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83화 (283/325)

제283화. 두 번째 강습

전속력으로 시모노세키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2척의 고왕급 비행선 모함의 비행갑판에서는 재무장과 급유를 끝낸 비행선들이 이륙하느라 분주했다.

계류밧줄과 안전밧줄까지 풀린 비행선들이 이륙과 동시에 뒤로 밀려났다. 비행선 모함들이 빠른 속도로 항진 중이었기 때문이다.

모함의 이동속도를 더해 비행기가 떠오르는 양력을 추가하도록 설계된 현대시대의 항공모함과 다른 점이었다.

하긴 비행선은 양력이 아니라 부력으로 떠오르는 비행체였으니까.

그렇게 밀려나며 떠오른 것도 잠시, 비행선들이 최고속도를 내면서 모함을 따라잡더니 곧바로 앞으로 치고 나갔다.

항속거리의 감소를 각오하고서라도 비행선들이 최고속도를 내는 것은 그만큼 전장의 상황이 엄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0대의 비행선을 날려 보낸 모함들은 전속력으로 항진하면서 다시 급유와 재무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철수한 비행선 10대가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타큐슈에 마련된 임시 비행선 계류장에도 비상이 걸렸다. 파괴된 1대를 뺀 9대의 날틀04 비행선들이 야밤에도 불구하고 출격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무장이 없는 날틀04에 비상이 걸린 것은 병력 수송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기타큐슈를 주둔지로 두고 있던 51병단 예하 515단이 항구에서 11수송함대의 탈해급 수송선에 탑승해 출발한지 20분 만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이 결정이 내려진 것은 시모노세키 항구가 폭도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당장 515단을 태우고 출발한 탈해급 수송선에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시모노세키에 대한 군함의 투입이 이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이 사태가 터지기 직전에 기타큐슈에 주둔 중이던 3함대가 작전구역 정규 순찰 임무에 돌입했던 까닭이다.

지금 3함대 소속 함선들이 웅다반도에서 전속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해군의 불행은 그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즉응 대응 함선으로 3함대 모항인 기타큐슈에 남겨졌던 유리급 순양함 1척은 기관고장으로 출항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로인해 해군 총사부에서는 일본열도 전체를 담당하게 될 즉응 함선을 단 1척만 남겨놓고 전 함선을 이끌고 나간 3함대 지휘부의 결정에 대해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전쟁이 끝났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 당장은 눈앞에 벌어진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해군 총사부는 곧바로 태평양군 사령부에 협조요청을 넣었다.

대양군 체제로 변경된 조선군의 편제상 해군 총사부에 대한 군령권은 완전히 유명무실해졌다. 명령권은 있되 직접적인 명령을 내려 움직일 수 있는 부대가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대부분의 명령이 조선군 최고 사령부나 조선군 원수부에서 내려가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명령이 가능한 부대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양군 체계로 변경된 이후엔 아예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려 부릴 수 있는 부대가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로인해 각 군 총사부는 군정기관으로 탈바꿈했다. 정책수립과 인사권은 갖지만 명령권은 없는 기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각 군 총사가 조선군 최고사령부 참모를 당연직으로 겸하기 때문에 군 지휘체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하간 대양군 체계에서 태평양 함대의 지휘권은 태평양군 사령부에 일임되어 있었다. 그 태평양군 사령부가 해군총사부의 지원요청에 따라 태평양 함대에 명령을 내려 남경(대판, 오사카)을 모항으로 하는 태평양 함대 예하 대판 전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흔히 남경 전대라고도 불리는 대판 전대는 유리급 순양함 2척과 온조급 구축한 4척, 그리고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함선들에서 정규 정비 중이었던 유리급 순양함 1척을 제외한 나머지 함선들이 태평양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긴급 출항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남경과 시모노세키까지의 거리가 장애로 작용한 것이다. 양측의 거리는 세토 내해를 거쳐도 1천1백리(약432KM)가 살짝 넘는다.

이 거리는 대판 전대를 구성하고 있는 신형 증기철선들의 최고속도인 25노트(약46KM)로 달려도 도착하데 필요한 시간이 9시간을 훌쩍 넘어감을 뜻했다.

따라서 그 시간 전에는 상륙을 지원하는 상륙포격이 불가능함을 뜻했고, 당연히 상륙도 진행될 수 없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파악한 조선군 원수부에서는 날틀04 비행선들을 다시 투입해 추가로 강습을 시도하기로 한 것이었다.

