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조선군의 약화
이항복이 승정원 도제조로 들어온 이후로 도승지 허균의 독주가 막을 내렸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태왕의 주변을 장악하려 들었던 허균도 결국 도제조로 온 이항복의 명을 받아야 하게 되었던 까닭이다.
허균이 아무리 태왕의 신임을 받는 총신이라지만 그 신임도의 무게가 이항복과 견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항복은 총신이라는 태왕의 믿음을 권력화로 쓰지 않기로 유명한 신하였다. 그런 이항복의 눈에 허균은 위험하게 비춰졌다.
그렇기에 이항복이 승정원 도제조로 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허균에게 집중되어 있던 승정원의 권력을 휘하 부승지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런 조처들을 허균이 처음부터 수긍하고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직접 태왕에게 현재의 승정원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윤허를 청하면서 일종의 저항을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허균의 반발은 태왕이 이항복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힘없이 무너졌다.
그런 일련의 일이 승정원에서 일어나자 그렇지 않아도 허균의 독주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조정의 대신들은 이항복의 복귀를 수긍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이항복을 복귀시킨 총리대신의 판단에 우려를 가지고 있는 신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런 일의 중심에 서있던 이항복을 이순신이 찾아왔다.
허균이 수년간 도승지로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이순신이 승정원으로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기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항복을 바라봤다.
저 군부의 거인을 승정원으로 직접 걸음하게 한 인사가 이항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조선의 군권을 사실상 한손에 움켜쥔 데다 조선에 유일한 1품의 무관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에 대한 태왕의 신임은 절대적이다.
태왕 본인의 신변에 갑작스런 유고 상황이 발생할 경우 조선은 물론이고, 대한제국의 모든 군권이 이순신에게 돌아가도록 지정해 놓은 것이 태왕임을 생각하면 그 믿음의 무게는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그런 이순신의 방문에 허균과 다른 승정원의 관리들은 마치 쫓겨나듯 승정원을 비워주어야만 했다.
이순신이 이항복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자리를 비켜 달라 청한 까닭이었다. 천하의 이순신이 비켜달라는데 버티고 있을 관리는 조선에 없었다.
그것은 천하의 허균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해진 승정원에서 이항복이 천천히 앞에 앉은 이순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우린지 시간이 좀 된 차라 차갑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차 맛은 여전히 잘 모르니······.”
담담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 이순신을 바라보며 이항복이 빙긋이 웃었다.
‘사람이지. 제대로 된 사람’
오래전에 작고한 이이에게 젊은 시절의 이항복이 이순신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이었다.
그 답을 처음 들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흐른 지금은 이이가 한 말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오래전의 기억을 내려놓으며 이항복이 이순신에게 물었다.
“원수께서 예까지 절 찾아오셨다면 폐하의 일이겠군요.”
“맞습니다. 폐하의 일로 상의드릴 것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이항복의 권유에 잠시 숨을 고른 이순신이 말했다.
“폐하······. 이전과 많이 다르십니다.”
이런저런 설명이 없었지만 이항복은 이순신의 말을 얼른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주억거렸으니까.
“황후 마마의 승하에 생각보다 충격을 크게 받으셨던 모양입니다. 하긴 평소에도 애정이 각별하셨으니······.”
“웃음을 잃으신 듯합니다.”
“웃음만이 아니라 열의도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은 그저 올라오는 장계와 상소만 처리하실 뿐 이전처럼 대신들의 사고를 앞질러 나가는 역동적인 명과 지시가 없으십니다.”
“하면 그냥 저리 계시게 두어서는 아니 되질 않겠습니까?”
이순신의 물음에 이항복이 말했다.
“이제 겨우 1년 남짓 지났습니다. 잠시 더 기다려 드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소장은 이제 벌써 1년이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범부라면 상관없겠지만 폐하이십니다. 수천만 조선 백성과 수억 대한제국의 백성들이 믿고 따르는 어버이시란 말입니다. 폐하가 흔들리면 아직 반석에 오르지 못한 제국이 흔들리고, 종래엔 조선이 흔들릴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폐하가 흔들리셔서는 아니 되는 때입니다.”
“이 원수께서 맡고 있는 군이 감당 가능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이항복의 말에 이순신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동일본 사태에서 보셨겠지만 군은 이전보다 많이 약화되어 있습니다. 당장 나고야와 동일본에 30만이나 투입된 예비군을 아직도 철군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을 여러 곳에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항복의 물음에 이순신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하나 다섯 개의 전장 중 3곳은 대한제국군이 중심입니다. 실제로 북미 남부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휴스턴의 경우엔 투입된 조선군이 겨우 단급 이하입니다. 대월도 겨우 2개 병단에 2개 해병여단을 규합한 병력만 투입되었었을 뿐이었고 말입니다.”
사실이다.
조선군이 집중 투입된 전장은 북미 서부 점령 작전과 동일본 전장뿐이었다.
더구나 영토 확장전쟁인 북미 서부 점령 작전에 투입된 해병대는 존재의의 자체가 외부에서 벌어지는 군사 작전을 위해 편성된 군대였으니 논외였다. 실제로 성과도 상당히 잘 내고 있었고.
문제는 대월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조선 육군 최강이라 불리는 제7기동전단을 투입하고, 거기다 55병단에다 해병 여단 1개까지 투입했으면서도 끝장을 보지 못하고 예비군을 20만이나 추가로 투입해야 했다.
