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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98화 (298/325)

제298화. 등 뒤에 꽂힌 비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간의 국경선은 대략 2천2백리(약864km)에 달한다. 이중 조선군 관할지역에 해당하는 남포르투갈도에 접한 접경 지역은 대략 920리(약361km)였다.

나머지 1,280리(약503km)정도가 제후국령 북포르투갈 접경지역으로 제후국들이 보내놓은 경비대의 관할 지역이었다.

이 모든 지역에 대서양군은 망루선을 조성했다.

망루선을 이루는 각 고지요새간 거리는 대략 30리(약11.8km) 정도로 전체에 걸쳐 87개의 고지요새가 건설되었다.

1개의 고지요새에는 1개의 임무분대가 배치되었다. 임무분대는 최근 조선 육군 전체가 채택하고 있는 부대 운용 단위로 10명인 분대병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작전의 한계가 거론되면서 다시 2개 분대로 하나의 작전부대를 구성한 것을 뜻했다.

과거 분대를 25명으로 구성하던 시절로 돌아갔다는 부정적 평가가 일부에서 있긴 했지만 현장에서는 꽤나 좋은 작전운용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투입된 임무분대의 수가 87개, 병력수로 보면 1,740명. 2개 단 규모에도 못 미치는 병력으로 에스파냐와의 접경을 수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한 방어력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대서양 사령부가 선택한 방법은 고지요새에 포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고지를 선택한 탓에 1문의 무게가 수톤씩 나가는 포를 해당 고지 정상부에 건설된 요새로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라서 대서양군 사령부가 선택한 것은 구포를 설치하는 안이었지만 구포의 사거리가 겨우 5백보(909M)에 불과해서 사실상 포기상태였다.

그렇게 사장되다시피 했던 고지요새 포대화 계획이 비행선들의 배치로 다시 살아났다.

전투폭격용이었던 날틀03이나 지상포격용인 날틀042로는 수행 불가능한 이 계획을 가능하게 했던 주역은 화물수송용인 날틀041로 20대가 대서양군 사령부로 배치되면서부터였다.

사실 이 날틀041은 고지의 높은 위치로 인해 인력수송에 의존하고 있던 보급품 수송을 조금 더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대서양군 사령관 이억기가 태왕에게 직접 상신하여 배치 받은 전력이었다.

그렇게 배치 받은 날틀041의 수송능력 시험비행을 참관하던 이억기가 이것들을 이용해 포를 고지로 올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대당 1천관(약3.7톤)의 화물수송능력을 가지고 있던 날틀041이라면 어지간한 포는 모두 수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다시 난관에 부딪쳤다.

날틀041의 화물적재부가 포를 수납하기엔 적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의 고심 끝에 대서양군 사령부가 고안해낸 방법은 비행선 몸체 아래에 밧줄로 화물을 묶어서 이동시키는 방안이었다.

화물의 무게가 무게인지라 섬유밧줄이 아니라 해군의 신형 증기철선들에서 닻줄로 사용하는 철제 쇠사슬이 채택되었다.

그렇게 쇠사슬로 연결된 포를 날틀041이 큰 무리 없이 들고 부상하면서 대서양 사령부의 계획이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남포르투갈도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의 병력은 7개 단, 7천이었다. 해당 병력들은 방어부대라는 특성에 따라 포병을 강화한 부대편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로인해 이 7개 단이 보유하고 있던 삼포의 수가 정규편성인 140문의 3배에 달하는 420문이었다. 대서양군 사령부는 이 삼포들을 고지요새로 분산 배치하고자 했다.

다만 이 계획은 대서양군 자체의 결정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남포르투갈도 주둔 조선군을 제후국령 북포르투갈에 투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서양군의 작전지역이 양 지역 모두를 아우르고 있긴 했지만 엄연히 북포르투갈은 제후국의 영토였다. 더구나 남포르투갈도 주둔 조선군을 전용하기 위해서는 조선군 육군총사부의 동의도 필요했다.

해당 사안을 보고받은 광해가 조선군의 북포르투갈지역 투입의 필요성에 대해 물었을 때 대서양군 사령관인 이억기가 한 답은 간단했다.

‘제후국 포병대가 가진 포가 일포이기 때문입니다.’

대서양군 예하 대한제국군이 나총과 이포로 무장된 것과 달리 제후국 자체 병력은 여전히 일총과 일포로 무장되어 있었다.

