급 공투탄의 경우 폭격 고도가 정해져 있었는데 3천척(약909M)이었다. 투하장치를 벗어나면서 수탄에 사용된 것과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지연신관에 불이 붙고 폭탄 안에서 심지가 타들어간다.
이 심지의 발화 시간은 자유낙하 시 지상으로부터 대략 50척(약15M) 정도 고도에 이르는 동안이다. 다시 말해 지상으로부터 50척 고도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폭발과 동시에 불이 붙은 인화물질이 다량 상공에 뿌려진다.
파괴력에선 비교하기 어렵겠지만 현대시대 네이팜탄과 비슷한 형상의 무기였던 것이다. 공중에서 흩뿌려진 불붙은 인화물질은 그 아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불태운다.
그런 나급 공투탄이 온통 나무로 뒤덮인 숲 위에서 수백발이 폭발했다.
이날 일어난 산불이 이즈마르 주변의 숲과 산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조선군 비행선의 지상 폭격을 피해 그 안으로 피신했던 3만의 오스만군과 함께였다.
조선군의 폭격이 보름을 넘기는 동안 동쪽 영토에 모여 있던 15만의 오스만군은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조차 대단위 부대가 아니라 백여 명 남짓한 소규모 부대로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조금만 규모를 갖추고 모여 있으면 여지없이 비행선이 날아와 총탄과 폭탄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스포루스 해협 동쪽의 오스만군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동안 서쪽에는 아무런 공격도 가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쪽에 병력을 투입해두고 있던 폴란드와 러시아 지휘관들이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쯤 부터였다.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낸 보고서가 폴란드 총사령관 명의로 작성되어 폴란드 국왕에게 보내졌다.
<조선군은 서쪽, 다시 말해 유럽 쪽과 확전의 의지가 없습니다. 단지 오스만을 끝장내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오스만의 서쪽 영토는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정식 명칭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은 입법부이자 실질적인 권력기관이었던 세임에 해당 보고서를 제출했다.
종신 세습이 아니라 세임에서 선출되는 형태의 이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은 전쟁의 향배를 바꿀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고서를 제출받은 세임은 곧바로 전선에 나가있는 자국의 총사령관에게 조선군에게 이빨 다 뽑히고, 털까지 쥐어뜯기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서부지역 영토를 즉각적으로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러시아와도 협의를 거쳐 함께 하기로 결정된 사항이었다.
구원군이자 동맹군이었던 폴란드군과 러시아군이 적으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서부지역 영토에 주둔하고 있던 5만의 오스만군이 동료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20만의 폴란드-러시아 연합군에 의해 공격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보스포루스 서쪽 영토에서 그렇게 오스만군과 폴란드-러시아 연합군이 치고받는 상황이 벌어지자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이순신 원수가 곧바로 서쪽 지역에 대한 폭격 개시를 명령했다.
뒤엉켜 치고받던 오스만군과 폴란드-러시아 연합군의 머리위로 가급 공투탄이 쏟아져 내렸다. 워낙 큰 회전을 치르고 있던 탓에 단 몇 번의 폭격으로 삼국은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
놀란 폴란드군과 러시아군이 오스만의 영토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퇴각을 시작했지만 조선군 비행선들은 그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길게 쫓아오며 연일 폭격을 퍼부었다.
견디다 못해 퇴각을 중단한 채 백기를 내걸고 바닥에 엎드린 러시아군의 머리위로 가급 공투탄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으로 조선은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했다.
오스만의 땅에 들어와 있는 모든 유럽군대를 결코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러시아군에 벌어진 비극이 폴란드군에서도 벌어졌다. 그렇게 항복을 뜻하는 백기는 조선군 비행선들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었다.
그렇게 연일 수천의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이 오스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
오스만에서 대량 살육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 인도양 함대와 제11수송함대로 구성된 연합함대가 도버해협 인근으로 접근했다.
만약에 대비해 기다리던 프랑스의 함대가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전열함 20척, 중무장 갤리온 30척, 그리고 크고 작은 전투선 80척, 도합 130척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함대였다.
그에 맞서 11수송함대를 뒤로 남겨둔 인도양 함대가 앞으로 치고 나왔다.
정규 편제는 태조급 전함 1척, 유리급 순양함 4척, 온조급 구축함 8척, 그리고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4척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도양 함대는 본래의 작전구역인 인도양의 안전 확보를 위해 모항인 마드라스에 2척의 유리급 순양함과 2척의 온조급 구축함을 놓아두고 왔다.
그로인해 프랑스 함대와 맞서 나선 인도양 함대는 태조급 전함 1척을 중심으로 2척의 유리급 순양함과 6척의 온조급 구축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크 여단과 각종 보급물자를 싣고 있는 인도양 함대 소속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4척은 11수송함대와 함께 뒤로 남았다.
그러게 겨우 9척의 함선들로 이루어진 인도양 함대가 자그마치 130척으로 이루어진 프랑스의 함대와 맞선 것이다.
우스운 것은 인도양 함대는 담담히 움직이고 있는데 반해 프랑스 함대의 장병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조선군은 무적이라는 믿음이 온 세상에 퍼진 때문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해전이 수도 없었다. 그 불패의 신화가 인도양 함대의 기함인 태조급 전함의 발포와 함께 다시금 유럽의 바다에서 펼쳐졌다.
부서지고 무너져 침몰하는 프랑스의 함선들 사이를 조선군 수송함들이 지나쳐갔다. 그들을 인도하는 것은 여기저기 폭발탄의 그을음으로 뒤덮인 9척의 인도양 함대 소속 함선들이었다.
자그마치 70척을 격침시키고, 40여척을 대파시키는 대승을 거둔 인도양 함대가 단 1척의 전투함도 잃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전투가 벌어졌던 인근의 지명을 따서 채널 제도 해전이라 부르게 되는 이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은 조선의 태조급 전함의 막강한 위용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태조급 전함은 포격만이 아니라 그 거체로 목조인 프랑스의 함선들을 들이받는 충파전술까지 사용했다.
튼튼하게 만들기로 유명한 조선 함선의 강도를 다시 한 번 증명한 전투였다. 쏘고 들이박고. 밀어붙이는 태조급 전함을 따라 전진하면서 사방으로 포를 쏘아대는 조선군 함선들의 일제포격을 프랑스 함대가 버텨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20여척의 프랑스 함선들이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채 간신히 도주한 것이 다행일 정도의 대패였다.
채널 제도에서 프랑스가 전력을 기울여 구성한 함대를 꺽은 조선군 연합함대는 그대로 전진, 목적지인 옹플레르에 상륙 작전을 전개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사전 상륙포격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해변으로 인도양 함대 소속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에서 내린 연락선들이 붙어 시크 여단 병사들을 토해냈다.
그들이 상륙거점을 확보하고 곧바로 옹플레르 항구의 접안시설을 점령하자 비로소 11수송함대의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들이 접안해서 제11장갑병단을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인도양 함대 소속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도 접안해서 차례차례 시크 여단용 기동마차와 보급품들을 하역했다.
상륙이 완료된 것은 다음 날 점심나절이 되어서였다. 상륙되어야 할 마차와 말들의 수가 워낙 많았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상륙을 마친 제11장갑병단이 선두에 서자 곧바로 시크여단이 뒤를 따랐다. 기동마차와 보급마차를 합해 자그마치 2천6백대에 달하는 마차들이 길게 대열을 이루며 달려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
그렇게 조선군 제11장갑병단과 시크 여단이 향하는 방향에는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가 위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