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0화. 뜻하지 않은 낭보
이시언은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장군을 불러 몇 차례 회의를 가지면서 압박과 회유를 통해 협상을 이끌어 내었다.
그 협상으로 산티아고 이북은 에스파냐가, 산티아고 이남은 잉글랜드가 영토로 삼는 협상안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대신 잉글랜드는 남미에서 더 이상 에스파냐의 영토를 빼앗지 않기로 약속했다.
물론 에스파냐가 아직 개척하지 못한 지역에 대해서는 잉글랜드도 개척도시를 개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에스파냐가 해안가를 따라 도시를 건설한 브라질 지역의 경우 여전히 전인미답의 지역으로 남아있는 내륙에 대한 개발은 잉글랜드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을 위해 브라질 북부지역 중 한곳인 상루이스는 잉글랜드가 소유권을 갖게 되었다.
애초에 프랑스가 개척한 도시를 에스파냐가 빼앗아 지배하던 곳이었기 때문인지 에스파냐는 생각보다 순순히 해당 지역을 양보했다.
사실 에스파냐는 이번 전투를 거치며 잉글랜드에 비해 열세인 자신들의 해군세력을 통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일 협상이 결렬되어 힘과 힘이 대결로 갈 경우 칠레지역은 물론이고, 다른 남미지역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 에스파냐의 판단이 작용한 덕인지 조선의 도움으로 전신을 통해 양측 최고수뇌부의 동의를 거쳐 8월 말,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를 대표한 에드워드 혼 제독과 에스파냐 국왕을 대리한 알레한드로 장군 사이에서 향후 발파라조 협정이라 불리게 되는 협정문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남미에서 벌어졌던 에스파냐와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잉글랜드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발파라조 협정이 다룬 것은 남미, 그러니까 현재의 콜롬비아 지역까지 만이었고, 현재 중미라 불리는 그 이북 지역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분란의 불씨는 남아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조선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것은 분명해 보였다.
발파라조 협정을 이끌어낸 이시언 제독은 태평양 함대의 기함인 태조급 전함을 이끌고 다시 하와이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파나마 운하 지역에 대한 지리원의 확인 작업을 돕고 있던 온달급 구축함은 남겨졌다.
파나마만에 정박해 있던 온달급 구축함에서 평강이 이륙했다.
폭탄을 다 덜어내고 심지어 현식총까지 걷어낸 평강에는 지리원에서 파견된 관리 2명이 탑승해 있었다.
그렇게 4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이륙한 평강은 최대치를 살짝 넘는 이륙 중량 때문에 열 공기 공급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 상태였다.
그로인해 연료의 소모가 평소보다 배 이상은 많았기 때문에 비행 거리는 절반이하로 줄어들 터였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엔 1명의 지리원 관리만 태우고 비행했지만 너무 놓치는 것이 많아서 결국 2명을 태우고 비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식총을 걷어 낸 김에 현식총 사수를 내리는 방안도 검토되었지만 비행 중 기관 이상에 대비해야 했기에 기관사의 임무를 겸하는 현식총 사수를 태우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이 최대 이륙중량을 넘어서는 상태에서 비행에 나서게 된 연유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평강 비행대의 대장을 맡고 있던 신만수 장령이 특수비행대 본부로 날틀03의 교환배치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온달급 구축함의 격납고가 날틀03을 격납하기에는 작았기 때문이다.
물론 신만수 장령은 그 해결방법으로 기낭의 헬륨기체를 넣었다 빼는 방법을 제안했다. 격납 시에는 헬륨기체를 기낭에서 빼내 저장소에 저장했다가 비행이 필요할 때 다시 불어넣자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그 때마다 소모되는 시간과 넣었다 빼고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누출되는 헬륨기체의 양은 여전히 해결이 필요했다.
시간도 문제였지만 헬륨기체의 누출은 특히 중요했다.
사실 헬륨기체는 자연적으로도 조금씩 줄어들기 때문에 일정기간마다 기낭의 헬륨가스를 보충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추가 누수까지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여러 문제 때문에 평강 비행대의 요청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한데 이 요청이 생각지 않게 원수부 내에서 비행선 보유 구축함에 대한 소요 검토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각 함대 또는 전대 기함이 보유한 정찰용 열기구가 운용함선에 묶여 있어 활용도가 비행선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그에 따다 비행선을 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 상당수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대월 전선에서 비행선의 효과성을 지켜보았던 이들의 요청이 쇄도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잡아먹는 해군을 탐탁지 않아 해서 해군의 신규 사업에 부정적이었던 육군 총사부에서조차도 이 사업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처해 왔다.
비행선 탑재 구축함이 많아지면 그 비행선들의 도움을 육군이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바다에 묶여 있는 전투함들과는 달리 육군에 직접적인 지원이 가능한 병기가 비행선이었던 까닭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비행선 탑재 구축함의 탐색 개발이 결정되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던 9월 중순, 생각지 못한 상황이 동일본에서 벌어졌다.
*****
7전단장 겸 동일본 정벌군 사령관을 맡고 있던 정충신은 자신 앞에 서있는 이자키 후지하루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여전히 상령의 계급장이 붙어있는 대한제국군 군복을 입고 있는 이 동일본 대한제국군 군관이 동일본 막부의 반란 진압을 보고해온 까닭이었다.
