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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74화 (274/325)

제274화. 동일본 구배지례로 새 막부를 열다

동일본 선거가 시작되었다.

입후보자는 셋. 두 명은 동일본인이었고, 한명은 조선인이었다. 동일본인인 두 명은 이자키 후지하루와,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景虎, 상삼경호)였다.

이자키 후지하루는 도호쿠 지방 다이묘 가문 출신이었고, 우에스기 카게토라의 경우엔 간토지방의 명문가 출신으로 동일본 대한제국군 육군 장수로 2차원정군에 참전했다가 귀환한 자였다.

특히 그는 전국시대 때 에치고의 용이라 불렸던 에스기 겐신(上杉謙信, 상삼겸신)의 후손으로 동일본은 물론이고, 일본 열도전역에서 이름 높은 명가의 자손이었다.

선거를 통해 백성들에게 정치의 문호를 열기는 했지만 여전히 피선거자는 다이묘 가문 출신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여기에 추가된 조선인은 어이없게도 광해였다.

물론 광해가 스스로 출마한 것은 아니었고, 이번 선거를 기획한 동일본측에서 넣은 것이다. 만약 동일본 백성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지도자로 광해를 뽑는다면 자연히 동일본은 조선으로 흡수된다.

한마디로 조선으로의 흡수통합에 대한 의견도 백성들에게 물은 셈이었다.

동일본의 선거는 동일본 대한제국군 장병들이 주관했다. 하지만 동일본 전토에서 시행된 탓에 부족한 병력은 동일본 정벌군에서 동일본 주둔군으로 이름을 바꾼 조선군이 지원했다.

그리고 태왕의 명으로 파견된 조선 사간원 관리들이 선거관리를 도왔다.

그렇게 끝난 선거에서 동일본 백성들의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것은 우에스기 카게토라였다. 일본백성들의 뇌리에 깊게 박혀있는 우에스기 겐신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로써 동일본 백성들은 조선으로의 흡수통합은 반대했다.

새로 동일본의 지도자로 꼽힌 우에스기 카게토라는 매5년마다 다시 지도자를 뽑는 선거제를 약속하고, 경쟁자였던 이자키 후지하루를 비롯한 동일본 대한제국군 장병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우에스기 카게토라가 직접 배를 타고 조선으로 입조하여 광해에게 해당 사항을 보고하고, 충성맹세를 올리며 재가를 청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일본이 여전히 조선의 제후국임을 확실히 하고, 조선의 뜻에 반할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했다.

광해가 그 청을 허락하여 우에스기 카게토라를 보국장군(報國將軍, 후오코쿠쇼군)으로 봉하여 막부를 열도록 허락했다.

우에스기 카게토라가 광해의 앞에 나아가 흔히 구배지례라 불리는 예를 따라 아홉 번 절한 후 공손히 교서를 받았다.

이로써 동일본엔 국왕 없이 백성들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막부가 문을 열게 되었다.

그렇게 동일본이 안정화되면서 북미에 파병되어있던 3차 원정군 소속 동일본출신 병사들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동일본이 안정을 찾자 나고야와 동일본에 투입되어 있던 예비군이 우선 철수하기 시작했다.

30만이나 하는 대규모 군대의 철수는 보름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막대한 참전수당이 황실 내탕금에서 지급되면서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을 위로했다.

무장을 정비하여 전략물자 창고로 반환한 예비군은 며칠 후, 소집 해제되어 모두 귀가했다.

이후 제7전단이, 그리고 해병 3여단이 동일본에서 차례로 철군했다. 마지막에 55병단이 올 때처럼 이젠 조선 땅이 된 나고야도를 거쳐 관서도로 회군했다.

조선군의 회군절차가 마무리 된 시점부터 조선군의 편재 변화가 실시되었다. 이것은 일전에 결정된 대양군 체제로의 변화에 맞춘 것이었다.

이 대양군 체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본토군을 제외한 삼대양군이 모두 해외 영토에 주둔하는 병력 대부분을 현지 병력으로 충당했다는 점이었다.

당장 태평양군에 소속된 병력만도 대부분 북미연합국이 조약에 의해 내놓은 북미연합 대한제국군 병력으로 채워져 있었다.

