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300화 (300/325)

제300화. 통로 사투(死鬪)

국경을 돌파해야 하는 에스파냐군으로써는 어떻게 하든 조선군의 방어선을 깨고 안으로 파고들어야만 했다.

그로인해 다수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이 형성한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작전을 계속해서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정찰이 실패하면서 개시된 부대 전진에서 지속적으로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면서 돌파가 실패를 거듭하자 이내 에스파냐군 지휘부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자신들이 유일하게 조선군보다 우위에 있는 병력적 우세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것이다. 프랑스-에스파냐 연합군 1대를 구성하고 있는 에스파냐군에 총 돌격이 명령되었다.

대략 11km를 사이에 두고 형성된 2개의 고지요새 사이에 존재하는 4개의 통로를 향해 거의 6만에 달하는 병력이 일거에 돌격을 감행했다.

하나의 통로에 1만5천 정도의 병력이 몰려든 셈이었다.

조선군의 포격이 쏟아졌지만 그것으로 막아내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포격으로 죽어 나동그라진 동료의 시신을 밟으며 통로를 달려온 에스파냐군 병사들의 시야로 엄폐호(벙커)에서 달려 나오는 한 조선군 병사가 보였다.

무슨 이유인지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던 바위로 만든 엄폐호(벙커)에서 뛰쳐나온 그를 향해 에스파냐군 병사들이 일제히 총을 쏘았다.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총알이 튀었다.

마치 메뚜기 뛰듯 겅중겅중 뛰며 용케 그 총알 세례를 피해나간 조선군 병사가 무언가에 불을 붙이려 들었다.

“막아!”

위험하다고 판단한 한 에스파냐군 지휘관의 고함에 다시 에스파냐군 병사들의 총격이 집중되었다.

퍼버벅.

사방으로 총탄이 튀는 와중에 19고지요새 4통로에 배치되어 있던 발파병이 이를 악물고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이었다.

퍽.

오른쪽 가슴에 마치 쇠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안기며 총탄이 발파병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컥.”

풀썩 뒤로 젖혀졌던 몸을 바로세우는 발파병의 오른쪽 가슴이 온통 피로 범벅이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가슴을 훑어본 발파병은 자신의 가슴에 흥건한 것이 모두 피라는 것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발파병의 모습을 엄폐호(벙커)에서 지켜보던 이태민 상사가 뛰쳐나갔다.

총격충격(총격패닉)에 빠진 것을 확인한 것이다. 언젠가는 제정신을 차리겠지만 지금처럼 적군의 집중사격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라면 그 잠시의 충격(패닉) 상태에서 백이면 백, 다 죽는다.

그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또 한명의 조선군 병사가 달려 나오는 것을 본 에스파냐군 병사들의 사격이 이태민 상사에게로 집중되었다.

“뭐해, 엄호!”

현식총 사수인 길장우 중사의 고함에 나머지 2명의 병사들이 다총을 연속으로 쏘아댔다. 그들과 함께 길장우 중사의 현식총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적을 향해 퍼부어졌다.

빗발치는 총탄사이를 뚫고, 피탄 된 발파병에게 도착한 이태민 상사가 황급히 앉아있는 발파병을 누이고는 심지를 찾았다.

여전히 발파병의 손에 있던 부싯돌로 심지에 불을 붙인 이태민 상사가 발파병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일으키고 냅다 달렸다.

그런 둘을 향해 조선군의 사격을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쏘아대는 에스파냐군의 총격이 날아왔다.

퍼벅.

“윽.”

뛰다말고 나동그라진 발파병의 허벅지가 붉게 물들었다. 그것을 확인한 이태민 상사가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파병을 들쳐 업고 뛰기 시작했다.

30보(약54M) 남짓한 거리가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이태민 상사로써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렇게 간신히 엄폐호(벙커)로 돌아온 이태민 상사가 발파병을 내려놓자 의무병이 황급히 다가와 발파병의 상처를 살폈다.

가슴과 허벅지에 총상을 입긴 했지만 다행히 큰 혈관이나 장기를 상하지는 않았던지 생명엔 지장이 없어보였다.

그걸 보고하려고 고개를 돌렸던 의무병의 눈이 커졌다.

“오, 오장님!”

“왜?”

“가, 가슴······.”

그 말에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이태민 상사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가슴에서 시작된 피가 이미 다리까지 흥건히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쳐 업고 달려오는 동안 적병이 발사한 총탄이 등을 관통해 가슴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의무병의 말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이태민 상사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휘청거리다 쓰러졌다.

