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원하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의 차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라.”
광해의 말에 대소신료들의 표정이 굳었다.
반란세력이 주장하는 바는 조선이 서남도에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서남도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 여기저기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폐, 폐하! 아니 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반란세력의 뜻을 받아주실 이유가 없사옵니다.”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폐하.”
마지막에 울린 총리대신인 말을 온 대소신료들이 따라 외쳤다.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폐하.”
대전 가득 찬 반대의 목소리에 광해가 담담히 말했다.
“하면 저들을 다 죽일까? 하면 경들이 원하는 대로 끝이 날까? 그도 아니면 지지부진 이 사태를 끌고 갈 생각인가?”
“서남도의 백성을 다 죽여도 조선의 강건함을, 폐하의 강건함을 온 세상의 만 백성이 다 알도로 하여야 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마음을 굳건히 가지시옵소서. 폐하.”
“굳건히 가지시옵소서. 폐하.”
다시금 일제히 외쳐대는 신하들을 지그시 바라보는 광해의 눈빛은 담담하나 권태롭지 않았다. 황후가 승하한 이후, 잃어버린 열의로 인해 그저 귀찮거나 신경 쓰기 싫어서 한 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도승지와 함께 가까이 서있던 이항복이었다.
“폐하의 뜻이 어디에 있나이까?”
이항복의 물음에 그를 잠시 바라보던 광해가 작게 미소 지었다. 마치 ‘역시’ 하는 듯한 미소와 눈빛이었다.
“저들이 원하는 바를 얻었을 때 과연 그것이 행복할까?”
“원하는 바를 얻어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란 뜻이옵니까?”
“저들이 독립을 하였다고 조선이 저들을 도울 이유는 없겠지. 무엇이 어여쁘다고 그리 할까. 독립을 시키되 조선은 서남도와의 모든 관계를 끊는다. 아울러 과거의 왜로 돌아간 서남도에 당연히 과거 왜와의 협정을 되살려 해상통제를 부활시킨다.”
서남도가 바다로 나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조선에서 들어가지도 않고, 서남도에서 나오지도 못한다면······.
‘고립!’
“또한 서남도에 있되 조선의 것인 것을 남김없이 모조리 걷어 들인다.”
전략물자 사전 전개 창고에 쌓여있는 무기들은 물론이고, 여러 곳에 설치된 곡물저장소의 곡물도 모조리 걷어 들인다는 뜻이다.
뿐일까? 조선의 상단들 중 8할이 황실의 것이다. 그들이 이래저래 쌓아둔 물품들도 적지 않았다. 그것들마저 모조리 걷어 들이고 문을 닫아 걸으면······.
거기다 황명이다. 2할 남짓한 개인 상단들도 결국 모든 물건을 가지고 서남도에서 철수할 것이 뻔했다. 물론 서남도를 기반으로 하는 상단이야 남겠지만 그 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도 서남도는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릴 터였다. 거기다 곡물들을 모조리 빼내오면 한겨울인 서남도는 당장 기근에 휩싸일 터였다.
원하는 대로 들어준다지만 사실상 서남도 전체를 고통의 틈바구니로 밀어 넣겠다는 뜻이었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항복에게 광해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조선이 어떤 존재였는지 서남도의 백성들만이 아니라 만 백성이 모두 보게 될 것이다.”
광해의 말에 놀란 표정의 대소신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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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의 결정이 떨어진 다음 날부터 서남도 일대에서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동원 가능한 조선의 해군세력과 수송선이 모조리 동원된 작전이었다.
백여 척이 넘는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은 물론이고, 근거리 교역선으로 여전히 운용되고 있었던 수백 척의 조선무역선이 달라붙어 모든 물자를 가까운 구주도로 옮겼다.
육로가 연결된 관서도가 있음에도 철수된 물자는 단 하나도 관서도로 옮겨진 것이 없었다. 그것으로 조선 황실의 의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상황이 확산된다면 관서도에서도 물자를 빼내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서남도에서 일어난 일로 시위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관서도의 상황을 황실이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구주도는 이번 일로 확실한 신임을 받았다.