5전단 사령부가 있는 후쿠오카에서부터 사태가 벌어지자마자 기타큐슈로 긴급하게 달려온 51병단 예하 510단 병력에서 강습병력 차출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차출된 2개 대 2백 명의 병사들이 9대의 날틀04 비행선에 탑승했다.

본래 날틀04의 탑승인원은 20명이다. 하지만 현재 동원되어 있는 날틀04 화물수송형의 경우 자위무장인 기01 총좌를 비롯해 여러 가지 부수적인 장비가 철수되어 탑재무게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대당 2명씩 더 태우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대장선엔 3명을 더 태웠지만.

그렇게 병력을 탑승시킨 날틀04들이 기타큐슈에서 날아올랐다. 비행선들은 감영과 곡물저장소에 도착하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문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강습 착륙시의 안정성 확보였다.

이전과 달리 날틀03의 공중사격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착륙이 가능할지 날아가는 비행선의 조종을 맡은 비행대원들도 자신할 수 없었다.

이러한 소식들은 전신을 통해 전 세계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 함대에 실시간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그것은 파나마 운하 지역을 탐사하고 있던 지리원 관리들을 지원하고 있던 온달급 구축함도 동일했다.

평강비행대 소속으로 야간 비상대기 중이었던 신만수 장령이 그 소식을 듣고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온달급 구축함의 당직 사관에게로 향했다.

당직사관과 논의를 거친 신만수 장령이 온달급 구축함의 무선전신실을 통해 한창 기타큐슈에서 시모노세키로 날아가고 있던 날틀04 비행대장과 연결했다.

가칭 ‘장원 화물수송비행대’의 대장이었던 이명우 장령은 신만수 장령이 보내온 전문을 보고받고는 곧바로 탑승병력의 지휘관을 조종실로 불러 올렸다.

“현식총 사수가 몇 명인가?”

이명우 장령의 물음에 510단 예하 2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위관이 답했다.

“2정입니다.”

“앞쪽 문을 열고 안전 고리로 비행선 문 끝에 연결한 현식총을 쏠 수 있겠나?

“비행 상태에서 문을 여신다고요?”

“그래. 비행 상태에서 문을 열고, 지상으로 현식총을 쏠 수 있겠냐 그 말이야?”

비행선의 특성상 정지비행은 가능했지만 현대시대의 헬리콥터처럼 기수를 아래로 내린 상태로 정지비행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현식총 사격을 하기 위해서는 사수가 문 끄트머리까지 나가서 현식총을 아래로 향한 채 사격을 해야 함을 뜻했다.

이명우 장령의 말뜻을 알아들은 2대장이 비행선에 탑승해 있던 두 명의 현식총 사수에게 가능여부를 물었다.

그 물음에 굳게 닫혀있는 비행선 문 쪽을 바라보던 현식총 사수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2대장이 이명우 장령에게 답했다.

“가능하답니다.”

“나머지 대원들도 모두 안전고리하고 대비해. 현장에 도착하면 문을 열고 우리 비행선은 다른 비행선들의 강습착륙이 끝날 때까지 상공에서 엄호사격을 할 테니까.”

“예. 장령님.”

답을 한 2대장이 비행선에 탑승해 있던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자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한 병사가 2대장에게 무언가를 물었고, 그것을 2대장이 다시 이명우 장령에게 물었다.

“저기 장령님.”

“왜?”

“비행선에 구포병이 탑승해 있습니다. 사격 각도 상 비행선 안에서 구포를 쏠 수는 없겠습니다만 구포의 포탄인 비격진천뢰엔 불을 붙여서 던질 수 있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2대장의 물음에 부조종사와 눈을 맞춘 이명우 장령이 반가운 음성으로 답했다.

“왜 안 돼? 돼! 비격진천뢰뿐만 아니라 수탄도 가지고 있는 거 다 써. 우린 어차피 착륙안하고 지원임무만 수행하고 돌아갈 생각이니까.”

이명우 장령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인 2대장이 탑승부로 내려가자 이내 병사들의 움직임이 더 분주해졌다.

본래 계획은 이전처럼 감영과 곡물저장소로 반반 나누어서 투입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신만수 장령의 제의로 변경된 강습 방법이 원수부의 재가까지 받으면서 강습 형태가 바뀌었다.