사실 2차 원정군 귀환병들과 대월 전선에서 귀환한 병력이 막부가 점령하고 있던 동일본 동부지역으로 무장한 채 이동하는 것을 태왕의 황명으로 그냥 지켜보아야 했던 3월 중순이후에도 동일본 전선은 여전히 소강상태였다.
태왕이 동일본 정벌군에 상대의 공격을 받지 않는 이상 반격하지 말 것을 엄명해 두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명령에도 충성심 강한 조선군은 두말없이 복명했다. 그렇게 소강상태가 길어지던 가운데 느닷없이 이자키 후지하루가 백기를 들고 찾아왔던 것이다.
“진압······, 이라 했나?”
“예. 동일본 대한제국군 육군 제1021병단과 제1024여단은 지난 6개월간의 잠입 및 적정 분쇄 작전을 펼친 결과 지난 5일 전 반란군 진압과 그 배후세력 분쇄를 완료 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드립니다.”
이자키 후지하루의 답에 정충신은 당황 속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감격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너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싱긋 웃은 이자키 후지하루 상령이 정충신의 말을 가로질렀다.
“참. 폐하께 상신 좀 드려주십시오. 병사들이 지속적으로 지급된 군인연금에 정말, 정말 감사해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랬다. 동일본 반란군인 막부군의 진영으로 향했음에도 조선 황실은 약속대로 군인연금을 지급해왔던 것이다.
그것에는 지금은 죽고 없는 일왕 측에 가담했던 1차 원정군 귀환병들도 마찬가지여서 살아있는 직계 유족들이 있다면 그 연금이 지급되고 있었다.
모든 군인들, 심지어 이순신 조차 말렸던 그 일을 이자키 후지하루의 입에서 들은 정충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지급되었던 군인연금이 흔들리는 대한제국군 귀환 병력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조사된 바에 의하며 실제로 황제가 자신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있는데 충성을 맹세했던 자신들이 먼저 대한제국을 버리는 것은 배신행위라고 주장하는 병사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것이 대한제국군의 입장에서 동일본 막부군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게 된 직접적인 연유였던 것이다.
막부에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조차 그런 결정에 큰 불만 없이 따랐던 것은 역시 그들 가족에게 돌아가는 군인연금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이상의 내용은 훗날의 조사에서 밝혀진 것이었기 때문에 아직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던 정충신이 물었다.
“다른 것은 묻지 않으마. 하지만 하나만 묻자.”
“하문 하십시오. 대장군.”
“왜냐? 진압 작전 중이었다면서 왜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나?”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동일본은 우리들의 나라이고, 우리들의 미래라고. 그러니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선택은 저희들의 몫이라 믿는다고 말입니다. 저희는 폐하의 그 말씀에 따라 토의했고 선택했으며, 스스로 해결해 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폐하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게 되었기에 저희 동일본 대한제국군 병사들 모두가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이자키 후지하루의 답에 정충신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믿지 못할 족속이라 말했던 동일본 왜인들이 흔들리지 않는 태왕의 믿음에 보답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간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었다.
“하······.”
감탄을 터트리는 정충신을 바라보며 이자키 후지하루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감탄에도 불구하고 정충신은 이자키 후지하루의 보고를 곧바로 상부로 보고하지 않았다. 동일본 왜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확인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조사단이 그간 막부가 장악하고 있던 동부지역으로 들어갔고, 보름 후 귀환한 조사단은 이자키 후지하루의 보고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마지막 남은 불신을 그것으로 지운 정충신이 동일본 대한제국군 장병들에게 자신의 불신을 사과하고 곧바로 원수부로 해당 사항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원수부도 정충신이 처음 느꼈던 것과 같은 충격과 불신에 빠졌다.
하지만 정충신이 보름간 조사단을 보내 샅샅이 조사한 결과 사실로 판명되었다는 추가 보고를 보내옴으로써 충격과 불안은 곧바로 환희로 바뀌었다.
환호성으로 가득 찬 원수부 통합지휘소를 나선 이순신의 보고에 광해가 보인 반응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기쁘지······. 않으시옵니까?”
“기쁘오.”
“하온데 어찌······?”
“믿었던 일이라 그런 모양이오. 일어날 것이라 믿고 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니.”
“아······. 예.”
광해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나온 이순신이 침전 문 앞에 시립해 있던 상선, 알지에게 물었다.
“폐하께오서 요새 웃는 일이 있으시오?”
이순신의 물음에 알지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인도, 다른 내관들도 통 보지 못하였습니다.”
“황후 마마의 승하 이후겠지요?”
“예. 원수님.”
상선의 답에 침전 안을 돌아본 이순신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들어있었다.
황후의 죽음 이후로 광해는 매일같이 가던 장원으로도 잘 나가지 않았다.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이전과 같은 열정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태자와 매일같이 보내는 시간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 외의 외부활동이 별로 없었다.
이전에는 너무 많이 궁을 떠나 외부에서 활동했기에 내금위가 근위 업무량에 치어 죽는다는 소리가 나왔는데 요사인 내금위에서 너무 외부 활동이 없어 외부 근위전술이 퇴보할까 걱정일 정도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한참 침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이순신이 상념을 떨쳐버리고 발길을 돌려 찾아간 곳은 승정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