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제1차 유라시아 전쟁
프랑스-에스파냐 연합군 중 에스파냐군으로만 이루어진 제1대 6만의 병력은 에스파냐 서부 도시들 중 하나인 바다호스를 통해 포르투갈 접경으로 접근했다.
이 루트가 공격 방향으로 결정된 것은 과거 포르투갈을 두고 조선과 에스파냐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에스파냐군에게 뼈아픈 패배의 상처를 입혔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에스파냐군은 그 패배의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 선정된 지역을 향해 제1대가 노도처럼 밀어닥쳤다.
최종 전투대열을 구성하기 위해 사방으로 분산하여 은밀히 이동하던 것을 버리고 병력을 집중하자, 열기구를 사용하는 조선군 정찰비행대가 그 모습을 포착했다.
곧바로 해당 사실이 주변 방어군 지휘부에 전달되고 이내 남포르투갈도 북부, 포르투갈 전역으로 보면 중부에 해당하는 지역 전체에 비상이 발령되었다.
해당 사실은 대서양군 사령부로도 재빨리 보고되었다.
대서양군 사령부는 에스파냐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정상적인 군대의 움직임이 한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것도 대규모 병력을 동반한 채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참모들은 이 비정상적 움직임을 침공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대서양군 사령관인 이억기는 망설이고 있었다. 에스파냐가 그냥 동맹국이 아니라 차기 국모인 태자비의 모국이었기 때문이다.
자칫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일이라면······. 그냥 자신의 목하나 날아가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로인해 이억기는 접경에 주둔한 병력 전체에 전투대기 태세를 발령했음에도 전쟁이라는 단어를 확정적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조선군 최고 사령부에는 현 상황을 가감 없이 모조리 전했다.
대서양군 사령부의 보고를 받은 최고 사령부도 망설이긴 마찬가지였다. 태자비의 모국이 조선을 침공했다는 것이 명확해 질 때 벌어질 일들은 감히 상상하기에도 싫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온 공주였음에도 태자와 태자비의 사이는 좋았다. 아직 나이들이 어려 ‘금슬이 좋다’라고까지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굉장히 친하고, 서로를 위해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궁인들은 승하하신 황후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승하하시기 이전까지 황후와 태왕 사이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이들이 바로 태자와 태자비였기 때문이다.
궁인들이 ‘눈빛만 마주쳐도 꿀 떨어지는 사이’라고 수군거렸던 태왕과 황후의 금슬은 황궁의 담장을 넘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태자비의 모국이 조선을 침공한다면······. 적국의 공주를 태자비로 둘 수 없다는 상소가 빗발칠 것이고 태왕이 그것을 가납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최고 사령부의 고위 무관들은 그 상황에 받게 될 태자의 상처를 두려워했다. 연산군 시절을 거쳐 온 조선은 자고로 상처 입은 군왕의 폐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걱정을 안고 지켜보던 가운데 기어코 에스파냐군이 국경을 넘어 조선의 남포르투갈도를 공격했다.
훗날 역사서에 제1차 유라시아 전쟁이라고 기록되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공격 받고 있다’ 라는 보고를 처음 들었던 이억기도, 그에게서 보고를 받은 최고 사령부의 고위 무관들도 첫 순간엔 모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오지 말았으면 했던 순간이 다가왔지만 그것에 당황해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대서양군 사령부는 곧바로 대서양군 전체에 전투상황을 발령했다. 모든 작전 병력은 전선으로 투입되었고, 예비 병력과 물자도 전시 계획에 의거해 전선으로 출발했다.
주둔 병력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제후국령 북포르투갈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제후국 경비대 병력이 집중되며 병력 강화가 이루어지겠지만 남포르투갈도의 관할 접경지역에 배치된 조선군의 경우가 문제였다.
유일한 예비 병력이었던 기동타격대를 이미 북포르투갈로 출동시킨 뒤였기 때문이다.
사전에 탐지되었던 군대도 이미 북포르투갈의 접경을 돌파하기 위해 작전을 개시한 상황이었기에 당장 병력이 부족한 북포르투갈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동타격부대를 회군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로인해 남포르투갈도 접경지역에 주둔한 조선군 경비 병력에 심각한 병력부족 사태가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공격에 나선 에스파냐군의 병력이 너무 많았다.
일전에 남포르투갈도에서 현지인들로 모집되어 구성된 포르투갈 해병여단은 현재 퀘벡을 통해 북미 점령전에 동원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들이 북미 점령 작전에 투입된 이유는 모집된 병력이 주로 남미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포르투갈인들로 이루어져있었기 때문이다.
남미와 북미의 상황이 다소 다르다고는 해도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군사 활동을 경험한 이들이니 북미활동에도 적응이 빠를 것을 기대하고 투입한 것이었다.
