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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89화 (289/325)

제289화. 광해, 이후를 대비하기 시작하다

늦은 밤까지 서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광해가 태자의 방문을 받았다.

“자지 않고 어인 일이더냐?”

“아바마마. 소자 긴히 여쭐 것이 있어 들었나이다.”

태자의 답에 광해가 상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러나 있으라.”

자신의 명에 상선이 침전 밖으로 물러나 문을 닫자 광해가 태자에게 물었다.

“왜?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부황의 말투가 바뀌었음에도 무릎을 꿇고 앉은 태자의 자세는 그대로였다.

“아바마마. 흔들리지 마소서.”

아들의 말에 잠시 태자를 내려다보던 광해가 물었다.

“누군가 찾아온 게로구나. 누구냐? 도제조더냐. 아니며, 이 원수였더냐?”

“그, 그건······.”

당황하는 태자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은 광해가 말을 이었다.

“편히 앉아. 네 녀석이 무슨 말을 해도 아빠가 내 자릴 탐낸다, 의심하진 않을 테니까.”

“그런 게 아니라······. 아빠가 화를 낼까봐······.”

그제야 단 둘만의 대화로 돌아간 태자에게 광해가 말했다.

“화를 낼 이유가 뭐야. 네가 묻고 싶은 걸 묻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을. 물어봐. 이 아빠가 다 대답해 줄 테니까.”

“그게······. 왜 제후국과 일본 열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냥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아빠를 사람들이 무어라 부르는지는 알지?”

“성군?”

“아부는 하면 할수록 는다.”

“하하. 피의 군주.”

겸연쩍게 웃으며 답하는 태자에게 광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아비를 피의 군주라고들 부른다. 솔직히 대한제국을 형성할 때도, 또 주변을 정복해 나갈 때도 피보다는 협상을 우선시하고 정복지의 백성일지라도 그들의 안위를 먼저 돌봤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런 이름이 붙었지.”

씁쓸한 음성의 광해에게 태자 혼이 말했다.

“그건 백성들이 아빠를 잘 모르니까······.”

“아니. 아빠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필수불가결한 전쟁들에서조차도 죽어나간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야. 전쟁은 누군가는 죽고,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가족은 평생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사는 것이지. 그러니 피의 군주라는 말이 들리는 것이고.”

“······.”

자신의 말에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태자, 호에게 광해가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아빠는 가능한 전쟁을 하지 않고 다스릴 방법을 찾고 있어. 그래야 네가 다스릴 시대는 피가 흐르지 않을 테니까.”

“사람들은 아빠가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열의를 잃었다고들 말해.”

“잃었지. 아빠한테 엄마가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은 같을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네 녀석과 세희가 있는데 완전히 열의를 잃지는 않아. 아빠는 그저 조금 다른 방법으로 네 세상을 준비하려는 것뿐이야.”

“내 세상?”

“아비가 천년만년 살수는 없는 법이니까.”

“아빠······.”

“지금 당장 뭐가 어떻게 된다는 소리는 아니니 그리 눈물을 글썽일 필요는 없어. 그냥 대비를 하는 것뿐이야. 너는 아빠처럼 피의 군주라 불리지 않게 하려는 것뿐이니까.”

사실이었다. 대신들은 자신이 황후의 승하 이후 열의를 잃은 나머지 이전처럼 정사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광해는 자신 이후를 대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황후의 죽음으로 자신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도 맞고, 이전과 같은 열의가 생기지 않고 있다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또한 언젠가는 자신도 황후처럼 죽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죽은 이후 남게 된 태자를, 그 태자가 다스릴 조선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은 피의군주이든 폭군이든 무어라 기록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두고두고 역사의 상처로 남을 왜의 침략을 막았고, 조선을 세계열강으로 우뚝 세운 것만으로도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태자는 자신처럼 불리지 않길 원했다.

성군으로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명군으로 기록되길 원했다.

그래서였다.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피를 뿌리다가 가면 태자가 온건한 정치를 펼쳤을 때 지금처럼 들고 일어나는 이들이 생길 테니까.

미리 앞당겨 상황을 변화시킨 것뿐이었다.

일종의 예방주사를 놓은 셈이랄까?

