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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92화 (292/325)

제292화. 귀국령(歸國令)

꿇어앉은 태자와 문관들을 일별한 광해가 바짝 엎드린 세 나라의 칸을 내려다보았다.

“저 많은 이들이 너희를 살리라 한다. 아직도 너희를 형제로 생각하는 저들의 마음이 짐을 아프게 한다. 배덕한 자식도 자식이니 회초리보다 말로 타이르라 청하는 태자의 마음이 짐을 참담하게 한다. 어찌 이리하였더냐!”

“요, 용서하소서. 폐하.”

“제국이 주는 안위가 미덥지 못하더냐? 아니면 조선이 주는 수많은 선진 문물이 부족하더냐? 너희에게 가는 조선의 문물을 끊고, 너희를 제국 밖으로 내쳐 다른 모든 나라의 먹이로 던져주랴!”

광해의 호통에 세 나라 칸의 표정이 하얗게 내려앉았다.

독립이라는 달콤한 말에 눈이 가려져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광해의 호통 속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대한제국 내 제후국들의 경제는 제국 내에서 연계되어 돌아가게끔 조성된 후다. 조선이 제후국들에게 제국 전역에서 소요되는 제품의 원재료 생산을 몇 개씩 분배하여 맡겨둔 까닭이다.

대한제국의 산업 구조는 그렇게 제후국들에서 생산된 원재료를 조선에서 가공하여 완제품을 만들어 다시 각 제후국으로 공급하는 형태다.

그러니 그런 제국의 경제에서 도태되면 곧바로 경제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그동안 높은 문화적 생활을 가능하게 했던 제품이 들어오지 않고, 자신들이 생산한 원재료를 사갈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당연히 대량의 실업사태가 벌어지고, 경제적으로 끝없이 추락한다. 그것을 그냥 두고 볼 백성들은 없다. 백성이 들고 일어서면 독립의 기치고 뭐고 간에 버텨낼 재간이 없을 터였다.

뿐인가, 제국의 밖으로 내쳐진 후, 조선이 정복을 허락하면 다른 나라들은 둘째 치고 대한제국의 제후국들이 이를 드러내고 노릴 것이 분명했다.

어찌 그것을 생각지 못했을까!

당장 영토 확장에 목이 말라있는 명과 후금이 득달같이 위구르와 준가르로 달려들 것이다. 대한제국 내에서 조선을 제외하고는 1, 2위의 국력을 자랑하는 두 나라의 힘은 그것을 충분히 가능하게 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리고 그런 위험은 할하도 마찬가지다. 지금이야 과거 반란의 영향으로 북원의 힘이 약하다하나 조선이 뒤에서 조금만 힘을 실어주면 북원이 거꾸로 할하를 집어 삼킬 수도 있었다.

상황이 그리되면 굳이 조선이 나서지 않아도 세 나라의 온 천하, 온 백성이 피와 도탄에 잠길 것은 너무나 확연했다. 생각이 그에 이른 세 나라 칸의 이마가 대전 바닥을 강하게 짓찧어졌다.

쿵.

“살려주소서. 폐하.”

세 나라 칸의 말에 다시 한 번 태자와 문관들이 힘을 보탰다.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소서. 폐하.”

태자의 선창을 따라 꿇어앉은 문관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소서. 폐하.”

그 모습에 광해가 태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녕 태자는 저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냐?”

“폐하는 어버이시옵니다. 자식을 사랑하소서. 소자 이리 간청 드리옵니다.”

태자의 말에 광해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다가 이순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원수는 어찌 생각하는가?”

광해의 물음을 받은 이순신이 허리를 접고 답했다.

“소신과 조선의 군부는 폐하의 검이오니. 폐하께오서 치라 명하시면 그것이 무엇이었건 가차 쳐부수어 뭉갤 것이옵고, 살리라 명하시면 두 말 없이 칼을 거두고 물러설 것이옵니다. 하오니 명을 주소서. 그것이 무엇이었던 군은 폐하의 명을 추상같이 받들어 모실 것이옵니다. 폐하!”