대서양군 사령부는 급한 대로 그들에 대한 긴급 동원을 지시했지만 퀘벡까지 집결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일이 필요한 그 병력은 당장 급한 남포르투갈도 주둔 조선군의 입장에선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리스본에 위치한 총독부 산한 포르투갈 방어군 사령부가 그런 사태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사령부 내에서는 당장 리스본 수비대라도 빼서 파견하자는 말들이 나왔지만 최후의 후방 부대에 해당하는 리스본 수비대를 전방으로 빼냈다가 전선을 돌파라도 당하는 날에는 후방 지역이 무방비 상태로 적군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을 걱정한 방어군 사령관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리스본에 주둔 중이던 동일본 출신 대한제국군 지휘관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들을 전선으로 보내달라고 청원했다.
자신들이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동일본의 죄를 씻겠다고, 그것으로 동일본 전체에 내려진 형벌이 가벼워 질수만 있다면 병력 전체가 전사해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그들의 우국충정이 절절이 느껴지는 요청이었지만 방어군 사령관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기엔 대한제국군의 무장과 화력이 조선군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전선에서 사용하는 화기가 다른 부대가 뒤섞이는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미 대한제국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조선군은 그 문제점을 혹독하게 경험했었다. 대한제국군 작전구역에 투입되었던 조선군이 다총용 총탄과 삼포용 포탄을 지급받지 못해 수탄과 구포탄만으로 사흘을 버텨야 했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상황이 아니라 북미 점령전 지원 임무 수행 와중에 벌어진 일이라 약간의 여유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 피가 튀는 전투의 와중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결과가 나왔을 경험이었다.
그러니 그런 위험성을 안고 대한제국군을 조선군 주둔지로 투입할 수는 없었다.
그것에 망설이는 방어군 사령관에게 한 참모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수비대를 전선으로 보내고, 리스본 방어를 동일본 출신 대한제국군에 맡기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참모의 제의를 사령관이 즉각적으로 수용했고, 수비대에 출동준비가 명령되었다.
일부 참모들이 동일본 출신을 믿을 수 없다며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방어군 사령관은 그 반대를 묵살했다.
리스본 성벽을 따라 배치되어있던 32문의 삼포가 내려지고, 대한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이포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군수 참모가 대한제국군 병력 중 일부를 데리고 리스본 전략물자 사전 전개 창고로 달려가 나총용 탄환과 이포용 포탄을 분출했다.
다행히 퀘벡 전략물자 사전 전개창고와 함께 대서양군 보급 임무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던 리스본 전략물자 사전 전개창고에는 다량의 나총용 탄환과 이포용 포탄이 보관되어 있어서 그 분출에 무난히 대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동일본 출신 대한제국군에 리스본을 맡겨둔 수비대가 급히 전선을 향해 출동했다.
이것은 접경지역 전선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날아 온지 12시간만의 일이었다.
전선은 적의 초기 공격을 잘 분쇄해 내고 있었다.
과거의 패배를 경험한 에스파냐군은 초기 돌파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대신 소규모 병력을 사방으로 투입해 대규모 병력의 진출이 가능한 곳을 찾고 있었다.
그 덕에 겨우 4문 내지 8문 정도를 동원 할 수 있었던 고지요새의 포대들이 침투한 적군을 분쇄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찰부대 운용이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군 제1대 지휘부는 곧바로 전군을 동원한 돌파전략으로 변경했다.
다만 이 돌파 시점을 야간으로 설정했다.
그나마 조선군의 정찰비행대의 관측 시야가 좁아지고, 조선군 포대의 정확도가 낮아지는 야음을 틈타기로 한 것이다.
여전히 6만에 가까운 에스파냐군이 돌격선에 대기한 채 긴장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각 전선에 투입된 조선군도 긴장된 상태에서 전원이 완전무장을 갖춘 채 요새 성벽과 엄폐호(벙커)에 투입되어 있었다.
요새에 투입된 병력은 그나마 높은 고지와 단단한 요새 성벽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조금 더 안정되어 있었지만 개활지나 다른 없는 곳에 설치된 엄폐호(벙커)에 투입된 병사들은 높은 긴장도로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
더구나 엄폐호(벙커)에 투입된 병사들의 수는 겨우 1개 오인 5명에 불과했다. 적이 지금이라도 넘어올지 모르는 통로를 노려보는 병사들의 중압감이 상상이상으로 컸던 것이다.
19고지요새 4번 통로를 맡은 이태민 상사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는 4명의 수하들을 책임지고 지휘해야 하는 오장이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수하들을 독려했다.
“장우야. 잘하자. 너한테 우리 엄폐호(벙커) 의 운명이 달렸다.”
이태민 상사의 말에 현식총 사수를 맡고 있던 길장우 중사가 긴장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에스파냐 새끼들 대가리만 보여도 날려버릴 테니까.”
호기롭게 답하는 길장우 중사의 어깨를 두드려준 이태민 상사가 현식총 총탄을 점검했다. 애초에 통로 방어를 현식총의 연사에 맡겨둔 작전을 구상해둔 까닭인지 각 엄폐호에 보급된 현식총 총탄은 5만발에 달했다.
분당 5백발의 발사속도를 가진 현식총의 사격속도를 감안해도 1백분의 연속사격이 가능한 분량이었다. 전쟁의 전개 양상을 감안하면 거의 며칠 분에 해당하는 총탄인 것이다.
