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조선의 경고
동일본이 자국파와 제국파로 나뉘어 내전에 휘말려 있던 광해 13년 2월, 광해가 조선으로부터 독립한 서남도와 관서도에 금거령을 내렸다.
해안으로부터 30리(약11.8km) 안에는 사람이 살수 없다는 이 금거령은 서남도와 관서도의 강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런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태왕의 명을 받은 3함대가 서남도와 관서도 해안가에 대한 무차별적인 포격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일명 ‘철퇴 작전’이라 명명된 이 해안 포격에는 부산포를 모항으로 하는 이순신 함대도 참여했다.
3함대가 세토 내해를 통해 서남도와 관서도, 아니 이제 다시 주고쿠와 간사이라 불리기 시작한 지역의 동쪽 바다를 항해하며 해안가를 무차별적으로 포격했다.
이순신 함대는 동해 쪽으로 항진하며 양 지역의 해안가를 포격했다.
이 무차별 포격은 해안가 시설 및 도시의 완전파괴와 거주불가능 지역 형성을 목표로 두고 행해졌다. 따라서 두 함대의 포격은 마치 융단폭격에 상응하는 정도로 조밀한 대량 포격이었다.
이 대량포격을 지원하기 위해 양 함대에 소속된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들은 대규모의 포탄을 싣고 다니며 지속적인 보급을 실시했을 정도였다.
특히 기존 계획을 앞당겨 실전 배치된 고왕급 비행선 모함 2척 중 1척을 배치 받은 이순신 함대는 비행선들을 활용해 일장함포의 사거리 밖인 20리에서 30리 지역에 대한 폭격에 나서기도 했다.
사실 이것 때문에 태왕이 금거령을 처음 꺼내들었던 시기 군부는 일장함포의 사거리 안에 해당하는 20리를 금거령 지역으로 주청했었다.
하지만 광해는 바람의 영향으로 그보다 포탄이 멀리 날아갈 때를 대비해 30리로 지정할 것을 명령했다. 괜한 구설수에 오르내릴 필요가 없다는 광해의 판단이 작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작전에 나선 이순신 함대를 지휘하던 손일원은 이 괘씸한 이들을 금거령 외부로 완벽히 쫓아내길 원했고, 비행선을 동원한 폭격까지 지시한 것이었다.
하긴 비행선 모함이 없던 3함대의 제독이 일장함포를 최대 사각으로 사격하여 사거리 밖까지 포탄을 날려 보내려 애를 쓴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조선의 모든 백성과 군인들이 모두 서남도와 관서도의 독립을 배신행위로 받아들여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왜전쟁 당시 완전히 말살 할 수 있었음에도 태왕이 은혜를 내려 조선의 백성으로 받아주고, 동등하게 대우하며 돌봐주었음에도 등에 칼을 꽂는 배덕 행위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온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외교부 무선전신소를 통해 각 제후국은 물론이고, 유럽 열강들도 모두 그 소식을 들었다.
특히 조선이 약화되었다는 생각이 퍼져가던 유럽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간 전쟁이 벌어진 이후, 멈추었던 조선군의 네덜란드 해안 공격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에스파냐와 종전협정을 체결하고, 다시 해안가를 재건하고 있던 네덜란드에겐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에스파냐의 영토로 남은 남부 네덜란드를 지나쳐 북부 네덜란드의 해안가에 도착한 대서양 함대 소속 신형 증기철선들이 일제히 일장함포 도달거리까지 포격을 개시한 것이다.
재건되었던 둑이 힘없이 무너졌다. 해안가를 따라 재건된 마을에 포탄이 떨어지고,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이 사방에 떨어지는 포탄과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바닷물에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의 장이 네덜란드 해안가에 벌어졌다.