하지만 이 예방주사는 독하다. 사람들은 아직 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지금 광해가 하고 있는 일은 군대를 보내 피를 보는 것보다 독한 일이었다.

광해는 조만간 조선에서 독립한 두 지역의 해안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 금거령(禁居令)을 내릴 것이다.

독립한 나라이니 따르지 않겠노라 나서면 네덜란드에게 그러했듯이 함선과 비행선을 보내 해안선을 끊임없이 포격하고, 폭격하여 강제로 사람이 살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륙으로 몰아넣고 세상과 교류를 끊어 완전히 고립시킬 것이다.

그런 고립 정책은 광해가 죽기 전, 유언으로도 남겨 앞으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어지고, 황실이 건재한 이상 결코 바뀔 수 없게 만들 생각이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두 지역에서 독창적 문화가 형성 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세상 그 어떤 나라와도 교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문명이 발전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의 진리다. 그들은 도태되고, 무너질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원초적인 원주민으로 남아 먼 훗날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원시부족으로 다뤄질 지도 몰랐다.

그것만큼 날카롭고 사나운 조치가 있을까?

문화 말살? 그것쯤이야.

광해는 아예 서남도와 관서도의 문명을 말살할 생각이었다.

그런 속내를 어린 태자에게 속속들이 전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잔혹하고 야비한 방식은 그저 자신의 대에서 끝내면 그만이었으므로.

그런 생각을 품은 광해에게 태자 호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그냥 아빠가 하던 대로 해. 내가 아빠 뒤를 잇는다면 그땐 나도 아빠처럼 하면 돼. 누가 뭐라 해도. 난 아빠가 최고의 군왕이라 믿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 아들의 말에 광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세상 어떤 아비가 자신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보이는 아들의 말에 감격하지 않을까.

그래서 더 굳게 마음먹었다.

‘피는 내 대에서만.’

끄덕이는 고개와 달리 결심을 더욱 공고히 다지며 광해가 웃는 얼굴로 태자에게 물었다.

“실질적인 성품의 이 원수가 찾아왔으면 네게 원한 것이 있을 텐데?”

“돈.”

“돈?”

“응. 아빠 돈 좀 쓰게 해달라던데. 비행선 만들겠다고.”

태자의 짧은 답만으로도 광해는 이순신의 생각을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유사시 비행선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모양이로구나.”

“어! 어떻게 알았어?”

놀라는 태자에게 빙긋이 웃어 보이며 광해가 답했다.

“아빠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피.”

입을 삐죽이는 태자의 모습에 작게 웃어 보인 광해가 말을 이었다.

“그리 해줘.”

“하지만······.”

“비행선이 많아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그러면 아빠가 이 원수를 불러서······.”

“신하가 널 믿고 한 말이야. 내게 고자질 했다고 알려서 좋을 건 없지. 그리고 네가 움직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원수도, 또 다른 대신들도 너에 대한 의지가 커지게 될 거다. 그것도 나쁘지 않아.”

“왜?”

“신하들이 네게 의지한다는 것은 차기 태왕으로 널 완벽히 인정한다는 것과 같아. 아비가 죽은 이후 태왕으로 자리 잡는 것보다 지금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훨씬 단단한 황권을 움켜쥐게 될 테니까.”

광해의 답에 태자는 이번에도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

“하지만 그만큼 아빠의 권력엔 누수가 생길걸.”

“아빨 걱정하는 거야?”

“아니, 아빠한테 갈 힘든 일을 나한테 가져올까봐 날 걱정하는 거야.”

싱긋 웃는 태자 호의 답에 광해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하.”

태자의 말이 온전히 그 말 그대로가 아님을 광해도 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태자는 광해를, 자신의 부황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광해를 기쁘게 했다. 세상 어느 나라의 태자가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보다 아비의 힘이 빠지는 것을 더 걱정 할까.

그렇게 오랜만에 웃음이 광해의 침전에서 흘러나왔다.

태자가 돌아간 직후, 광해가 상선을 불렀다.

“상선.”

“예. 폐하.”

“오늘 밤, 네가 그리 내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연유가 있을 것이다.”

“폐, 폐하!”

