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화. 망루선(望樓線)
온 하늘을 뒤덮고 날아오는 비행선들의 모습을 발견한 콘스탄티니예의 백성들이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요사이 조선과 리스본을 연결하는 날틀052로 인해 유럽에선 사람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배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온통 소문일 뿐, 그것을 실제로 보았다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민간항공운송이 시작된 초기라서 이제 겨우 일주일에 한 대씩 날아다니는 날틀052를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것은 새와 신, 그리고 마녀와 악마뿐이라는 전통적인 믿음이 굳건히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는 날틀03 무리를 목격한 콘스탄티니예의 백성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수만의 콘스탄티니예 수비병들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부 겁에 질린 수비병들이 활을 쏘고, 성벽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를 하늘을 향해 발사한 경우도 있었지만 6천척(약1.8km) 상공을 비행하는 비행선에 닿을 리가 없었다.
콘스탄티니예 상공에 도달한 선도비행선은 13전투비행선대의 대장선이었다. 13전투비행선대의 비행대장이 기함으로 콘스탄티니예 상공 도착을 보고하고, 도심 폭격에 대한 최종 허가를 요청했다.
적군 병사들만이 아니라 적국의 백성들까지 대량 살상이 동반될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보고를 받은 이순신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시.”
이순신의 명령을 확인한 손일원이 큰소리로 복창했다.
“폭격 개시!”
손일원의 복창은 곧바로 통신실의 무선전신을 타고 13전투비행선대 대장선으로 전해졌다.
이순신의 결정을 확인한 비행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폭격수가 폭탄창을 열고, 폭격지점 선정에 들어갔다.
그것을 확인한 비행대장이 도심 쪽으로 비행선을 그대로 진입시켰다.
사전 작전 계획에 의거해 비행선의 폭격 목표에서 콘스탄티니예의 두꺼운 3중 성벽은 제외되어 있었다. 가급 공투탄으로 충분히 격파가 가능한 시설이었지만 지휘부는 성벽은 공중 폭격보다 조금 더 효과적인 파괴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로인해 비행선의 폭격은 도심에 집중되었다.
곧바로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폭탄으로 이루어진 비가.
시이이이잉.
성벽에 올라있던 병사들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모골 송연한 바람 가르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그리고······.
쾅, 콰광, 콰과과과과과광.
거기까지 폭음을 들은 이후엔 제대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콘스탄티니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그마치 2천발의 폭탄이 콘스탄티니예 도심에 쏟아졌다. 한발 한발이 조선 해군이 일장함포에 사용하는 9치(272mm)포탄 5발의 파괴력을 담은 가급 공투탄(공중투하폭탄)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 해군이 사용하는 9치 작렬탄 1만발이 콘스탄티니예 도심에 떨어진 것과 같은 폭격이었던 셈이다.
온 도시가 폭발의 충격으로 마치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고, 엄청난 폭음으로 도시 전역이 채워졌다. 거기에 충천하는 화광과 폭발의 여파로 무너지는 건물들,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들로 콘스탄티니예가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비행선들은 공투탄 투하에만 그치지 않았다.
하부에 장착되어 있는 기01을 마구 퍼부어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폭탄과 총탄이 콘스탄티니예 하늘에서 말 그대로 비 오듯 쏟아졌다.
1차 공격대가 그렇게 도시의 절반을 파괴하고 빠져나가자 곧이어 뒤따라 들어온 2차 공격대를 구성한 1백대의 날틀 03이 나머지 절반의 도시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훗날 콘스탄티니예에만 종말이 내렸다고 회자될 만큼 압도적인 파괴력이 퍼부어진 날이었다.
2차 공격이 마무리 된 직후, 기존에 이순신 함대에 배속되어 있던 11전투비행선대의 날틀03 20대가 날아왔다.
그들은 반쯤 무너진 오스만의 왕궁에 2백발의 폭탄을 퍼부어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린 후 돌아갔다.