이 사태가 온 유럽의 나라에 알려지며 조선의 끈질긴 뒤끝에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대서양군 사령부는 조선의 태왕이자 대한제국 황제인 광해의 황명으로 네덜란드에 해안 봉쇄령과 금거령을 내린다는 포고문을 유럽 각국에 전달했다.
외교부가 아니라 군부 조직인 대서양군 사령부를 통해 해당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에서 유럽 각국은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바람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조선의 배는 유럽 시민들에게 여전히 악마의 배로 불렸고, 조선의 군대는 악마의 군대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다.
그것은 조선의 군함이 어찌 움직이는지 이제 대략적으로라도 알게 된 상류 지도층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군함을 상대할 수 있는 배를 가진 유럽의 나라는 없었고, 조선의 무기를 이길 수 있을 만한 무기를 만들어내는 나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얕보려던 유럽 각국이 다시 조선의 두려움을 새삼 곱씹는 계기가 되었다.
당황한 것은 대한제국의 제후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이 독립을 승인한 서남도와 관서도에 행한 해안 봉쇄령과 금거령으로 두 지역이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어 고립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네덜란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로 인해 그와 같은 일이 결코 일순간만 일어날 일이 아니라는 것도 눈치 챘다.
조선은 서남도와 관서도를 세상과 단절시켜 고립시킬 요량인 것이다.
더구나 요 며칠 조선 예비군이 ‘춘계강화 훈련’이라는 처음 있는 명목으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자그마치 50만의 예비군이 동시에 소집되어 20만의 현역군과 같이 최대치의 동원 훈련에 돌입한 것이다.
봄 농사를 대비해야 하는 시점에 벌어진 이 훈련으로 각지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질 터인데도 조선 황실과 조정은 훈련을 강행했다.
그로써 조선의 의지가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었다. 시기, 시절 상관없이 필요하다면 조선은 전력을 다해 상대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을 세상을 향해 펼쳐 보인 것이다.
백성들도 서남도와 관서도에서 벌어졌던 일 때문에 벌어진 훈련이라 이해했던지 어려운 환경에서도 불만을 삭이며, 모두가 노동력 부족을 서로 도와가며 해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와 같은 조선의 독심을 알게 되자 특히 노골적으로 독립을 논하던 위구르와 준가르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이빨을 드러냈던 할하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 세 나라에 주재하던 조선 사무국을 통해 해당국 왕실로 대한제국 황제의 어명이 떨어지면서 당황감은 더 깊어졌다.
보름 이내로 신의주로 입조하라는 황명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다. 조선에 반하는 분위기가 잡혀가던 세 나라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입조한 군왕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황명을 거부하자니 서슬 퍼렇게 올라있는 조선의 칼날이 당장이라도 날아올 것만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
당장 세 나라의 왕실과 신의주에 주재하는 제국 대사와 제국 의원들 간의 무선전신이 급증했다. 그리고 세 나라 제국 대사들과 제국 의원들이 조선 외교부와 황실로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군왕이 아니라 태자의 입조로 나추려 애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왕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상황에서 모든 기동보병대에 기01 총좌를 부착한 기동마차가 배치되는 전력 강화 방안이 확정되어 곧바로 개시되었다.
기존 기동마차와 동일하게 8필의 말이 끄는 이 기01 탑재 마차엔 ‘장갑마차’란 명칭이 붙었다. 기01의 무게 때문에 마차의 몸체가 온통 철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에 가벼운 합금인 알루강이 사용되고, 가능한 장갑판의 활용도 억제했지만 애초에 그 방호력을 제후국에 보급된 폭발탄의 포격에서 살아남는 것에 맞춘 탓에 무게만도 5톤에 달했다.
보이기에는 거의 통자 쇠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장갑마차였던 것이다.
원수부는 기동보병 1개 대에 이 장갑마차 1대씩을 배치하길 원했고, 태왕의 승인을 얻었다.