총탄의 부족은 겪지 않겠다는 것에 안도하는 이태민 상사의 귀로 포격음이 들려왔다. 고지요새에서 포를 쏜다는 것은 통로로 적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통로는 두 가지로 구성된다.
전방 통로는 아무런 인공시설이 없는 자연 통로로 넓이가 상대적으로 넓다. 그 거리는 통로의 절반에 해당한다. 고지요새의 포격이 집중되는 구역이 바로 그 지역이다.
그에 반해 안쪽의 절반에 해당하는 통로는 길 양쪽으로 바위를 조선시멘트로 발라 쌓아놓아 폭을 좁혀두었다.
마차 1대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달려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보병의 경우 완전무장한 병사 셋, 밀집대형일 경우 5명까지도 한 번에 통과가 가능했다.
그렇게 좁혀진 통로의 안쪽 끝부분에서 20보(약36M) 정도 떨어진 좌측면에 바위를 조선시멘트로 쌓아 만든 엄폐호(벙커)가 위치해 있었다.
통로 끝과 거리를 둔 것은 길 양쪽에 쌓아올린 바위들을 폭파시켜 무너트렸을 경우 파편에서 엄폐호(벙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삼포의 포격소리와 그렇게 발포된 포탄의 폭발음이 자잘한 진동과 함께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아직 고지요새에 배치된 병력의 소총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적병이 아직 고지를 타고 오르지는 못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경우 적병력이 통로에 집중 될 수 있음을 뜻했다. 그것에 엄폐호(벙커)의 총안구로 밖을 살피는 이태민 상사의 긴장을 높이고 있었다.
“온다.”
이태민 상사의 말에 병사들의 긴장도가 확 올라갔다.
“아직! 기다려. 놈들이 안쪽 통로로 완전히 들어선 직후에 통로벽을 따라 매설된 지향뢰를 터트린다.”
이태민 상사의 명령에 지향뢰 발파를 담당한 병사가 발파선을 잔뜩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각 통로당 매설된 지향뢰의 숫자는 850개 정도였다. 이것이 대략 1백보(약181M) 정도의 안쪽 통로 양측으로 빼곡히 매설되어 있었다.
들어오면 누구도 살아나갈 수 없는 죽음의 함정인 셈이었다.
그 죽음의 함정으로 에스파냐군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니 고지요새의 포격을 돌파하는 가운데 상당한 피해를 입은 모양이었다.
그런 에스파냐군이 통로의 끝부분에 거의 도달했을 때였다.
“지금!”
이태민 상사의 명령에 발파병이 지향뢰의 발파선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좌우측 통로에 매설된 맨 앞의 지향뢰 3개씩과 연결된 발파선이 당겨져 폭발하면 그 지향뢰들과 연동되어 연결된 나머지 지향뢰가 모조리 폭발하는 형식이었다.
쾅, 콰광, 쾅쾅쾅쾅쾅.
처음 몇 발로 시작된 폭음이 귀가 멍멍할 정도의 연속적인 폭발음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뒤덮인 포연으로 어둠속의 통로가 가득 찼다.
바람이 불면서 포연이 걷히자 어둠속을 비추는 달빛에 드러난 통로는 지옥도 그 차제였다. 거의 천단위의 적병이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찢겨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피 냄새가 훅하니 바람을 타고 밀려들었다.
몇몇 병사가 그 피 냄새에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구토를 했다. 시큼한 구토 냄새와 비릿한 혈향이 뒤섞여 참기 어려운 냄새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것에 반응하기도 전에 또 다시 고지요새의 포격을 뚫어낸 에스파냐군이 밀어닥쳤다.
적은 병력적 우세로 저지선을 돌파할 요량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다시 몰려오는 적병을 바라보던 이태민 상사의 음성이 울려나왔다.
“통로벽 발파 준비!”
이태민 상사의 명령에 발파병이 이번엔 통로벽에 설치된 화약과 연결된 심지를 움켜잡았다. 폭약에 연결된 심지의 길이 상, 적이 통로에 절반정도 돌입했을 때 심지에 불을 붙여야 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붙여!”
이태민 상사의 명령에 발파병이 화약심지에 불을 붙였다. 곧바로 심지가 타들어가며 매설된 화약을 향해 빠르게 전진해 나갔다.
한데······.
피식.
무슨 이유인지 심지의 불꽃이 중간에서 꺼졌다.
당황한 발파병과 이태민 상사의 눈이 마주쳤다. 그것도 잠시 발파병이 황급히 엄폐호(벙커)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떻게든 꺼진 심지의 불꽃을 다시 붙여 벽을 무너트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적병이 그대로 밀어닥칠 테고 아무리 엄폐호에 현식총을 배치했다지만 절대로 버텨내지 못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뛰어가는 발파병의 모습에 이태민 상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엄호 사격!”
드르르르륵.
탕탕탕탕.
현식총과 다총의 사격음과 함께 총탄이 통로로 들어선 에스파냐군을 향해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