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화. 세계 최초의 민항비행선 날틀052
티베트에서 달라이라마는 환생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전대의 달라이라마가 살아있는 이상, 새로 달라이라마의 자리에 오른 이는 정통성을 확립할 수 없었다.
사실 티베트 내에서는 달라이라마가 아니라 티베트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운 송첸캄포의 환생으로 불린다. 그런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광해의 앞에 엎어져 티베트의 새로운 법왕으로 교지를 받은 이가 천 년 전쯤에 죽은 자의 환생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보고를 받은 광해는 그저 웃고 말았지만 몇몇 조선의 대신들은 상당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조선의 과학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미신이 다양한 계통 걸쳐 통용되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생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광해는 그것을 따져 옳고 그름을 밝힐 수 없었다.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광해는 사실이 아니라고 믿지만 타인의 믿음을 거짓된 믿음이라 매도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티베트의 새로운 달라이라마, 실제로는 송첸캄포의 환생이라 불리는 이가 교지를 받고 물러갔다.
그것으로 나고야와 동일본 소요사태로 시작된 일련의 내분사태가 조선과 대한제국 내에서 완전히 정리되었다.
제후국들은 조선이 여전히 강대하고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주고쿠와 간사이는 완전히 세상과 끊어져 고립되어 버렸다.
동일본은 제후국의 자리를 잃었다.
모든 공식적 문서에서 동일본이라는 지명의 기록이 금지된 것도 이때부터다. 명확한 기록을 위해 사관들에겐 동일본이란 국명과 동일본 내 각 지방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공문에서는 모조리 뭉텅 그려 ‘죄인의 땅’이라 표현되었다.
더구나 태자의 사사로운 봉지로 위치가 떨어진 탓에 그들은 조선의 정규 행정구역인 ‘도’의 대우도 받지 못했다.
그저 바다 건너에 존재하는 죄인들의 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 것이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이들이 살고 있는 땅은 이제 황실이 되었다 싶을 때까지 곤궁한 삶을 영위하며 죄를 씻도록 명령된 것이다.
자그마치 3백만이 넘는 이들이 살고 있는 땅을 그렇게 정의함으로써 조선은 모든 제후국들에게 대한제국의 종주국인 조선에 반항할 경우 어찌 되는지 그 본보기로 삼았다.
제후국들의 본보기가 동일본이었다면 주고쿠와 간사이는 조선 내 각 도의 본보기였다. 세계 도처에 영토를 갖게 된 조선이 황실을 배신한 ‘도’를 어찌 처결하는지 보여준 사례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제후국들과 조선 내 각 도에 배신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경고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남은 모든 도의 백성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될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저것들’은 저럴 줄 알았어>정도의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을 조선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본토8도의 백성은 당연히 그렇다 치지만 해외 3도로 줄어든 구주도와 사국도, 북해도의 주민들까지도 그리 생각했다는 점이었다.
가장 우스운 것은 대마도 백성들의 반응이었는데, ‘열도 놈들이 그렇지. 뭐.’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어이없게도 자신들이 유사 이래 항상 조선의 백성이었다고 주장했다.
긴 시간 한반도와 일본열도 양측의 영향을 받아온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주장한 것이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대마도인들은 지리적으로 일본열도보다 한반도가 더 가까워서 자신들은 지리적으로도, 인류학적으로도 조선인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현대시대에 ‘한국인 출입금지’란 푯말을 붙여놓고, 배짱 장사를 하던 얄미운 대마도인들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광해 치하의 대마도인들은 자신들이 태생부터 조선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점령된 지 비교적 시간이 짧았던 대만도의 각 도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조선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이 시대 조선 사람이라는 구분은 시대적으로 앞선 문화를 가지고, 세상 어디보다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을 뜻하고 있었다.
마치 고대 로마시대 로마인들과 그 외 사람들을 가르는 구분 같은 것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고대 로마시대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의 세상엔 ‘모든 문화는 조선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었다.
실제로 어떤 나라도 조선의 문화를 선진문화로 여긴다. 조선의 문물치고 새롭고 놀랍지 않은 것이 없듯이 조선의 문화도 높고 뛰어난 것으로 존중받았던 것이다.
현대시대 양복이 예복처럼 자리를 잡았던 것과 같이 한복이 예복으로 굳어진 세상이었다.
