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화. 우발적 사태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차면 넘치는 것이 진리다.
조선의 강대함이 긴 시간 지속되면서 조선과 동맹을 맺어 그 힘에 편승하려는 나라가 있는 반면, 그에 맞서 자국우선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나라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조선 본토와 거리가 있는 유럽에서 그런 나라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는데 대표적인 예가 신성로마제국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실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던 제국의 힘을 일으켜 세우는데 반조선 기치를 이용하고자 했다.
물론 드러내놓고 반조선 기치를 내건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여전히 조선군 함선의 해안 포격에 시달리고 있는 네덜란드의 사례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실은 물밑 접촉을 통해 동반자를 구했다.
에스파냐 전쟁에 참여했다가 병사만 잃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의회가 그런 신성로마제국 황실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이미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이자 합스부르크 황조의 본거지였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프로이센 공국이 힘을 보태왔다.
여기에 난데없이 분열되어 있던 러시아 쪽에서 가담해왔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미하일 1세에 의해 로마노프 왕조시대가 시작된 시기였다.
대체로 왕권이 약하다고 알려져 있던 러시아의 참가는 그래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폴란드의 참여는 사정이 달랐다.
이당시 폴란드는 공식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라 불렸는데 1569년에 체결된 루블린 조약으로 두 나라가 하나의 연합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폴란드의 국력은 상당해서 동유럽 최강국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폴란드의 참여는 경쟁 또는 적대관계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에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해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며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던 포르투갈이 조선에 점령당하고, 에스파냐가 힘이 꺾인 상태에서 유럽의 맹주를 자처한 신성로마제국이 본격적으로 반조선의 기치를 내걸 수 있을 만한 세력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이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마티아스는 꽤나 조심스러워서 조금 더 많은 전력을 확보하길 원했다.
어차피 바다에서 조선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신성제국을 포함한 반조선 진영은 대규모 육군을 동원한 정면대결에서 조선을 누르길 원했다.
그것을 위해 육군 전력을 조금 더 강화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사절이 반조선 진영에 가담할 것을 권하는 마티아스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당시 프랑스는 조선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대사를 주고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자칫 신성로마제국이 주도하고 있는 반조선 기치의 정보가 사전에 새어나갈 수 있는 위험한 행보였다.
당시 루이 13세의 치세였던 프랑스는 여전히 국왕의 모후인 마리 드 메리시스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신성로마제국의 사절이 찾아간 것도 국왕인 루이 13세가 아니라 마리 드 메리시스였다. 그녀는 막대한 재화를 선물 받고선 반조선 진영에 가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승낙해버린다.
이미 내려진 마리의 승낙으로 속된 말로 ‘빼도 박도 못하게’ 된 프랑스의 실권자였던 콘치니는 결국 의회를 움직여 신성로마제국이 주도하는 반조선 진영에 가담하게 된다.
이로써 사실상 유럽의 절반이 반조선 진영에 가담한 셈이었다.
이 반조선진영이 막 자신들의 의도와 존재를 공식적으로 과시하려 들기 직전, 생각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니예, 그러니까 현대시대 이스탄불이라 불리고, 우리가 역사시간에 콘스탄티노플이라 듣는 그 도시에서 생각지 못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은 오스만 제국의 한 귀족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하역작업을 하고 있던 조선 상인들에게서 ‘하역세’라는 불법적 명목으로 물품들을 압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상인들은 곧바로 오스만 제국 정부에 항의하고 원상복구를 요청했는데, 이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왕중왕이란 뜻)였던 아흐메트 1세는 이 사태를 크게 보지 않았던 모양인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사태가 꼬이려고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다른 흑막이 개입된 것인지 밝혀진 것은 없지만 사태를 해결했어야 할 오스만의 위정자들은 항구에서 벌어진 조선 상인의 피해를 그저 망신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일부에선 ‘꼴 좋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이 사태를 오스만 제국이 얼마나 안일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사실 조선 상인들의 활동 범위가 서유럽을 지나 동유럽, 나아가 동방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오스만 상인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오스만 귀족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뒷받침하는 그들의 침체는 오스만 귀족 본인들의 풍요로움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보니 자연히 조선 상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 불만들이 팽배하면서 벌어진 일종의 촌극이었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분명 그랬다. 웃고 넘어갈 작은 촌극.
하지만 조선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 상인들을 경쟁상대로 인식한 각국의 상인들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는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물품을 맥없이 빼앗긴 선례를 남길 경우, 그와 유사한 사태가 각국에서 빈발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 상인들의 중심을 이루는 조선무역선단은 어디까지나 황실 상단이다. 조선의 황실이 거래하는 물품을 오스만 제국의 귀족이 빼앗은 셈이었던 것이다.
실무를 담당하는 조선의 상인들은 그것을 묵과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심하던 조선 상인들이 포르투갈 총독부에 도움을 청했다. 이 당시 포르투갈 총독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광무 10년, 그러니까 서기 1612년부터 포르투갈 총독을 맡아오고 있던 기자헌이 갑자기 병석에 누우면서 광해가 비행선을 보내 급히 조선으로 귀국시킨 탓에 비어버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부재였기에 아직 신임 총독은 인선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일을 조선도 서두르고 있었다.