놀란 의무병이 달려들어 상태를 확인했지만 상황이 최악이었다. 군복을 적신 피의 양으로 보아 큰 혈관을 끊어놓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쓰러진 이태민 상사의 의식이 급속도로 떨어지더니 고개가 힘없이 뒤로 젖혀졌다. 의무병이 황급히 그런 이태민 상사의 목에 손을 댔을 땐 이미 맥박이 사라지고 없었다.

현식총을 쏘던 길장우 중사가 다급히 물었다.

“어때?”

길장우 중사의 물음에 의무병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이를 악문 길장우 중사가 거칠게 현식총을 퍼붓던 그 순간.

쾅과과과쾅!

커다란 폭음과 함께 통로 양측에 쌓아 올려두었던 바위들이 지지대가 연속적으로 파괴되면서 통로 안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발파병과 이태민 상사가 목숨을 걸고 붙이 심지의 불이 매설되어 있던 화약을 폭파시킨 것이다.

자그마치 50보(약90M) 길이의 통로 양측의 바위가 쏟아져 내리면서 그 안에 들어있던 에스파냐군 병사들을 모조리 깔아뭉개버렸다.

자욱했던 먼지가 가라앉자 온 통로를 채운 바위들이 보였다.

비로소 다소의 여유를 찾은 길장우 중사가 숨이 끊긴 채 누워있는 이태민 상사를 확인하고는 허탈한 한숨을 내어쉬었다.

가슴과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발파병은 의무병이 놓은 진통제와 안정제로 잠이 들어있었다.

“괜찮겠냐?”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만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후송해서 제대로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고지요새나 후방 지휘본부로 전령을 보내 후송대를 요청해야 했다.

하지만 길장우 중사 자신을 포함해 이제 가용병력은 셋뿐이 남지 않았다. 여기서 전령의 임무를 위해 병사를 더 빼도 좋을지 길장우 중사는 선 듯 결정 할 수 없었다.

통로 양측의 바위를 무너트려 길을 막았다지만 적은 아마도 그렇게 통로를 막은 저 바위들을 넘어 다시 몰려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것에 갈등하던 길장우 중사의 귀로 총안구를 통해 바위들로 가로막힌 어둠속의 통로를 노려보던 병사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적입니다!”

결국 의무병을 향해 고개를 저어보인 길장우 중사가 다시 현식총을 잡았다. 의무병도 황급히 달려와 다시 총안구로 다총을 내밀고 사격을 개시했다.

살자면, 살아남자면 어떻게 하든 버텨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요란한 총소리가 엄폐호(벙커)에서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4통로와 비슷한 상황이 나머지 3개의 통로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적은 막대한 출혈에도 불구하고 통로를 뚫어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미 각 통로마다 5천에 가까운 병력이 조선군의 포격과 통로의 저항으로 전사했다. 돌격이 명령된 지 겨우 1시간 남짓한 사이에 에스파냐군은 벌써 1만5천에 달하는 병사들을 잃은 셈이었다.

우려했던 대로 조선군의 화력은 악마적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에 굴복하면 돌파는 물 건너간다는 것을 에스파냐군 지휘부는 잘 알고 있었다.

전군에 돌격을 독촉하는 독전대가 파견되었다. 망설이는 병사들의 뒤에서 칼을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는 독전대의 엄포에 병사들이 쏟아지는 조선군의 포화 속으로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

대서양군 사령부에 배치된 비행선들 중 지상포격용 날틀042는 다시 소집되어 돌아간 날틀03과 달리 여전히 대서양군 사령부 휘하에 남아있었다.

북미 점령 작전에 동원되어 있던 해당 비행선들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접경에서 이상 움직임이 감지된 시점에 이미 리스본으로 출동한 상태였다.

그들은 리스본 상공에 도착한 직후, 착륙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에스파냐와의 국경으로 급파되었다.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대서양군으로 배치받기 직전 5대의 날틀042를 추가로 배치 받아 모두 10대로 구성된 91지상지원 비행선대는 할롱에서 활약했던 전적(戰績)을 가진, 조선에서는 가장 전투경험이 많은 지상지원 비행선대였다.

이들을 이끄는 이용국 장령은 육군으로 치면 1천명으로 이루어진 단급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었다. 그가 무선전신을 통해 전달된 전선 형성상황을 확인하고는 휘하 각 비행선 기장들에게 통보했다.

“적의 공격이 집중된 지역은 모두 세 곳, 3대씩 나누어 맡는다. 대장선은 1개 편대와 함께 우리 조선군 접경지역인 19고지요새와 20고지요새 사이를 맡겠다. 2대와 3대는 각자 위치로 이동해서 적의 공격을 분쇄한다.”