북포르투갈에 파병된 제후국 병력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일포의 사거리 때문이었다. 일포는 1천5백보(약2.7km)의 유효사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30리(약11.8km)에 달하는 고지요새간의 거리를 감안하면 포격 가능 범위가 한참 모자람을 뜻했다.

최근 장원의 포탄 개발조에서 개발한 3치(90mm) 구경(口徑) 사거리연장탄의 경우, 개량된 무연화약을 채용해서 5천보(약9km)까지 날아간다지만 아직 양산단계 이전이어서 실전배치는 되지 않았다.

다행히 고지라는 지형적 이점이 있어 기존 포탄을 사용해도 일포의 최대사거리인 2천보(약3.6km)까지는 무난히 날아간다. 그래도 여전히 고지요새간 거리 전체를 포격가능 범위로 넣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이에 반해 조선군이 가지고 있던 삼포는 최대사거리가 4천보(약7.2km)에 달했다. 반대편 고지요새에서 마주보고 있는 고지요새까지는 닿지 않지만 양쪽의 요새고지가 사격을 가하면 두 고지요새 사이의 전역을 타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에 입각해 조선군 포대를 제후국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북포르투갈 고지요새까지도 배치하길 청원했던 것이다.

이억기의 설명에 광해가 대서양군 사령부의 요청을 재가했다.

태왕의 재가를 얻은 대서양군 사령부는 즉시 조선군 포대를 나누어 고지요새에 배치했다. 각 고지요새에 배치된 삼포의 수는 4문씩으로 이렇게 배치된 삼포의 총수는 348문이었다.

나머지 72문 중 40문은 기동타격부대로 지정된 단에 배치되어있었고, 32문은 리스본 성곽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이 배치작업이 마무리 된 것은 프랑스-에스파냐 연합군이 포르투갈과의 접경지역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하기 2달 전이었다.

대서양군 사령부의 고지요새 화력강화방안이 실현되었지만 포르투갈 주둔군 지휘부의 입장에서 그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해 보였다.

유사시 30리(약11.8km) 거리에 포격을 가할 수 있는 포는 최대치로 8문, 양쪽 모두에 포격을 가해야 할 경우엔 4문에 불과했다.

전 접경지역으로 공격이 분산된다면 모를까 일정부분으로 적군이 집중되어 돌파를 시도할 경우 이 고지요새 화력 강화방안은 오히려 화포의 분산만 가중시키는 패착이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자그마치 대서양군 사령관이 직접 추진하는 계획을 반대할 수 없었던 주둔군 지휘관들은 추가 대책을 마련했다.

일단 각 고지요새 사이의 길목을 제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선에서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조선시멘트를 활용해 인근의 바위들을 연결해서 길목을 좁은 통로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대규모의 병력이 일순간에 통로를 통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거기다 각 통로 옆에 쌓아 올린 바위틈에 폭발탄을 설치해서 유사시 바위더미를 파괴해 통로를 아예 막아버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대량의 지향뢰를 보급 받아 통로 좌우로 매설해두었다.

워낙 많은 통로에 지향뢰가 매설된 탓에 리스본 전략물자 사전 전개창고가 보유하고 있던 지향뢰 33만발 중 9할에 달하는 30만발이 소요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각 통로 안쪽에 현식총좌가 배치될 수 있는 석조 벙커를 지었다.

이곳에도 조선시멘트와 인근에서 캐온 바위가 동원되었다. 마치 콘크리트 벙커처럼 지어진 이 총좌는 어지간한 폭발탄 공격으로는 격파할 수 없는 강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주둔군 지휘부는 이 벙커에 각기 1정의 현식총과 5명으로 구성된 1개 오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각 고지요새마다 이런 통로가 평균적으로 4개씩 존재했다. 그로인해 통로에 조성된 벙커에 배치 된 병력만 2개 단 규모에 육박하는 1,720명에 달했다.

고지요새에 배치된 기존 병력과 삼포를 소지한 채 분산 배치된 포대병력, 그리고 통로 방어부대로 배치된 병력까지 합해 대략 5개단 병력이 접경지역 방어부대로 투입된 셈이었다.