이순신의 답이 끝나자마자 무관들이 마치 사전에 짜기라도 한 듯이 한목소리로 외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군은 폐하의 명을 추상같이 받들어 모실 것이옵니다. 폐하!”

조선의 정책을 결정하는 고위 문관들은 모조리 무릎을 꿇어 앉아 청하고, 무관들은 무엇이었든 명을 주면 따르겠노라 다짐하는 장면은 세 나라의 칸과 티베트의 달라이라마, 그리고 동일본의 보국 장군에겐 경외와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막연했던 조선의 태왕이 갖고 있는 위엄과 권위, 권력의 크기가 태산처럼 크고, 만근거석만큼 무겁게 다가오고 있었다.

온 세상을 뒤덮고도 남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미적거리던 안일함과, 가능한 피보다 협상을 우선시하는 태도에서 태왕의 심약함을 보았던 것이 자신들의 착각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태왕은 그저, 인내하고 있었을 뿐임을.

바짝 엎드린 세 나라의 칸은 그날, 태자와 조선 문관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광해는 태자와 문관들의 간언에 마지못해 물러섬을 명확히 하며 대전을 떠났다. 두 번의 용서가 없음도 분명히 하여 세 나라 칸의 목을 움츠러들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떠난 태왕은 대전을 나가는 그 순간까지 달라이라마와 보국 장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것에 두 사람의 불안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대전을 나가는 태자에게 세 나라의 칸이 다급히 쫓아와 고개를 조아렸다.

“태자 전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세 나라 칸의 말에 태자 호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폐하의 은혜를 잊지 마세요. 제가 무어라 했어도 세분을 아끼는 마음이 없으셨다면 폐하는 결코 용서하셨을 분이 아니시니까요.”

“전하······.”

“그런 분이에요. 한번 믿으면 자신에게 겨눈 칼을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으시는. 그런 분의 마음을 또는 다치게 하지 마세요. 그땐 부황이 아니라 제가 세 분을 결단코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겨우 13살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의 패도가 풍겨 나오는 태자의 말에 세 나라의 칸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믿어주소서. 그런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옵니다.”

“그럼 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믿겠습니다. 원로에 지친 몸만큼 마음도 지쳤을 텐데,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직전과 달리 부드러워진 태자의 음성에 세 나라의 칸이 서둘러 고래를 조아렸다.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가시지요. 제 거처에서 잠시 환담을 나누죠.”

“황공하옵니다. 태자 전하.”

그렇게 앞서 가는 태자를 따라 세 나라의 칸이 떠나가자 달라이라마와 보국 장군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런 두 사람을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의 무관들이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고는 대전을 떠났다.

그것에 당황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총리대신인 정인홍과 승정원 도제조인 이항복이 다가왔다.

“일단 총리실로 가셔서 차나 한잔 하시지요. 폐하께는 다시 알현을 청해 보겠습니다.”

정인홍의 말에 두 사람이 고마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따랐다.

태자와 함께 잠시간의 시간을 보내고 동궁을 떠나는 세 나라 칸의 표정엔 감탄의 표정이 역력했다.

간간히 그 나이에 어울리는 어린아이의 치기가 엿보이긴 했지만 조선의 태자는 13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의젓했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간혹 가다가는 자신들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생각들을 꺼내 놓기도 해서 세 칸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태자의 생각은 광해와의 시간으로 채워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해는 태자와 격이 없이 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광해는 가능한 자신이 가진 가치관과는 상관없이 태자만의 균형 잡힌 사고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광해는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현대시대의 사고방식, 지식, 관념들을 태자에게 끊임없이 가르치는 것에 할애했다.

다행히 태자는 총명해서 그런 광해의 가르침을 마치 물먹는 솜처럼 흡수해 배웠다. 그렇다보니 17세기 초의 사고방식과 지식을 가진 세 칸을 겨우 13살의 태자가 놀라게 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세 칸들은 인정해야만 했다.

설사 대전에서 벌어졌던 조선의 모든 행동들이 자신들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해 연출되었던 일일지라도 방금 전 있었던 태자와의 자리는 결코 태자의 능력이 모자랐다면 채울 수 없었다는 것을.

“아무래도 조선은 다음 대에도 흔들리지 않을 모양이오.”

