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균형
“하면 도제조는 에스파냐의 손을 들어주라는 소리요?”
광해의 물음에 이항복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잉글랜드는 포르투갈 전쟁에서 유일하게 병력을 보내 우리를 도운 유럽의 맹방이옵니다. 그들의 속내가 어디에 있었던 우리에겐 선의로 쓰였으니 선의로 보아야 하옵니다. 그런 상대의 선의를 악의로 갚고서 의(義)를 주장할 수는 없는 법이오니 그 또한 살펴 주시옵소서. 폐하.”
이항복의 답에 들어있는 뜻을 이미 알아차렸던지 광해의 입가로 빙긋이 미소가 깃들었다.
“균형을 유지하란 소리로구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지 않음으로 두 나라 모두의 우정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부족한 소신은 그리 생각을 해봤나이다.”
이항복의 답에 총리대신이 물었다.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겠으나 이미 전쟁을 벌이고 있는 두 나라 사이에서 어찌 균형을 유지한단 말이오?”
“예로부터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 했지. 중재를 서란 소리구려.”
자신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챈 광해에게 이항복이 고개를 조아려보이곤 말을 이었다.
“예. 맞사옵니다. 남미를 어느 한나라가 차지하면 두고두고 분란의 소지가 될 것이옵니다. 그것은 조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을 것이오니 이쯤에서 중재를 한다면 적당한 선에서 분배가 되지 않겠나이까.”
이항복의 말에 광해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잉글랜드는 남미가 아니라 아시아에 공을 들인다. 하지만 지금의 아시아는 조선의 세상이었다.
잉글랜드가 교역로를 뚫고는 있었지만 과거와 같은 확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조선이, 자신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잉글랜드도 방향을 바꾸어 남미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그러니 이항복의 말대로 그냥 방치해 두면 남미에서 에스파냐와 잉글랜드가 두고두고 치고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이항복의 말대로 결코 조선에 이익이 되지 않았다. 그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광해가 잠자코 있는 이순신에게 물었다.
“원수는 어찌 생각하시오?”
“어떤 것을 택하시든 군은 그것을 실현해 낼 힘을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니 선택하시어 명을 주소서. 소신과 조선의 군은 충심으로 폐하의 명을 따를 것이옵니다.”
한 결 같이 바뀌지 않는 자세를 보이는 이순신이 광해는 참 대단해 보였다. 저만한 자리에, 저 정도의 권력을 쥐었다면 느슨해지는 것이 사람일진데.
“어찌 원수와 군의 충심을 모르겠소. 짐은 그저 원수의 생각을 듣고 싶을 뿐이오.”
“소신은 솔직히,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이익을 좇아 균형을 유지해도 좋고,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질서를 세워도 나쁘지 않다고 보옵니다.”
자신감의 발로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완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런 이순신의 답을 들으며 광해가 빙긋이 웃었다.
“언제나 이 원수의 말을 들으면 가슴이 시원해서 짐은 참 좋소이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겸연쩍은 표정의 이순신에게 다시 한 번 미소를 그려 보인 광해가 총리대신에게 시선을 주었다.
“짐은 도제조의 의견에 더 마음이 가오만.”
“폐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조당은 폐하의 결정을 충심으로 따를 것이옵니다.”
광해가 군 시절부터 흔들림 없이 지지를 보내주던 중신 중 한명이 바로 총리대신인 정인홍이었다. 그로인해 선왕인 선조 시절 벌어졌던 경인옥사 때는 파직을 당한 채 국문장에까지 끌려나오는 고초를 겪었으면서도 그는 광해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다소 편협하고 고지식한 사고방식이 문제이긴 했지만 광해가 믿을 수 있는 중신이라는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항복과 이원익의 탄핵으로 흔들리던 조정을 바로잡는 패로 그를 기용한 이유이기도 했다.
여하간 그렇게 끝이 없는 광해에 대한 지지와 믿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정인홍의 답에 광해가 미소를 그렸다.
이래서 왕들이 달콤함 말에 휘둘리고, 종국엔 간신배들이 조정에서 판을 치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무조건적인 신뢰를 표하는 정인홍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애써 그것을 경계하며 광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당의 일은 총리대신에게 맡겨 두리다. 이 원수는 태평양 함대에 명령해서 해당 상황을 진행해보시오.”
“발파라조 전대장을 맡고 있는 하상훈 상령은 싸움엔 능해도 중재에는 그리 능한 자가 아니옵니다.”
이순신의 말에 광해가 그 이름이 귀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광해가 그 이름을 보았던 서류를 떠올렸다.
언젠가 도승지인 허균이 이순신이 군에 사사로이 사조직을 만들었노라는 고변이 들어왔다며 전달한 인명록이 있었다. 하상훈은 그 인명록 속에 들어있던 이름이었다.
물론 광해는 그 고변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당시 광해가 보인 반응은 ‘그래? 알았네.’ 정도 이었으니까.
훗날 그 일을 알게 된 이순신이 왜 그리 처결했냐고 물었을 때 광해가 한 답은 한동안 이순신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었다.
그때 광해가 한 답은, ‘짐이 경을 믿는데 고변이 무슨 소용이오’ 였다.
여하간 그 이후로 이상하게 허균이 광해에게 전달했던 인명록 속에 기록된 사람들이 승진에서 누락된 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광해가 그들을 밀어준 셈이었던 것이다. 물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광해는 그 명단에 적힌 이들이 한동안 이순신이 부장으로 데리고 있던 젊은 무관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순신이 일개 상령의 성향을 세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면 누구에게 맡기면 좋겠소?”
상념을 떨쳐버린 광해의 물음에 이순신이 답했다.