그렇게 한창 비행선들의 폭격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순신 함대와 대서양 함대가 콘스탄티니예로 접근했다.
조선군 함대가 접근하는 모습을 확인한 성벽의 수비병들이 비상종을 울렸다.
목표에서 제외된 덕에 무지막지한 비행선 폭격에서 벗어나 있던 수비병들이 곧 닥쳐올 함포사격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 콘스탄티니예의 성벽을 함교에서 쌍안경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순신에게 손일원이 보고했다.
“육지로부터 3천보(5.4km) 거리까지 접근 완료했습니다.”
손일원의 보고에 이순신이 명령했다.
“각함 함교 폐쇄. 장갑판 내려.”
“각함 함교 폐쇄하고 장갑판 내리랍신다!”
손일원의 복창이 울리고 이내 다시 해당 명령은 기함 통신실을 통해 각 함정으로 명령이 전파되었다. 아울러 기함 주돛에도 깃발신호가 올랐다.
이순신 함대와 대서양 함대에 속한 26척의 전투함들이 일제히 함교의 장갑판을 내리고 주포를 콘스탄티니예 쪽으로 돌렸다.
각함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취합한 손일원이 이순신에게 보고했다.
“양 함대 포격 준비 완료!”
그 보고에 이순신이 짧게 명령했다.
“방포!”
이순신의 명령을 신호로 2척의 태조급 전함을 포함한 26척의 조선군 함선들이 일제히 함포 사격을 개시했다.
여기에는 각 함의 주포인 유효사거리 4천보(약7.2km)의 일장함포만이 아니라 부포로 장비되어 있던 유효사거리가 3천5백보(약6.3km)의 삼포도 합류했다.
쐐애애애액.
무서운 파공성을 이끌고 날아오는 포탄을 발견한 콘스탄티니예 수비병들이 재빨리 두터운 성벽의 여장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직후.
콰과과과쾅!
폭음과 함께 병사가 숨은 성벽이 터져나가며 날아가 버렸다.
포탄의 파괴력 중 6할을 전방으로 투사하는 9치(272mm) 작렬탄 수백 발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까닭이었다.
서기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할 때 외에는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던 콘스탄티니예의 성벽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성벽에 몰려있던 수비병 수천이 무너지는 성벽과 함께 매몰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
장원이 개발한 기01 탑재 장갑마차를 가장 먼저 도입한 부대는 조선본토 방어군인 1전단 예하 11병단이었다.
흔히 왕방군(왕도방위군), 또는 황방군(황도방위군)이라 불리는 이 부대는 그 임무 특성 때문에 모두가 기동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둔지가 황도인 신의주로 국한된 데다 말을 타고 달리는 기마대보다 보병의 임무가 월등하게 많은 까닭이었다.
그로인해 기동보병용으로 제작된 장갑마차의 시범운용부대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그에따라 장갑마차가 전격적으로 배치되면서 11병단은 부대 구성이 조금 달라졌다.
종래엔 1개 분대에 2대의 기동마차가 배치되어 있었다면 장갑마차가 배치된 이래 1개분대당 4대의 마차가 배치되었다.
기존의 기동마차에 더해 장갑마차 1대와 여분의 기01용 총탄을 실은 보급마차 1대가 추가된 것이다.
당연히 운용병들을 분대원들로 채워 넣어야 했기 때문에 기동마차에 타고 있던 분대원들을 해당 마차에 투입해야 했다.
장갑마차의 경우엔 마부 2명과 사수 1명, 장탄수 1명으로 4명이 소요되었고, 보급 마차에는 마부 2명이 배치되어야 했다.
따라서 각 기동마차에서 3명씩, 6명의 병사가 차출되어 장갑마차와 보급 마차에 탑승했다. 이러고 나니 하차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보병의 수가 각 기동마차 당 8명에서 5명으로 급감했다.
이로 인한 전투력 감소를 우려했지만 새로 바뀐 구성으로 치른 기동훈련에서 오히려 이전에 비해 3할 이상의 화력 및 전투력 증강이 증명되었다.