놀라고 당황하는 알지에게 광해가 빙긋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 밤 보았으되 보지 아니했고, 들었으되 듣지 아니했다. 약조한다면 네가 내게 말하지 않은 지난밤의 일을 나도 모른 척 해주마.”

“폐, 폐하······. 죽여주시옵소서.”

바닥에 바짝 엎드린 상선을 내려다보며 광해가 말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가리켜 나를 배반했다고 주장해도 끝까지 믿을 이를 꼽으라면 태자와 이 원수, 그리고 널 가장 먼저 꼽을 것이다. 그러니 엎드려 죄를 청하지 말고, 지금처럼 흔들림 없이 짐을 보필하면 된다.”

“폐하······. 크흐흐흑.”

황실과 광해를 위한 일이라 애써 생각하며 지난밤의 회합을 고하지 않은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는 알지는 그렇게 한참을 광해 앞에 엎드려 울었다.

*****

날이 밝고, 이순신은 태자 호의 부름을 받았다.

황급히 태자의 거처인 동궁으로 든 이순신은 태자의 앞에 공손히 앉아있는 내관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내탕금을 관리하는 환관들의 우두머리인 상탕(尙帑)이었기 때문이다.

공손히 예를 표하고 앉은 이순신에게 태자 말했다.

“몇 대나 만드실 요량이십니까?”

앉자마자 물어온 태자의 물음이 비행선에 관한 것임을 얼른 알아들은 이순신이 답했다.

“2백대이옵니다. 물론 그를 실어 나를 비행선 모함도 10척을 건조해야 할 것이옵니다. 전하.”

이순신의 답에 앉아있던 상탕의 눈이 커졌다. 그 정도의 비행선들과 비행선 모함을 만들자면 들어가야 할 어마어마한 비용이 대략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런 상탕을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 지은 태자가 말했다.

“상탕은 그에 필요한 자금을 분출하라.”

“며, 명을 받잡나이다. 태자 전하.”

바짝 엎드려 복명한 상탕이 물러가도 좋다는 태자의 말에 조심히 방을 나서자 이순신이 몸을 조아려 입을 열었다.

“감사하옵니다. 태자 전하.”

“나라를 걱정하는 원수의 마음을 알고, 폐하를 위하는 원수의 충정을 알기 때문에 도운 것입니다. 하나 이러한 일은 이번에 한할 것입니다. 자식이 아비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을 하라 주청하는 것은 불효를 권하는 것이니 그만한 불충이 또 없을 것입니다.”

“소, 송구하옵니다. 태자 전하.”

“가세요. 가셔서 일을 마무리 지어 뜻을 펼치세요. 원수의 뜻이 나라의 안녕에 닿아 있다 믿습니다.”

“망극하옵니다. 태자 전하.”

깊게 머리를 조아려 보인 이순신이 동궁을 물러나왔다. 그렇게 물러나온 동궁을 이순신이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상탕이 저리 맥없이 답을 했다는 것은 태왕의 언질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긴 태자가 태왕에게 달려갈 것을 이순신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신임을 받고 있던지 두 부자간의 의리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비밀 회합을 갖고, 태자를 찾아갔던 것은 태왕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어도 답이 없고, 만나 알고자 했을 때는 만나주지 않았기에 부득이 태자를 통해 그 의중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 태자를 통해 태왕의 의중을 알았다.

태왕은 열의를 잃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일처리를 보면 혜안은 그대로였다. 그런 태왕이 묵묵부답이라면 달리 뜻하는 바가 있다는 의미였다.

대신들이 관여되지 않고,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려는 무언가가 있음이다.

그것을 알았기에 이순신은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음 행보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더불어 태자의 의젓함도 보았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태자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고, 경망스럽게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무겁고 의젓하게 행동했다.

자신을 꾸짖으며 경고까지 날리는 모습은 태자가 13살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 지경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태왕인 광해 다음에 다가올 조선의 앞날도 지금 만큼이나 밝다는 것을 뜻했기에 이순신의 마음이 흡족했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대전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선 이순신이 바닥에 꿇어 삼배를 올렸다.

감히 신하된 자로 군왕을 시험한 죄를 그리 청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환관들과 궁녀들의 입을 거쳐 상선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받은 광해는 싱긋이 웃고 말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이순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느껴진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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