위구르 칸의 말에 카자흐와 준가르의 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철벽처럼 단단한 조선이었다. 그것이 다음 대까지 이어진다면······. 아마도 조선은 완벽한 철옹성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나라와 척을 지는 것은 자신들은 물론이고, 자국 백성들에게도 좋을 일이 단 하나도 없을 터였다.

조용히 동궁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위구르 칸을 따라 나머지 두 나라의 칸도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환관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화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틀 후, 떠나도 좋다는 황명이 없었기에 여전히 이화원에 머물며 대기하고 있었던 세 나라의 칸은 광해의 부름을 받고 침전으로 들어 담소를 나누었다.

태왕은 대전에서처럼 사납게 굴지 않았으나 세 나라의 칸은 극도로 조심하는 언행으로 태왕의 위엄을 존중했다.

광해가 그런 세 칸에게 술 한 잔씩을 내려 앞으로는 변함없는 충성으로 따르라 명한 뒤 귀국을 허락했다.

세 나라의 칸은 침전 바닥에 이마를 짓찧어 충성을 맹세하고 뒷걸음으로 침전에서 물러났다.

세 칸은 동궁에 들려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잊지 않겠노라며 태자에게 고마움을 담아 하직 인사를 올리고는 조선의 황궁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왔던 길을 세 나라의 칸은 그렇게 멀쩡히 목을 간수해 돌아갔다.

그렇게 세 칸이 떠난 후에도 남겨진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와 동일본의 보국 장군은 여전히 태왕을 알현하지 못했다.

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이 다시 사흘이 더 흐르고서 떨어진 황제의 귀국령.

대한제국의 황제는, 조선의 태왕은 만나지도 못했는데 돌아가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당황한 두 사람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간신히 허락을 얻어 만난 태자까지도 고개를 저었다.

“티베트는 신성을 건드린 죄입니다. 폐하는 신인이시고, 만백성의 어버이시지요. 그런 분을 상대로 신성을 논한 것은 회복할 수 없는 일입니다.”

태자의 말에 크게 낙심한 달라이라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어찌 하면 좋겠나이까?”

“다음 보위를 이으세요. 달라이라마에 대한 폐하의 신임은 이미 떠났습니다. 다음 보위의 달라이라마가 직접 책봉을 받으러 와서 충성맹세를 하세요. 그때라면 저도 폐하의 신임이 다시금 티베트를 향하도록 노력해 불 수 있을 것입니다.”

태자의 답에 달라이라마는 세상을 잃은 것 같음 표정이었다. 그런 그에게 태자가 말했다.

“달라이라마는 정치적인 지도자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티베트의 백성을 위한 것인지 심사숙고해 보길 바랍니다.”

태자의 말에 달라이라마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달라이라마에게서 시선을 돌린 태자가 동일본의 보국 장군인 우에스기 카게토라를 바라봤다.

“장군.”

“예. 전하.”

“장군은 달라이라마와는 또 다른 위치요. 그대는 제후국인 동일본의 지도자이기 전에 조선의 태왕으로부터 장군의 위를 받은 조선의 신하이다.”

달라이라마에게 향하던 담담한 말투와는 전혀 다르게 변한 태자의 준엄한 음성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토라의 몸이 더욱 숙여져 바닥에 바짝 엎드린 형태가 되었다.

“감히 신하가 군왕을 욕보였으니 그 죄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 자결하여 죄를 씻고, 가문을 지켜라. 내가 장군을 도울 수 있는 일은 그뿐인가 하노라. 다만 장군의 피는 황궁은 물론이고, 조선의 땅에서는 흐를 수 없음이다. 죄인의 피는 죄인의 땅에서 흘러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 것이라 믿는다.”

바짝 엎드린 우에스기 카게토라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화, 황공하옵니다. 전하.”

“돌아들 가세요.”

돌아가라는 태자의 명이 한없이 차갑게 다가오는 두 사람이었다.

광해의 귀국령이 떨어진 터라 그날부로 두 사람은 각기 귀국길에 올랐다. 그나마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돌아간 세 나라의 칸과 달리 두 사람은 한없이 어두운 얼굴로 자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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