여기에 점령전을 위해 파병된 조선 해병대와 육군 일부 병력의 지휘권이 태평양군으로 잠시 이관되었다.

그것은 신설된 인도양군도 다르지 않아서 현지 병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1차 원정군에서 귀환한 시크수색단 병사들이 전원 조선군으로 현지 입대한 마드라스의 경우 지역의 넓이에 비해 병력수가 많았다.

종교탄압이 없는 조선의 영토로 몰린 까닭에 시크교도가 많았고, 이들이 할 수 있는 직업들 중 그나마 조선군에 들어가는 것이 영광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은 포르투갈 전쟁 당시 보여주었던 시크수색단의 전투력과 충성심을 높게 평가했다. 그로인해 마드라스엔 시크교도로 이루어진 시크 병단이 창설되었다.

이들은 인도양군에 배속되어 관할지 사방으로 배치되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남포르투갈도에선 현지 모집된 해병대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남포르투갈 해병여단이 창설되었고, 포라중에선 인접한 조선점령지에 살고 있는 말레이인들을 훈련시켜 구성한 1천명 규모의 포라중 해병단이 창설되었다.

녹주도에서도 모잠비크 등 조선 점령지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개화 및 훈련시켜 구성한 모잠비크 해병여단이 창설되어 작전임무 수행에 들어갔다.

하와이는 아직 안정화 작업 중이라 기존 원주민들을 활용한 병력이 없었지만 원수부는 향후 하와이 원주민들로 구성한 하와이 해병단을 추가로 창설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외 영토에 현지인들로 구성된 병력이 생기면서 조선군의 해외영토 주둔임무의 상당수가 해제되었다.

그러면서 해당 임무에서 해제된 병력으로 일순간 병력적 여유가 생겼었지만 당장 나고야도와 하와이도 등 조선군이 파병되어야 하는 큰 영토가 추가되면서 그 여유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렇다보니 조선군은 여전히 편제에 비해서는 부족한 병력수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엔 일자리는 많고, 그 모든 일자리가 고임금이었다. 따라서 경제적 이유로 굳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군에 자원입대할 이유가 조선인들에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군에 자원하는 이들은 군인이 꿈이었거나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이들이거나 막연한 동경에 이끌린 이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그 속도가 예상보다 너무 급격해서 대규모 감군이 이루어진 해군의 병력 감축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육군 총사부는 병력 부족의 심화를 이유로 7기동전단의 폐지를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내년 입대예정 병력과 퇴역 병력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서 7전단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3만의 병력을 보유했을 뿐인데 예측대로라면 내년엔 1만 내외로 더 줄어들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해당 사안이 원수부를 거쳐 광해의 재가를 받아 시행되었다.

그간 조선 육군 최강 정예로 인정받던 제7기동전단이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로써 조선 육군은 4개 전단 20만 규모로 축소되었다.

이렇게 이 시기 조선군은 대양군 체제를 갖추면서 작전 범위적으로는 팽창하고 있었지만 현지 병력을 포함하는 정책을 취했으면서도 병력적으로는 축소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놓여있었다.

광해도 그렇고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군 고위 장수들도 그렇고 그냥 맥없이 손 놓고 그런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양이 줄은 만큼 질로서 승부를 보고자 했다.

우선 신형 무기들이 대량으로 개발되거나 제작되고 있었다. 장원의 각 연구개발부서들은 무연화약을 본격적으로 채용한 각종 총탄과 포탄의 성능 개량사업에 매진해 있었다.

아울러 신형 포들과 총기들의 개발도 한창 진행 중이었다. 특히 지상용 광역제압무기라는 부분에서 장원 화포 개발조가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었다.

그간 지상용 광역제압무기는 구포와 구포에서 발사되는 공중폭발탄인 비격진천뢰가 담당하고 있었다. 여기에 악마의 포탄이라 물리는 확산탄이 가세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대인 살상무기라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건물로 몸을 피한 적군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점이 실전에서 상당수 지적되고 있었다.