기01이 탑재된 장갑마차의 합류로 인한 화력의 확장이 주요 요인이었다.
실례로 그간 통나무 주택을 관통하지 못했던 다총이나 현식총과 달리 장갑마차에 탑재된 기01은 통나무 주택을 순식간에 넝마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화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거기서 더나가 일정부분에서는 벽돌로 만들어진 주택의 파괴도 관측되었다. 모두가 기01에 사용되는 3분의 2치(20.2mm) 총탄의 파괴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장갑마차로 무장된 분대들로 완전히 채워진 11병단을 원수부에서 제11장갑병단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유럽에서 빈 동맹이 결성되기 3개월 전의 일이었다.
황도인 신의주를 떠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이 11장갑병단이 11수송함대에 실려 조선을 떠난 것은 이순신 함대가 부산포를 떠나던 때와 같았다.
이들은 이순신 함대와 함께 이동하다가 마드라스에서 인도양 함대와 연합함대를 구성해서 별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왕의 특명을 받은 인도양 함대는 2척의 유리급 순양함과 2척의 온조급 구축함을 남겨둔 채 11수송함대와 함께 유럽으로 진출했다.
이렇게 진출한 인도양 함대 소속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들 중 일부에는 인도양군 소속 시크여단이 탑승해 있었다.
이 연합함대는 이순신 함대와 대서양 함대가 오스만의 바다로 들어가는 때에도 남포르투갈의 남부 해안도시인 라고스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다.
이 연합 함대에 출동명령이 떨어진 것은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군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과의 접경지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시점이었다.
사실 사전 작전 계획 수립 당시 이 연합함대는 콘스탄티니예 공략이 완료되고 이순신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단하면 곧바로 오스만 제국의 서부 영토 중 한곳인 알렉산드로 폴리스에 상륙작전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조선은 이곳에 상륙해서 에디르네까지 진격하여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가지고 있던 영토를 완전히 고립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연합한 에스파냐가 등 뒤에 칼을 꽂은 것을 확인한 조선군 최고 사령부는 이 연합함대의 상륙지점을 프랑스의 센강 초입에 위치한 옹플레르로 수정했다.
11장갑병단과 기동보병으로 구성된 시크 여단은 적진을 관통, 파리를 점령하라는 조선군 최고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해당 명령에 따라 라고스를 출발한 연합함대가 전속으로 옹플레르를 향해 항진하기 시작했다.
*****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국경에 대한 방어 형태는 과거 조선에 의한 포르투갈 점령전 시절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혼인동맹으로 동맹국이 되어버린 에스파냐와의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할 수도, 긴 참호로 연결된 군사 시설을 만들기도 어려웠던 포르투갈 주둔군은 일종의 거점 방어형태로 전환했다.
일대의 조망이 가능한 고지를 선정하고 해당 고지에 망루와 함께 소규모 부대가 주둔하는 요새를 건설한 것이다.
이렇게 건설된 요새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국경 방어체계가 갖추어졌다. 조선에서는 이 방어체계를 망루선이라 불렀다.
각 고지에 세워진 망루를 연결하여 구성한 방어선이라는 뜻이었다.
이 망루선은 소규모 병력으로 국경 전체를 감시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에스파냐 쪽에서 대규모 공세가 가해질 경우 제대로 된 방어가 어려울 수 있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방어체계가 수립 가능했던 것은 에스파냐를 혼인동맹국으로 믿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믿음이 확고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서양군 사령부는 지속적으로 보완책을 강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대규모 전력을 배치하는 것도, 대규모 군사시설을 설치하는 것도 어려운 탓에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대서양군에 비행선들이 배치되면서 한 가지 길이 열렸다.
이 길을 열어준 것은 전투폭격용인 날틀03이나 지상포격용인 날틀042가 아니었다. 고지에 대한 보급을 용이하게 수행하기 위해 배치된 화물소송용 날틀04, 흔히 날틀041이라 부르는 비행선 덕에 생긴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