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광해의 갈등
조선군 원수인 이순신과 각 대양군 사령관 사이에 회의가 벌어졌다.
각 대양군 사령부가 하와이, 리스본, 마드라스로 흩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회의는 무선전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그 의견에 대한 반론이 무선전신으로 이루어진 까닭에 회의는 상당히 느리게 진행되었다.
음성 통신이 불가능한 시대적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회의에 참석한 당사자들은 몇 달씩 걸리는 서신으로 의견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에 비해 훨씬 빠르다는 것에 큰 만족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전에 도상 훈련에서 나온 결과를 가지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보다 정교한 해결책이 나오기 전까지 각 대양군에서 유사시 긴급히 투입할 수 있는 일정규모의 신속기동부대를 보유할 것을 요구했다.
이순신이 요구한 신속기동부대의 규모는 전대급 해군과 여단급 지상군 병력을 결합한 것이다.
병력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대서양군은 별다른 이견이 없었지만, 대규모 해군세력을 보유한 것과 달리 지상군 전력이 부족했던 태평양군과 해군과 지상군이 모두 부족한 인도양군의 경우엔 난색을 표했다.
사실 원수부 직할로 편성되어 있는 본토군도 신속 기동군을 편제하는 것에 애를 먹고 있었다. 여기저기로 병력을 찢어낸 까닭이었다.
당장 지세창이 지휘하는 산악전단이 태평양군 사령부가 있는 하와이에 주둔 중인데다 일본 열도에도 상당수의 병력이 작전에 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순신은 대양군 사령관들을 강하게 압박할 수만은 없었다. 자신 휘하의 본토군도 사실상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로 회의를 끝마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 엄습함을 느꼈다. 마치 도상훈련에서 벌어졌던 것과 같은 상황이 현실화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불안감이 그렇게 깊어가는 동안 관서도의 혼란도 가중되어갔다. 관서도의 백성들 중 상당수가 독립을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이미 지난 해 벌어졌던 선거에서 관찰사까지 백성들의 손으로 뽑은 상태였기 때문인지 관서도의 관찰사는 그런 관서도 백성들의 소리에 흔들렸다.
이내 각 시장들을 소집해 회의가 열렸고, 관서도 자체 투표가 개시되었다.
물음은 한가지였다.
‘독립을 원하는가?’
그 투표 날짜가 2월 1일로 정해졌다. 조선 조정은 물론이고, 황실에 보고조차 되지 않은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지방통치의 권한이 관찰사에게 일임되어 있긴 했지만 조선의 모든 지역에서 벌어지는 투표는 황실의 직속 기관인 사간원이 도맡게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번 투표는 분명한 월권이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신의주 조정에서 나왔지만 태왕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 관서도에서 벌어지는 동안, 인접한 나고야도는 그런 관서도와 선을 긋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새로 조선의 영토가 된 나고야도의 경우엔 아직 선거가 거행된 적이 없어 모든 관리가 조선 조정에 의해 봉해졌다.
특히 태왕의 총신인 이원익이 초대 나고야도의 관찰사로 부임한 까닭인지 서남도에서 시작된 이번 사태에 나고야도는 상당히 기민하게 대처했다.
나고야도 백성이면서 서남도 반역사태에 개입하거나 동조했던 이들을 우포청의 가용인력을 총 동원하여 추적하여 추포하고, 좌포청을 활용해 그들을 지원하거나 동조하는 모든 세력을 색출해 냈던 것이다.
그 덕에 초기엔 불만을 가진 대한제국군 출신 나고야도 백성들이 반역사태에 합류해 가기는 했지만 색출 및 추포 작업이 이루어진 뒤로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의외였던 것은 그런 관찰사의 결정에 대다수의 나고야도 백성들이 동의했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들의 동료들 중 일부가 서남도 반란사태에 합류했다는 것에 꽤나 큰 충격을 받은 대한제국군 출신 나고야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자경대를 조직하여 조선군과 좌포분청 병력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비록 몽둥이 하나를 소지한 비무장 백성 조직에 불과했으나 이원익은 그런 그들의 충정을 받아들였다.
자결대로 하여금 부족한 좌포청을 지원케 하거나 아예 나고야도에 주둔 중인 조선군 병력의 도움을 얻어 혼란이 가중되어 가는 관서도와의 경계지역에 투입해서 경비를 강화했던 것이다.
나고야도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 동일본에선 조금 웃긴 상황이 벌어졌다.
서남도에서 폭동이 격화되던 시기 조선에 반감이 있긴 하지만 폭동에 협력할 마음도 없었던 일부 서남도 백성들이 동일본으로 이주해온 까닭이었다.
조선의 법상 백성들의 이주는 자유였다. 물론 관청에 신고하여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따라서 서남도 백성들의 자발적 이주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관청에 신고를 하고서 왔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것에 대해 조선으로 문의를 해서 결론을 얻는 것이 좋겠다는 동일본 막부의 내부 결정이 내려진 직후 조선으로부터 서남도의 독립 승인이 발표되었다.
미처 조선 조정의 답을 듣기 전에 서남도가 조선의 영토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상황에서 동일본 막부 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어차피 이제 조선 땅이 아니게 되었으니 상관이 없지 않겠냐는 이들과 조선의 영토일 때 벌어진 일이니 그럼에도 조선의 뜻을 물어야 한다는 이들의 의견이 맞선 것이다.