조선군의 전투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반증이었다.
이전에 비해 더 뛰어난 무기, 더 많은 무장을 갖추고서도 전투력이 감소되는 기이한 현상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안다.
일단 실전을 경험한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숫자가 조선군 내에서 급감하고 있었다. 실전을 경험한 병사들의 전역율이 이미 8할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장수들 중에서도 6할 이상이 전역했다.
긴 시간 유럽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그들의 절대 다수는 제후국에서 보내온 대한제국군 장병들이었다. 실전을 경험한 병사와 지휘관의 수가 제후국이 절대적으로 많아지는 결과를 낳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전투를 겪지 않으며 경비부대처럼 변질되어버린 조선군은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병사들이 몸을 사린다는 점이었다. 복무기간만 잘 넘기고 퇴역해서 좋은 직장을 가지려는 이들이 생각이상으로 많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군역병들에서 모병제에 의한 직업군인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에도 그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더구나 지휘관들조차 가능한 병사들의 피해가 클 작전은 시행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전쟁은, 전투는 결국은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곳이다. 내가 살고 남만 죽이자는 계산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군 장병들은 지금 그런 성립되지 않는 계산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전투에서 병력 피해가 크게 일어나는 육군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은 이순신의 주군이자, 조선의 군왕인 광해가 병사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군에서 가장 최악으로 여기는 경계에 실패한 장수조차 용서해도, 쓸데없는 작전으로 병사들에게 다수의 피해를 입힌 장수는 용서하지 않는 이가 광해였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광해의 말대로 병사들은 누군가의 자식이고, 아비였으며 형제였으니까. 막말로 군관으로 복무 중인 이순신의 양자가 덧없이 희생된다면 그것을 참을 수 없을 것이긴 했다.
그러니 정책의 방향은 옳다. 문제는 그로 인한 결과였다. 방향이 옳다고 언제나 결과까지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정치의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당장 최근엔 훈련에서조차 부상자가 나올만한 훈련은 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과거 기동보병대원들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 기마대가 그들 앞으로 돌진하는 가운데 사격선을 구성한 채 피하지 않고 버티는 훈련은 아예 사라졌다.
간혹 사고가 벌어져 죽거나 다치는 이들이 나온다는 이유였다.
그런 기동보병들이 실전에서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적 기마대를 상대로 제대로 된 사격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이순신은 자신할 수 없었다.
그것들을 설명하는 이순신의 말을 모두 들은 이항복이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 그것들은 병사들의 안전을 중시하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해서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폐하가 흔들리고 계시다는 겁니다. 막말로 제후국들이 조선으로 칼을 돌려세우면 다년간의 실전을 경험한 20만의 병력이 순식간에 모여들게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린 겨우 몇 만에 불과합니다. 나머진······.”
“실전 경험이 없군요.”
“맞습니다. 실전을 격은 병사와 그렇지 않은 병사의 차이를 생각하면 그건······. 메울 수 없는 격차가 될 겁니다.”
사실 실전을 겪은 병사들도 문제였다. 최근 조선이 겪은 실전은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대회전이 아니었다.
대월 전선의 경우에도 그랬고, 동일본에서도 그랬다. 포격선을 갖추고 대포로 해결을 보려는 경향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빗발치는 적의 공격을 마주해 돌격하여 적을 분쇄하고, 적진을 유린하는 작전을 펼친 지휘관은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이항복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마치 죽음을 도외시한 작전을 펴지 않았다고 부하들을 질책하는 지휘관으로 비쳐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순신에게 이항복이 물었다.
“하여 어찌 하시길 바라시는 겁니까?”
“이제는 그 흔들림을 끝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폐하께오서 일어서실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말입니까?”
“새로운 국모를 들이시도록 해야겠지요.”
이순신의 말에 이항복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고양이도 아니고 범의 목에 방울을 달자고 말씀하시는 군요.”
“폐하께오서 극구 반대하신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폐하의 곁에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처럼 명만 받아 움직이는 이들 말고, 마음을 둘 누군가가 말입니다.”
“그 청을 폐하가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문제지요.”
“도제조께서 도와주신다면 소장이 나서볼까 합니다.”
“원수께서요?”
“예. 소장이 목을 걸어볼까 합니다.”
예상보다 단단한 각오를 보이는 이순신을 잠시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이항복이 물었다.
“달리 생각해둔 사람은 있으십니까?”
“그건······. 도제조께서 찾아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그걸 위해 자신을 찾은 모양이라고 이항복은 생각했다.
적당한 사람을 찾으면 이순신이 직접 목숨을 걸고서라도 간언하여 관철 시키겠다는 말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적당한 사람’이었다.
승하한 황후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새로운 국모가 낳을 왕자로 인한 분란을 경계하는 태왕에게 수긍을 받을 만한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럴 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니 누굴 끌어다 대도 태왕의 눈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눈에 차지 않을 사람으로 새로운 국모를 삼도록 태왕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순신이 목숨을 건다지만 일이 틀어지면 그렇게 새로운 국모감을 선정해 들이민 이항복이라고 안전할리 없었다.
비로소 이 군부의 거인이 굳이 승정원까지 발걸음을 해서 자신과 독대를 청한 이유를 이항복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한마디로······.
함께 죽자고 온 것이었다.
그것에 쓰게 웃는 이항복에게 이순신이 겸연쩍은 미소를 그려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