복잡한 복식을 규정한 정통한복의 경우, 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풍토와 결합하여 굉장히 높은 복식 문화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이었다.
그로인해 공식적인 자리엔 정통 한복을 차려입고 나서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였다. 그 추세가 어찌나 빠르고 강한지 유럽의 왕실들조차 공식적인 자리에 한복을 입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을 정도였다.
조선말을 하면 어지간한 모든 나라에서 통용이 된다. 조선말을 하지 못하고서는 조선에서 온 상인에게서 물건을 살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보니 어느 나라이든 상인을 만나면 열중 서넛은 떠듬떠듬 조선말을 할 줄 알았다.
거기다 조선인들의 씀씀이가 컸다. 세상 어떤 나라의 백성보다 많은 돈을 버는 이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조선 백성들은 여행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최근엔 신형 증기철선인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을 개조한 여객선이 황도인 신의주의 지원항인 신도항과 남포르투갈도 사이에 취항하면서 유럽 여행 열풍이 불어 닥쳤다.
이 탈해급 초대형 여객선을 이용할 경우 조선의 신도항에서 남포르투갈도의 감영이 있는 리스본까지 45일, 그러니까 한 달 반이면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행을 위한 이동기간만 3개월이 걸리는 이 여행이 최근 조선인들의 가장 가고 싶은 여행 일순위였다.
과거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반년은 훌쩍 넘어가는 이동시간은 둘째 치고, 험한 바닷길은 날씨만이 아니라 해적이라는 위험이 도사린 죽음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선에 증기기관을 장착한 탈해급 초대형 여객선의 등장은 그런 일련의 일들을 모조리 해결해 버렸다.
더구나 여객선의 경우 최우선 경호가 제공되기 때문에 여행 내내 멀리서 적어도 한척 이상의 조선군 함선이 항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함께 동행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할 지역의 조선군 함선이 항상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조선군이 대양군 체제로 변경된 이래 태평양 함대와 인도양함대, 그리고 대서양함대가 동원된 대대적인 해적 소탕작전이 실시된 후라 해적에 의한 공격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특히 태평양의 경우 거의 조선의 내해처럼 여겨졌다. 이 광활한 바다는 조선 최대의 함대인 태평양 함대에 배치된 고왕급 비행선 모함에서 출동한 비행선과 해상에서 작전하는 전투함들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거의 현대시대에 준할 만큼의 해상 경비력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태평양에선 조선의 눈을 피해 배를 몰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7월에 접어들면서 거의 모든 바다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태자의 허락과 도움을 얻은 이순신의 노력으로 긴급 제작된 2백대의 비행선들이 각지에 주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왕급 비행선 모함들의 경우, 긴급 건조를 시작한 10척이 아직 거제 건선단지에서 건조 중이었기 때문에 바다에서의 운용엔 제한을 받기는 했지만, 조선군은 각 도서들을 활용해 중간 기착지로 만들어 운용하면서 거의 모든 바다의 하늘이 조선의 감시 하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비행선의 운항횟수가 늘어나면서 사고가 잦아지고 있었다.
지상을 운항하다 갑작스런 돌풍에 휘말려 추락한 비행선도 나왔고, 변덕스러운 바다의 날씨로 인해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바다로 추락한 비행선도 생겼다.
그로인한 인적, 물적 손실이 적지 않았다.
광해 13년 10월에 집계된 바에 따르면 조선이 운용하고 있는 비행선의 수가 전투용인 날틀03과 다용도로 제작되어 사용되는 날틀04를 모두 합해 3백여 대에 달했다.
그렇게 대량의 비행선들이 운용되는 와중에 벌어진 사고는 모두 15건, 그중 추락사고만 6건으로 모두 6대의 비행선을 잃었고, 20명의 비행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바다위에서 벌어진 사고가 많았기에 신속한 구조가 대부분 불가능해서 사고대비 사망비율이 높았다.
그럼에도 조선 각 계에서 비행선의 여객수송 요구가 빗발쳤다.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사용할 가치가 있다는 의견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조정의 긴급한 인력 수송의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투입되는 황실 특수비행대 소속의 여객수송용 날틀04의 경우, 신의주에서 리스본까지 중간 급유를 위한 중간 기착을 포함해도 6일이면 도달했다.