과거 대한제국의 제후국 자격이었던 나고야 왕국과 동일본 왕국이 보유하고 있던 제후국령 북부 포르투갈 지역의 영토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산재한 업무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은 신임 총독이 선발되어 부임할 때까지 그 직책의 대리를 대서양군 사령관인 이억기에게 맡겼다.
하필 부총독이 불가피한 출장 업무보고를 위해 조선에 왔다가 복귀하는 배에 안에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과 리스본 사이에 개설된 비행선 노선이 있었지만 그 위험성을 황실이 워낙 강조하는 까닭에 여전히 교통수단으로 배를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포르투갈 부총독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문관 정치인이 아니라 무관 군인이 포르투갈 총독 대행을 맡고 있다 보니 자연히 해결 방법도 정치적이기 보다는 군사적인 방법이 선택되었다.
물론 이억기도 처음부터 전투나 전쟁을 상정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 그러했듯이 그저 한두 척의 함선을 보내 위력시위를 펼치고, 그것으로 겁을 먹은 오스만의 귀족이 물건을 되돌려 주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을 뿐이었으니까.
문제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니예까지 파견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던 함선은 포르투갈 주둔함대 소속의 왕무급 호위함 6척 뿐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호위함들 중 4척은 동일본 왕국 시절 파견한 함선으로 여전히 동일본 출신 해군병사들이 운용하고 있었다.
이들의 소집 해제와 귀국에 대한 대서양군 사령부의 요청이 있었지만 해군 총사부가 대체 전력을 확보하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당시 포르투갈 주둔군 함대의 관할 지역의 경비소요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상업이 조선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지중해의 중계 무역으로 먹고살던 시칠리아인들의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로인해 먹고살기 어려워진 시칠리아인들이 소규모 해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경비소요가 급증했던 까닭이다.
그로인해 최근 대서양군 사령부는 시칠리아에 대한 정벌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여하간 그런 연유로 대서양군 사령부는 출신 때문에 리스본에 정박해두고 있던 동일본 소속 함선을 제외한 2척의 왕무급 호위함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 2척의 왕무급 호위함들의 원소속은 남진 해군 이었다. 물론 지금은 대한제국 포르투갈 주둔함대 소속이었지만.
출동명령을 받고 리스본을 출발한 후 10일간의 항해 끝에 콘스탄티니예에 도착한 왕무급 호위함 2척은 도착과 동시에 오스만 해군의 갤리어스(galleass) 20척에 의해 포위되었다.
굳이 발전한 조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노와 돛을 동시에 사용하는 갤리어스는 시대에 뒤떨어진 함선이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만은 없던 것이 갤리어스도 주 무장이 화약무기인 대포였기 때문이다.
이런 양측의 대치는 오스만 함대의 갤리어스가 대한제국군 함선에 접선을 시도하면서 깨졌다. 상대의 행동을 도선 전투로 받아들인 왕무급 호위함에서 발포한 것이다.
지금은 조선에서 완전히 퇴역한 배였지만 여전히 제후국들에서는 중요 전함으로 쓰이는 배였다. 유럽만 해도 왕무급 호위함정도의 전함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그 전력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접근하던 갤리어스가 일제 포격을 받고 산산조각이 났다. 폭발탄 공격은 여전히 목선엔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격침되어 가라앉는 동료함의 모습에 분노한 오스만 해군들이 일제히 포를 쏘고 달려들었다. 그에 맞서 2척의 왕무급 호위함이 격렬한 포격전을 전개했다.
난데없이 콘스탄티니예 앞바다에서 조선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해전이 벌어진 것이다.
동방 사람들은 다혈질이다.
대한제국 해군이 오스만 해군을 공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곧바로 달아오른 오스만 백성들이 당시까지 머물고 있던 조선 상인들을 공격했다.
대양군체제로 변환되면서 조선무역선단에 동행하는 호위함선은 폐지되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군자원으로 인해 조선무역선단에 배치할 병력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탈해급 초대형 수선선 10척으로만 이루어졌던 조선무역선단에 소속된 상인들을 보호해줄 마땅한 무력 수단이 없었다.
그나마 배의 자체 경비를 위해 탑승하고 있던 일부 해전대원들이 나섰지만 그들의 사격에 오스만인들이 죽으면서 성난 콘스탄티니예 백성들의 분노에 기름만 부은 꼴이 되었다.
해전대원들로써는 위험에 처한 조선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것이 최악의 사태를 빗은 것이다.
죽여 벌거벗겨진 조선 상인들의 시체와 해전대원들의 시신을 끌고 콘스탄티니예 백성들이 시가지를 행진했다.
종래엔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에 불까지 질러 10척의 초대형 수송선이 콘스탄티니예 앞바다에서 불타올랐다.
그 불길이 자극이 되었을까?
왕무급 호위함 2척은 맹렬한 포격으로 20척의 오스만 갤리어스를 모조리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니예로의 접근은 불가능했다. 다시금 30여척이 넘는 오스만의 갤리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치른 전투로 함체는 엉망이었고, 남은 포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이전보다 많은 오스만 함대와의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2척의 왕무급 호위함은 분루(忿淚)를 삼킨 채 리스본으로 회항해야만 했다.
이 사태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