기마대로 이루어진 부대는 그 기동성을 보존하기 위해 장갑마차를 배치하지 않기로 했다. 마차가 다닐 수 없는 길로도 이동하기 위한 전술적 선택이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초기엔 1개 대를 기마대와 기동보병을 절반씩 섞어 구성했던 것에서 탈피해 현재는 조선군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전술단위인 1개 대는 전체를 기마대 또는 기동보병대로 구성하고 있었다.
이런 일련의 조선군 무장 강화조치는 때마침 입조를 명받은 세 나라 왕실에 압박수단으로 작용했다. 자칫 황명을 어기면 현재 훈련 중인 50만의 예비군을 더해 70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득달같이 달려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세 나라의 군왕들이 자국을 출발해 신의주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신성 회복을 외치며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이 세를 넓혀가던 티베트의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세 나라의 군왕을 신의주를 부른 것과 달리 티베트엔 아무런 요구가 없었다는 것을 오히려 티베트가 불안해했다.
오죽했으면 티베트 내부에선 조선이 본보기로 티베트를 불바다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것을 위해 비행선이라는 하늘을 나는 무기를 대량으로 만들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거칠고 높은 지대로 이루어진 티베트를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는 대신 비행선을 동원하려는 것이란 뜻이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무가라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대월 전선에 복무하다 먼저 귀환했던 일부 고위 무관들을 통해 진짜로 조선에 하늘을 날며 불벼락을 내리는 무기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티베트 전역이 경악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결국 부르지도 않았음에도 티베트의 통치자인 달라이라마가 신의주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티베트 정부와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높은 위기감이 돌고 있었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이시기 거제 건선단지에 함께 조성되어 있던 비행선 제작소는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실제로 비행선의 대량 생산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비행선 제작소도 장원만의 독특한 공정방식인 흐름 작업방식을 도입해 두었던 터라 대량 생산에 대응할 수 있는 체계는 갖춰져 있었다.
문제는 3개월 내 2백대 제작이라는 목표를 맞추기엔 제작소의 인력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비상동원령을 상신하여 태왕의 재가를 얻은 비행선 제작소는 비슷한 업무에 종사하는 민간 기술자를 대거 고용하는 임시 확장을 통해 비전문 생산부분은 해당 기술자들에게 맡기는 비상수단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건선단지도 5월에 진수 예정이었던 지증급 헬륨 기체 수송선 2척의 진수를 서둘렀다. 시일을 앞당기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외장이 아닌 것은 모조리 생략되었다.
그 탓에 2월말 서둘러 진수된 지증급 헬륨기체 수송선 2척의 외형은 정말 군더더기 하나도 없는 매끈한 선체를 가지고 있었다.
항해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한 모든 부가 장착 부품들을 제외한 채 진수되었기 때문이었다. 단 5일간의 시험항해를 마친 이 2척의 지증급 헬륨기체 수송선은 곧바로 휴스턴을 향해 출발했다.
이미 휴스턴에서 출발해 조선으로 오고 있던 1척의 지증급 헬륨기체 수송선에도 전속력으로 항진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로인해 부족해지는 지증급 헬륨기체 수송선의 석탄을 해상보급해 주기 위해 태평양 함대 소속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이 석탄을 만재한 채 바다로 나아갔다.
침묵하던 태왕의 금거령으로 시작된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으로 조선전체가 갑자기 군사적으로 부산스러워졌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조선이 세상을 향해 마치 ‘하나만 걸려. 완전히 박살내 줄게!’라고 으르렁거리는 것만 같아 보였다.
이것은 서남도에서 벌어졌던 백성들의 소요사태에 적절이 대처하지 못한 채 미적대던 조선의 대응 행태와는 완전히 괴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위로는 황실로부터 시작해 온 나라 백성들이 합치 단결하여 보여주는 조선의 이와 같은 행동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숨죽여 자세를 낮췄다.
‘조선의 힘이 예전과 같지 않다’라고 주장했던 이들을 사나운 눈길로 노려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