개활지에서 화력이 막강한 조선군과 정면 전투를 벌이려는 적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꾸 시가전이 벌어지는데 그 상황에서 효율적인 제압무기가 없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곡사가 가능한 삼포가 도입되면서 작렬탄과 곡사를 결합해 도심을 포격하여 시가전에서도 원하는 목표에 화력 전개가 일부 가능해졌지만 사거리의 제한으로 큰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삼포보다 긴 사거리를 가지고, 보다 넓은 지역을 제압할 무기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에 맞춘 신형 야포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직 괄목할 만한 성과가 없는 와중에 나온 이 결실은 꽤나 고무적인 것이었다.

과거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신기전이라 불리는 이 다연장로켓은 말 그대로 로켓처럼 분사가스로 날아가는 먼 거리의 목표를 타격하는 무기였다.

로켓의 특성상, 또 이 시절 기술의 한계상 정밀타격은 불가능했지만 목표 일대를 제압하는 것은 가능했다.

삼포용 3치(약90mm) 작렬탄두에 추진용 장약통을 연결한 형태의 로켓 20발이 장전되는 신형 신기전은 상당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데다 발사반동이 커서 목재가 아니라 온통 철로 된 포가위에 얹혀 있었다.

이 포가는 6개의 바퀴를 가지고 있었고, 발사 반동을 막기 위해 4개의 지지대를 내려서 고정한 후 발사되도록 했다.

만재한 신기전의 무게가 5톤이나 나가기 때문에 이동속도를 감안하여 기동마차처럼 8필의 말이 끌도록 하였다.

해당 신형 신기전의 발사 시험 결과 사거리는 15리(약6km)에 달했고, 착탄지역은 목표 반경 3리(약1km)내외였다.

파괴 정도는 착탄지역 목표물의 3할 가량에 화염과 파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직격당한 건물은 무너졌고, 주변 건물이 목조라면 폭발화염으로 발생한 화재로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해당 결과를 보고 받은 광해는 사거리를 25리(약10km)로 올리고, 장전 로켓수를 늘려서 피해범위를 5할 이상으로 확대하도록 추가 성능개량을 지시했다.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사이 어느새 연말인 12월이 되었다.

거제에서 고왕급 비행선모함 2척의 진수식이 열렸지만 광해는 참석하지 않았다.

지난 11월에 도착한 헬륨기체 2차분으로 기낭을 채운 추가분 20대의 날틀 03을 포함해 40대의 날틀 03이 2척의 고왕급 비행선 모함에 각기 배치되었다.

반년간의 운용훈련을 거쳐 1척은 이순신 함대에, 1척은 태평양 함대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조선은 이 2척의 운용결과를 가지고 새로운 비행선 모함을 설계, 추가로 2척을 건조하여 모두 4척의 비행선 모함을 운용할 계획이었다.

해당 계획은 광무 18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6년 후인 1620년에 완료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질적 개선 사업들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전투력은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전장의 중핵을 맡는 병사들의 전투력 저하가 그 주요원인이었다.

아직 현대에 비해 한참 뒤처진 무기로 무장한 상황에서 현대시대에서나 불수 있음만큼 향상된 인권 의식을 병사들이 갖춘 까닭이었다.

너무 빠른 백성들의 개화가 미친 영향이었다. 20년의 개화가 보인 결과치고는 조선 백성들의 개화속도가 너무 빨랐다.

목표를 현대로 잡은 광해의 개화 사업들이 빚은 결과였다. 신분제의 차별은 정말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현대시대에 광해가 보았던 폐단들을 애초부터 없애기 위해 재산의 분배기능을 강화한 데다 비리와 부조리에 대한 처결이 굉장히 엄격하고 강해서 백성들의 공정, 균형에 대한 관념이 무섭도록 성장했다.

그것이 뜻하지 않게 병사들의 인권으로 연결된 데다 광해의 인명중시 풍조가 결합되면서 훈련강도가 과거의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여전히 소총이 주요 무기이고, 화승총이나 창칼을 쓰는 적과 어울려 백병전도 수시로 벌여야 하는 조선의 군대가 탱크를 몰고, 미사일을 쏘는 현대의 군대정도에 준하는 인권의식을 가져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이 실전에서 파탄을 드러낼까 우려하는 군부의 고위 장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였기에 장수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서남도의 야마구치(山口, 산구)시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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