이용국 장령의 명령에 복명한 비행선들이 3대씩 짝지어지더니 그중 2개 편대 6대가 분리되어 떨어져나갔다.

저들은 북포르투갈의 두 곳에 집중되고 있는 공격 지점으로 이동해 방어에 나설 것이었다.

영악하게도 프랑스-에스파냐 연합군은 조선군 접경지역보다 제후국들이 담당하는 북포르투갈 지역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 두 곳을 집중 공략 중이었다.

제후국 병력의 무장상태가 조선군보다 떨어진다는 것을 노린 나름대로 회심에 찬 공격이었겠지만 포대가 배치되면서 고지요새는 조선군 관할이 되었다.

고지요새에 배치된 수비대병력 구성은 적이 예상하는 대로 무장이 다소 딸리는 제후국 경비대가 대다수를 이루지만 통로를 틀어막은 엄폐호(벙커)에 배치된 병력은 조선군이었다.

조선군 접경지역이나 제후국령 접경지역이나 고지요새에 배치된 포와 통로의 방어력은 전 국경선이 동일하다는 뜻이었다.

이용국 장령의 생각대로 19고지 4통로와 같은 상황이 거의 모든 전투지역에서 공히 벌어지고 있었다. 조선군 방어병력은 적에 비해 한참 열세인 병력으로 사력을 다해 적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돕기 위해 3개의 편대로 나뉜 91지상지원 비행선대의 날틀042들이 최고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19고지요새 4통로 엄폐호(벙커) 전방의 통로엔 바위 위로 새카맣게 적병이 넘어오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총열을 세 번이나 갈아가면서 현식총을 퍼붓고, 두병의 병사가 사력을 다해 다총으로 저지사격을 가하고 있었지만 적병의 수가 너무 많았다.

결국 바위지대를 돌파해 평지로 내려선 적병들이 나왔다.

두 명의 소총수가 그런 적병을 상대하기 위해 사격선을 변경하자 통로 위 바위들을 넘어오는 적병의 수가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저지 사격의 한도를 넘어서는 적병이 엄폐호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조금만 넘어가면 엄폐호가 적에게 넘어갈 수 있을 위기의 순간이었다.

투두두두두두둥.

현식총과 유사하면서도 훨씬 묵직한 사격음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엄폐호(벙커)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적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비로소 묵직한 총소리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길장우 중사의 환희에 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비행선이다! 비행선이 왔어! 죽여! 저 개새끼들 다 쓸어버리라고. 으하하하하.”

길장우 중사의 외침이 들리기라도 한 듯 통로 상공에 도달한 날틀042 1대가 3문의 기01 총좌를 통해 무차별 사격을 지상에 퍼부어댔다.

3분의 2치(약20mm)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다. 에스파냐군은 저항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한 하늘에서 가해진 공격에 일패도지했다.

수천의 에스파냐군 병사들이 통로를 막고 있던 바위 위에서 숨거나 도주할 공간도 없이 삽시간에 도륙 당했다.

비행선에 싣고 있던 기01 총탄을 거의 다 퍼붓고 있는 날틀042 비행대원들은 불안했다. 여전히 통로 너머에는 상당수의 적군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보급을 위해 돌아갔을 때 저기 있는 적이 다시 몰려들어 아군을 도륙하고 저지선을 돌파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비행대원들에게 새로 들어온 무선전신을 읽은 항법사가 놀란 음성을 토했다.

“날틀041들이 오고 있답니다. 도착까지 5분! 그 중 한 대가 우리 쪽의 정확한 위치를 요구합니다. 보급해줄 총탄과 연료를 싣고 있답니다!”

항법사의 외침에 비행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야전 보급은 비행선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적이 가까이 있는 지상에서 보급이 진행되는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행대원들은 자신들이 전선에서 물러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감사했다.

기장의 명령으로 좌표를 불러주는 항법사의 음성은 흥분으로 물들어있었다.

이날 프랑스-에스파냐 연합군은 세 곳의 전장에서 모두 국경을 돌파하는 것에 실패했다. 통로를 틀어막고 있던 조선군의 처절한 저항과 신속한 날틀042의 지원 사격 덕이었다.

단 6시간의 전투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군은 도합 9만의 피해를 입고 전선에서 물러났다. 살아남은 7만의 병사들 중에서도 절반가량은 부상자들이었다.

그들이 물러난 시점, 라고스를 출발한 연합함대가 11장갑병단과 시크여단을 태운 채 전속으로 프랑스의 옹플레르를 향해 항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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