이것은 남포르투갈도 주둔 조선군 7개 단 병력대비 7할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 대량투입에 대해 포르투갈 총독부의 외교 관리들은 동맹국인 에스파냐를 자극할 수 있다는 것에서 상당히 난감해 했지만 주둔군 지휘관들은 꽤나 강경했다.

대서양군 사령부도 부족한 화력을 메운 정책이었기에 환영하는 편이어서 이 계획은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 모든 방어정책이 완료된 것은 우연하게도 빈 동맹에 비밀리에 가입한 에스파냐가 조선의 등 뒤에 비수를 꽂기, 5일전에 완료되었다.

*****

프랑스-에스파냐군은 16만의 대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지휘체계의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에스파냐군 6만으로 이루어진 1대와 10만의 프랑스군을 5만씩 둘로 나누어 2대, 그리고 3대로 구성했다.

이 세 개의 병대로 나눈 프랑스-에스파냐 연합군은 최근의 시류에 따라 전원이 총병과 포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더구나 양국의 포병은 네덜란드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아 생산한 폭발탄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조선으로부터 시작된 폭발탄으로 조선이 공격받게 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조용하고 은밀히 진행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군의 이동이었지만 여전히 접경지역에 열기구로 구성된 비행정찰대를 운용하고 있는 조선군의 탐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문제는 가장 먼저 발각된 움직임이 하필 북포르투갈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해당지역으로 쏠렸다. 아직까지는 에스파냐의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보고를 받은 대서양군 사령부는 북포르투갈에 주둔 중인 제후국 경비대에 비상을 거는 선에서 대응했다.

문제는 제후국 경비대의 병력집중이 계속 늦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각기 다른 제후국들의 관할 영토가 분산되어 있다 보니 집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더구나 제후국 경비대는 대부분이 보병대였다. 후금과 할하에서 일부 기마대를 운용하고는 있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경비대가 수행할 임무가 치안유지 및 점령지 관할이라는 주둔임무에 맞춰져 있어서 추가로 막대한 유지비용이 드는 기마대의 편성률이 낮았던 것이다.

그런 제후국 경비대의 굼뜬 움직임에 다급했던 대서양군 사령부는 리스본에 주둔 중이던 조선군 기동타격부대인 1개 단 병력을 북포르투갈로 긴급 전개시키는 명령을 하달했다.

40문의 삼포를 보유한 기동타격부대가 곧바로 리스본을 떠나 북포르투갈로 향했다.

북포르투갈과 달리 치안 유지임무를 남포르투갈 좌포청과 우포청에 맡겨놓은 조선군은 주둔군의 임무만 수행하면 되었다.

그에 따라 남포르투갈도 주둔 조선군에게 운용 가능한 여유병력은 리스본을 방어하는 리스본 수비대 1개 단 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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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군 사령부에 있어 3차 원정군에 소속된 동일본 출신 대한제국군 병력은 골치 아픈 존재였다.

소집해제 건의는 받아들여졌지만 이들에 대한 귀환조치는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연일 벌어진 반란과 전투로 조선 해군에 유럽까지 수송세력을 돌릴 여유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서남도와 관서도 사태가 일단락 된 직후엔 콘스탄티니예 사태가 터지면서 그런 대기 상태는 길어지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은 여전히 작전 전개와 비상 대기상태에 들어가 있음에도 자신들은 그저 평시대기 상태로 머물고 있다는 것에 동일본 출신 대한제국군 병력엔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렇다보니 계속 퀘벡에 묶어두는 것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판단한 대서양군 사령부는 해당 병력을 리스본으로 빼내기로 하고 포르투갈 총독부 산하 수송선들을 활용해서 조금씩 빼내고 있었다.

무장은 허락되어 있었지만 포탄은 물론이고, 수탄을 비롯한 개인 화기의 총탄까지 모조리 회수된 상태였다.

따라서 1만에 달하는 동일본 출신 대한제국군의 경우 나총과 이포로 무장은 했어도 빈총을 들고 있는 셈이었다. 그들이 여섯 차례에 걸쳐 리스본으로 이동되었다.

그렇게 동일본 출신 대한제국군 병력이 리스본으로 철수를 마친 것은 조선군 기동타격부대가 리스본을 출발해 북포르투갈로 투입된 직후였다.

그런 동일본 출신 대한제국군은 대서양군 사령부의 병력에서는 이미 소집해제 처리 되어있었기 때문에 부대의 이름과 병력의 표시는 작전 상황도에서조차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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