전자를 주장한 이들은 자신들은 속국이긴 하나 독립국이니 그렇게 사사건건 보고하고 승인을 얻을 필요가 없다고 역설했고, 후자를 주장한 이들은 그 ‘속국’이라는 허물을 벗지 못한 이상, 조선의 눈치를 어느 정도는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시작된 이 양측의 주장 대립은 예상외로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했다.
전자를 주장한 이들, 흔히 자국파라 지칭되는 이들이 제국파라 불리는 후자를 주장하는 이들을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매국노라 몰아붙인 사건이 그 원인을 제공했다.
쇼군인 우에스기 카게토라의 지지자들로 이루어진 자국파는 자신들과 다른 뜻을 가진 제국파를 몰아붙이다 못해 종래엔 매국노법을 제정하여 매국 발언을 한 자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쇼군인 우에스기 카게토라의 태도였는데 그는 자신들의 지지자들의 이 허무맹랑한 주장에 은근슬쩍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놀란 제국파는 동일본에서 쇼군만큼이나 커다란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자키 후지하루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신의 고향이었던 도호쿠 지방으로 물러나 있었던 이자키 후지하루가 쇼군에게 서신을 보내 조금 온건하게 일을 다루어 줄 것을 청했다.
그로써는 쇼군의 통치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나름 예의를 갖추어 보낸 서신이었지만 답신은 그의 예상과 달리 날카롭게 돌아왔다.
‘감히 쇼군의 통치에 간섭하려 하는가!’
우에스기 카게토라의 생각지 못한 답신에 이자키 후지하루는 고심했다.
조선의 태왕이 동일본에 양보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무고한 백성들의 학살에 가까운 죽음이 황후에게 액운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 때문이라는 것을 이자키 후지하루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후회의 감정을 넘어서는 행동을 동일본이 보일 경우 태왕은 주저 없이 칼을 뽑아들 터였다.
황후의 죽음 이후 피를 보는 일을 가능한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서남도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조선은 피를 뿌리는 칼이 아니어도 휘두를 수 있는 칼이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동일본은 다시금 뒤로 퇴보한다. 그것을 이자키 후지하루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결심을 굳힌 이자키 후지하루가 도호쿠를 떠나 에도로 향했다.
지난 반란에 가담했던 아비와 형의 뒤를 이어 가문의 당주를 맡고 있던 이자키 후지하루가 에도로 떠나기 전, 가문의 당주를 자신의 동생에게 넘긴 것만으로도 그의 각오가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우에스기 카게토라는 이자키 후지하루의 상경에 상당히 긴장했다.
이자키 후지하루의 상경 직후 상당수의 대한제국군 출신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당장 현직 동일본군 지휘관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것이 우에스기 카게토라의 경각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것은 애국법이라는 가장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왔다.
동일본에서 만들어진 애국법은 초기 자국파가 주장했던 매국노법보다 훨씬 강화된 것으로 동일본의 권리를 부정하는 어떠한 발언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거기다 형량은 태형부터 최고 사형까지 그 법을 적용하는 쇼군의 재량에 따라 마음대로 부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적 제거에 이용될 소지가 다분했다.
이자키 후지하루를 포함한 제국파는 최선을 다해 그 법의 제정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 법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영지에 대한 지배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상당수의 다이묘들이 찬성하면서 그대로 통과되었다.
그것을 성토하는 이자키 후지하루와 제국파의 인사들을 쇼군인 우에스기 카게토라가 애국법을 들어 곧바로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이른바 애국법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애국법 사태는 쇼군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들이닥친 동일본군과 그들에게서 이자키 후지하루와 제국파 인사들을 지키기 위해 모여 있던 일부 동일본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며 시작되었다.
이 동일본의 내분이 격화되면서 다이묘들도 각자 나뉘어 양 파벌에 동참해 내전으로 비화해버렸다.
양 파벌의 지도자 출신 지역이 달랐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도 간토 지방은 쇼군인 우에스기 카게토라를 지지했고 도호쿠 지방은 제국파를 이끄는 이자키 후지하루를 지지했다.
결국 동일본의 내전은 간토와 도호쿠 양 지방 사이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렇게 동일본에서 내전이 벌어진 2월, 관서도가 자체 투표 결과를 들어 독립을 천명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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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에서는 이 두 사태에 즉각적으로 개입하여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조정의 의견대로 조선군을 통한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태왕의 재가가 반드시 필요했으나 광해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로인한 상소가 연일 빗발쳤고, 총리대신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이 연일 알현을 청해 설득에 나섰음에도 광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항복이 한날 밤, 조심스럽게 광해에게 물었다.
“어찌 저리 두고만 보시옵니까?”
“칼을 뽑으면 많은 이들이 상할 것이오.”
“그만한 죄를 지었으니 온당히 받아야 할 벌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죄를 지은 자들만 잡아 죽일 방법이 없으니 하는 말인 게요.”
“저들에게 부화뇌동한 것도 죄이오니 가엽게 여기지 않으셔도 될 줄 아옵니다.”
“도제조.”
“예. 폐하.”
“그리 죽어나가는 이가 그대의 아들이어도, 그대의 내자여도 그리 말할 수 있겠소?”
순간 턱 말문이 막혀 아무 답도 하지 못하는 이항복에게 광해가 말을 이었다.
“그 괴리가 요즘 짐을 괴롭히는 구려. 머리는 백을 죽여 천을 살리라 말하나 그렇게 죽어가는 백 속에 내 아들이 있다면 그리 할 수 있을까? 짐이 아직 군왕의 자질이 부족한지 그것에 답할 수 없었소.”
광해의 말에 이항복은 당황을 추스르지 못한 채 아무소리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