하긴 같은 일본열도라 해도 한때 큐슈라 불리던 구주도는 성향이 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 전쟁이전에는 완전히 다른 나라처럼 굴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서남도나 관서도의 백성들과는 그 생각이나 행동 방식이 조금 달랐다.
더구나 구주도는 조선과의 교역과 교류가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문화적으로, 물질적으로 한참 앞서있는 조선을 동경하고 닮고자 하는 열의가 일본 열도 어느 지역보다 강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자식들을 조선 본토로 보내 교육시키길 열망했고, 그렇게 조선 본토에서 교육받고 자리를 잡는 이들을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라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일본열도에서 가장 많이 조선 본토로 들어와 사는 이들이 바로 구주도 출신들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조선 본토로 이주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구주도에 사는 이들도 조선과 차별 없이 살기를 갈망했다.
다행히 조선 조정은 그런 구주도 백성들의 열망에 상응할 만큼 동일한 정책에 동일한 대우를 해주었다. 어쩔 댄 본토보다 더 막대한 자금을 들여 개발 사업들을 진행해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구주도가 조선의 영토가 된지 이제 20년이 넘어간다. 그런 지금과 그 이전을 모두 경험한 구주도의 백성들은 조선의 영토가 되기 이전의 과거를 지옥과 연결 지어 말하길 주저 하지 않았다.
그런 지옥 같았던 과거의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이 구주도의 백성들에겐 추호도 없었다.
부친이나 동네 아저씨들에게서 과거의 구주도와 지금의 구주도의 차이를 수도 없이 들어오며 자랐던 청년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여서 결코 조선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오죽하면 자신들이 조선의 백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구주도의 백성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서남도 일대에서 ‘조선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외쳐진다는 것에 아연실색했을 정도였다. 그 만큼 구주도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조선을 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서남도에서 빼내온 물자를 육로가 연결된 관서도가 아니라 굳이 배를 동원하여 구주도로 옮기는 일이 벌어지자 구주도의 백성들은 조선 황실과 조정이 자신들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시키지도 않았건만 구주도 곳곳에서 ‘태왕 폐하 결사 옹위’를 주장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수많은 백성들이 거리로 나와 ‘태왕 폐하 결사 옹위’를 외쳐댔다.
구주도 감영에서도 서남도 불만분자들의 잠입과 유언비어 유포를 엄히 단속하라는 명이 각 관청으로 떨어졌다.
구주도 좌포청과 우포청도 모든 가용 병력을 동원해서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일단 서남도 백성이라면 요주의 인물로 보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좌포청과 우포청의 경비 병력이 부족하다는 소문이 돌자 구주도의 청년들이 대규모로 군과 포청에 지원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예비군으로 편성되어있는 구주도 장년들이 리 단위로 구성되어 있던 자치군에 자발적으로 협력해 경비 병력을 늘였다.
그런 일들이 겹쳐지며 주둔군인 51병단이 자리를 비웠지만 오히려 구주도의 경비는 몇 배로 강화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일들로 가득 찬 채 광무 13년, 서기로는 1615년이 밝았다.
새해 첫날을 기해 온 천하에 서남도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광해의 황명이 공포되었다.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이 일제히 서남도 영역에서 철군했다.
아울러 서남도에 대한 해상봉쇄가 발효되었다. 이것은 과거 왜의 막부가 조선과 맺었던 도쿄만 협정에 준한 것이라는 조선 조정의 발표가 있었다.
조선의 모든 지역에 서남도와의 교류를 엄히 금한다는 태왕의 황명이 내려졌다.
대한제국으로 묶인 모든 제후국들에게도 대한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서남도와의 교류를 금한다는 명령이 내려갔다.
각 제후국에 주재하고 있는 조선 사무국으로부터 해당 사항을 전달받은 제후국들은 이 느닷없는 사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럽 열강들도 마찬가지였다.
각국 대사관으로도 조선의 뜻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서남도와 교류나 교역하는 나라는 조선이 관계를 끊고, 교류와 교역 또한 중지 할 것이라는 일종의 협박이 전달된 것이다.