첫 번째 강습은 모두 곡물저장소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양측의 전투가 모두 치열했지만 방어기재가 부족한 곡물저장소 쪽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곡물저장소 상공에 도착한 날틀04 비행선들 중 대장선이 앞으로 나서 문을 열고 비격진천뢰와 수탄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졌다.

비격진천뢰가 폭발하면서 쏟아지는 자탄과 땅바닥으로 떨어져 폭발한 수탄에 한창 공격을 퍼붓던 폭도들이 떼로 죽어나갔다.

그렇게 착륙거점을 확보하자 대장선이 조금 더 고도를 낮추어 현식총사격을 퍼부었다.

사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현식총의 유효사거리는 가총의 유효사거리와 동일한 4백보(약727M)였다. 문제는 가총의 최대사거리가 6백보(약1,090M)에 달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조선군은 가총을 운용하던 당시 6백보 거리에서 상당히 많은 적을 사살한 전과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현식총의 유효 사거리까지 하강한 비행선에 상당히 위협적인 것으로 적의 사격에 노출될 수 있음을 뜻했다.

특히 적의 저격병 운용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당장 현식총을 사격하는 사수들 앞에 방패가 세워졌다.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진 이 방패는 건물 돌입 시 앞에 세워 쓰는 것으로 다총 사격을 막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일선부대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실전에서 사용해본 적은 없었다.

현식총 사수들은 그렇게 실전에서 사용해본적도 없는 방패에 자신의 목숨을 맡긴 셈이었다.

병사들만큼이나 비행대원들도 피탄 위험에 노출되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당장 이전에 추락한 비행선처럼 기낭에 구멍이 뚫려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지상으로 처박힐 수도 있었고, 저격병이 조종석을 조준 사격하여 조종사를 직접 살상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장선은 그간 안전고도로 상정되어 있던 3천척(약1,500M)에서 벗어나 현식총 사거리 안인 지상에서 2천3백척(약700M)까지 하강했다.

그 상태에서 2정의 현식총이 몰려드는 폭도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사격되기 시작했다.

부족한 화력을 메우기 위해 2대장과 두 명의 분대장이 그런 현식총 사수 바로 옆에서 다총을 사격했다.

어차피 입구 넓이는 5명이 설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고, 다총도 사거리에선 현식총과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패의 수가 부족했기에 그런 세 사람은 적의 사격에 거의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대장선이 폭도를 향해 공중사격을 퍼붓는 사이 나머지 비행선들이 차례차례 하강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강습작전의 개시였다.

대장선이 피탄 위험에도 불구하고 앞서 폭도들을 막아내고 있었던 덕에 강습지역에 착륙하는 다른 비행선들은 그나마 안전이 확보된 셈이었다.

물론 가까운 거리에 숨어있던 저격병의 공격에 노출 될 수 있다는 위험은 상존해 있었지만 비행선들은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그렇게 위험을 삼수하고 강습작전에 나선 동료들을 지원하기 위해 인근에 방어선을 펼치고 있던 내금위 위사들이 비행선까지 뛰어나와 엄호사격을 했다.

그런 내금위 위사들의 지원 덕에 막 비행선에서 내린 510단 병사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방어선으로 설정된 참호까지 달려갈 수 있었다.

그렇게 피 말리는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8대의 비행선들이 병사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것을 확인한 대장선이 고도를 높였을 때는 비행선 탑승부 안이 피로 흥건했다.

현식총 사수 옆에서 다총 사격을 하던 2대장과 두 명의 분대장이 적탄에 사망한 까닭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죽은 2대장과 분대장의 자리를 메운 병사들이 7명이나 추가로 중상을 입거나 전사했다.

그래야 했을 정도로 폭도들은 새카맣게 몰려나왔고, 그들을 막기에는 2정의 현식총으로는 화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뚫리면 뒤에 강습착륙 중인 동료 비행선과 전우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대장선 병사들이 투혼을 불태운 것이었다.

이 결과를 보고받은 이순신이 병사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와중에도 조선군 병사들의 전투의지가 살아있음에 감사해 했다.

곡물저장소를 지키던 550단 예하 6대 병사들이 보여주었던 비겁한 모습에서 약화된 조선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참담하기 그지없었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510단 2대장과 그 휘하 부대원들이 보여준 투지에 이순신을 비롯한 원수부 지휘관들이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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