직선으로 대륙을 관통해 날아가기 때문이다. 하긴 아직 영공개념이 없으니 조선의 비행선이 날아가는 것을 다른 모든 나라가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 비행선을 모방해 개발하려는 시도가 잉글랜드에서 잠시 일었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곧바로 포기되었다.
헬륨기체의 수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해당 채굴기술은 아직은 조선만이 가지고 있는 시대를 앞선 초일류 기술이었던 까닭이다.
또 하나, 조선의 대사가 정중히 잉글랜드 왕실에 경고를 전했다.
하늘에서 날아가는 다른 나라의 물체를 발견할 경우 조선의 비행선은 모조리 격추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으니 위험하다고 말이다.
말은 너희의 안전이 걱정된다는 투였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늘로 올라오면 무조건 격추시킨다는 위협이었던 셈이다.
기술적인 한계로도 성사시킬 수 없었지만 그런 조선의 위협에 잉글랜드는 두말없이 비행선 개발 계획을 접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조선의 비행선은 세상 모든 나라의 하늘을 마치 자국의 영공처럼 이용할 수 있었다.
수많은 요청에 결국 조정에서도 공론화하여 여객 비행선의 취항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위험할 것이라는 태왕의 경고를 감안한 논의였다.
그 결과 조정은 비행대원들처럼 위험을 미리 고지하고 유서까지 쓰게 하여, 그럼에도 탑승하겠다는 이들만 태우는 방안을 제사하여 태왕에게 재가를 주청했다.
광해는 비행선 탑승을 하기 며칠 전에 사전 위험교육을 시켜 위험도를 충분히 인식시킨다는 전제 조건을 달아 그 주청을 재가했다.
비로소 조선에 비행선을 통한 항공 수송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장원은 마침 대규모 화물 운송을 위해 설계, 제작한 날틀05를 이 결정에 따른 여객수송용 비행선으로 추천했다.
날틀04보다 3배나 더 큰 날틀05는 기존의 조선 비행선들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마치 독일의 힌덴부르크 비행선처럼 유려한 나선형의 몸체에 경식 구조의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객실은 비행선 내부에 존재했고, 기낭도 경식구조 내부에 설치되었다.
탑승 가능 승객의 수는 60명에 달했으며, 화물용으로 사용할 경우엔 3천관(약11톤)의 화물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최근 들어 개발된 1천 마력 내연기관 2기를 장비해서 3배로 커진 몸체에도 불구하고 순항속도를 날틀04와 같은 시간당 250리(약98km)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더구나 비행선 내부 연료보관량을 늘여 항속거리를 3만리(약11,780km)로 확장해서 날틀05의 경우 신의주와 리스본을 무기착 비행할 수 있었다.
광해가 장원의 추천을 받아들여 날틀05의 여객수송 투입을 승인했다.
광해의 승인을 얻은 장원은 승객수송이라는 목적에 맞게 개량한 날틀05를 50여 차례 시험비행을 거치고, 신의주와 리스본간 모의 운항도 30여 차례나 실시한 후, 완벽히 수정된 설계로 날틀05-2, 흔히 날틀052라 불리는 여객수송용 비행선을 제작해 내었다.
그것이 해가 바뀐 광해 14년, 그러니까 서기로는 1616년 5월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광해14년 6월 1일, 신의주에 건설된 조선, 아니 세계최초의 민간공항에서 몸체에 ‘날틀052-005’라는 글씨가 선명히 새겨진 날틀052가 60명의 승객을 태운 채 이륙했다.
조선의 황도인 신의주와 남포르투갈도의 감영이 있는 리스본 사이에 개설된 첫 민항노선에 처음 취항한 여객비행선의 비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첫 승객들은 조정 관련 부처의 인사들 10여명과 30명의 일반 백성들, 그리고 20명의 기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한신보와 한성일보는 물론이고,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운용되고 있던 십여 개의 신문사가 보낸 기자들이었다.
아직 사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기자들은 화가들을 한명씩 대동한 상태였다. 그들은 신문에 실리는 삽화를 위해 연신 공항과 비행선 그리고 환송 나온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 높이 날아올라 멀어져가는 비행선을 바라보며 많은 이들이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