조선 외교부의 도움으로 각국 대사관은 자국으로 전신을 보내 즉각적으로 조선의 결정을 알렸다. 그로 인해 세계 모든 나라들이 조선의 이 느닷없고 예상외인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
모두가 긴장하고 있던 이 시절 단 한곳만큼은 축제 분위기였다.
바로 서남도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선이라는 강대국을 물리쳤다며 환호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간 폭도로 불렸던 이들의 중심에 있던 신일회가 화려하게 부상했다.
신일회는 만장일치로 아베 노부스케를 새로운 서남도의 지도자인 총통으로 선택했다.
아베 노부스케는 서남도가 조선이 가져다 붙인 명칭이라 하여 버리고, 과거의 명칭인 주고쿠(中國, 중국)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수도는 예상외로 자신들의 발원지인 야마구치나 주고쿠의 전통적인 중심도시였던 히로시마가 아니라 시모노세키로 정했다.
조선과 교역을 하며 크게 번성하여 히로시마의 규모를 넘어선 도시가 바로 시모노세키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모노세키의 백성들은 야마구치시를 제외하고는 가장 열렬한 신일회의 추종세력이었다.
그것이 신일회의 비밀 조작 때문이기는 했어도 말이다.
여하간 아베 노부스케는 그렇게 시모노세키를 깔고 앉았다. 그는 즉시 조선의 서남도 감영이었던 건물을 주고쿠 총통부 건물로 삼아 정부를 구성했다.
물론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그간 협력자였던 스가 요시로오와 야마자키 슌지를 외지로 내보낼 필요가 있었다.
조선을 상대로 싸울 때는 협력자였을지 몰라도 주고쿠가 독립을 쟁취한 시점부터는 정치적 경쟁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신일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스가 요시로오와 야마자키 슌지를 그냥 내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내전이 터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따라서 아베 노부스케는 주고쿠를 동해와 접한 산인 지방(山陰)과 세토 내해 측에 접한 산요 지방(山陽)으로 나누어 그 두 지역의 다이묘로 스가 요시로오와 야마자키 슌지를 임명했다.
산인과 산요 지방이라지만 시모노세키를 중심으로 한 야마구치 일원까지는 모두 총통의 직할지로 남겨 사실상 주고쿠를 삼등분한 셈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총통이 된 아베 노부스케나, 산요 지방으로 떠나게 된 스가 요시로오, 산인지방을 맡게 된 야마자키 슌지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거리로 몰려나와 축제를 벌였던 서남도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같은 일들이 서남도에서 벌어지고 있던 시기, 관서도는 심각한 내홍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왕의 신임이 떠났다는 것을 확인한 관리들의 위기의식이 높아진 데다 주요 상단들이 거래 물량을 줄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왕이나 조선 조정의 명령이 없는 각 상단들의 자발적 선택이었다. 그것은 서남도의 반역 행위에 협력한 관서도가 언제 조선의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른다는 인식이 퍼진 탓이었다.
당장 관서도의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왕실 상단인 미곡전이 관리하기는 하지만 조선 조정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는 곡물은 예전과 다름없이 풀리는 까닭에 곡물의 공급은 여전히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물품이 부족해 진 탓이었다.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관서도 감영에서 조선 조정으로 도움을 청하는 전신을 보냈다.
관서도 감영의 전신을 가지고 의정부 회의를 거친 총리대신 정인홍이 그 전신에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니 감당하여 이겨내라’는 답신을 보내 조선 조정의 냉랭한 기류를 그대로 전했다.
의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남은 것은 태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도움을 청하는 것뿐이 없었지만 관서도 관찰사는 감히 그리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지난 서남도의 반역사태 때 느슨하게 대처했다는 것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영이 그것에 전전긍긍하던 시절 속없는 관서도의 백성들 중 일부가 이럴 바엔 우리도 서남도처럼 독립을 하자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매일같이 시위가 벌어졌다. 관서도의 분위가가 그것에 점점 끌려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