“태평양 함대 사령인 이시언 제독에게 맡겨보심이 어떠하시겠나이까?”
대장군 이시언.
조선에서 가장 큰 함대인 태평양 함대를 지휘하는 그는 아이러니 하게도 무관이 아니라 문관출신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으로 출발했던 그는 임진년에 시작된 정왜전쟁에서 뜻하지 않게 부족한 군정군관으로 출전한 이래 야전지휘관으로 돌아섰다.
능력을 우선하는 현재의 조선군에서 태평양 함대의 제독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의 군사적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방증이었다.
거기다 문관 출신이라서 그런지 학식도 높은 편이어서 병사들 사이에선 ‘훈장님’이란 별명을 얻고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스럼없이 병사들과 어울려 식사를 함께하고 축국을 하는 등, 매사 병사들의 입장에서 살펴 일을 처리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는 그를 지장(智將)이자 덕장(德將)으로 평가했다.
실제역사에서도 그는 꽤나 청렴한 청백리로 유명했다. 그런 이시언을 이순신이 거론하자 광해가 흔쾌히 허락했다.
원수부 통합지휘소를 통해 이순신의 명을 받은 이시언은 태평양 함대 기함인 태조급 전함을 타고 발파라조로 향했다.
태조급 전함을 호위(?)하기 위해 유리급 순양함 1척과 온달급 구축함이 따라붙었다. 호위함으로 온달급 구축함을 합류시킨 것은 비행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태평양 함대와 북미 서부지역 점령 작전을 수행 중인 해병원정여단의 지원 하에 남미에서 지도를 만들고 있는 지리원 관리들이 태왕이 지목한 파나마 운하 건설 부지에 대한 적정성을 하늘에서 평가해 보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보름간의 항해 끝인 8월 중순에 발파라조에 도착한 이시언 제독은 황명을 앞세워 두 나라의 고위 지휘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사실 이때엔 상황이 조금 변해있었다. 시간을 끄는 동안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함대가 집결을 끝낸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집결을 끝냈지만 발파라조 외곽에 정박 중인 에스파냐 남부 함대를 공격할 수 없었다. 조선의 고위 장수가 대한제국 황제의 명을 받아 발파라조로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까닭이었다.
그런 까닭에 양국의 함대는 본의 아니게 발파라조 외곽에 대치한 채 정박하고 있었다.
물론 위기 대피를 구실 삼아 피항 했던 에드워드 혼 제독 휘하의 전열함 2척도 항구 접안 시설에 배를 댄 채로 붙박였다.
그것은 에스파냐 남부 함대에서 파견된 알레한드로 장군의 배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이라는 초강대국의 개입은 유럽의 전통강국인 잉글랜드와 에스파냐, 두 나라를 동시에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발파라조에서 기다리던 에드워드 혼 제독과 알레한드로 장군이 이시언 제독과 마주 앉았다.
“조선은 두 동맹의 전쟁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이시언 제독의 첫마디에 두 나라 장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두는 인사치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두 장군의 모습에 고소를 베어 문 이시언 제독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아국의 폐하께오서는 양국이 화해를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생각지 않은 말에 두 나라 장군들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우리보고 저 간악한 잉글랜드와 화해를 하란 말씀이십니까? 저들은 아국의 영토를 침략하여 약탈해간 파렴치한······.”
“헛소리! 그럼 그 땅은 언제부터 에스파냐의 것이었소!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양 굴지만 결국 에스파냐도 약탈로 마련한 영토가 아닌가 말이외다!”
“뭐요!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하면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단 말이오!”
소란스럽게 고성을 주고받은 두 장군을 지그시 바라보며 이시언 제독이 말했다.
“그렇군요. 하면 저는 본국에 계신 폐하께 두 나라는 폐하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고 상신하면 되겠습니까?”
순간의 정적.
두 나라 장군들의 입이 동시에 다물렸다.
당금의 천하에서 조선의 태왕을, 대한제국의 황제를 분노케 해서 무사할 나라는 아무 곳도 없다. 그것은 에스파냐도, 잉글랜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조선 태왕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명분을 주어서는 곤란했던 것이다.
“그, 그런 것은 아니고······.”
“그게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두 장군에게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인 이시언이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조선의 입장에서는 남미가 계속 전쟁의 와중에 있는 것이 불편합니다. 남미에서 들어오던 금이 끊어지는 것은 조선도 원하지 않으니까요.”
이시언 제독의 말을 들으며 두 장군들은 그것을 어찌 조선만 원하지 않을까 싶었다.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양국 모두 원하지 않았다.
아직 은 본위제를 채택하고 있는 유럽의 두 나라도 남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은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것에 입을 다물고 있는 두 장군에게 건네진 이시언 제독의 다음 말은 두 사람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조선이 사태 해결을 위해 나선다면 소관이 개입하게 됩니다.”
이시언은 이 만남의 초반에 자신을 태평양 함대 제독이라고 소개했다. 태평양 함대의 전체적인 규모를 알 수는 없었지만 발파라조 전대도 태평양 함대의 일부분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두 장군이 긴장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시언 제독이 타고 온 태조급 전함의 위용은 두 사람은 물론이고 양국 함대의 전 장병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길이만 자그마치 212M에 달하는 거대한 증기철선의 등장은 발파라조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던 양국 선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그 거대 증기철선의 갑판이 온통 대포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런 조선의 신형 증기철선과 함대함 전투를 치러본 나라는 아직까지 아무 곳도 없었다.
하지만 과거 주몽급 순양함과 전투를 치러본 에스파냐는 훨씬 거대해지고, 훨씬 많아진 무장을 가진 조선의 신형 증기철선들이 가지고 있을 위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잉글랜드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장갑귀선 시절부터 조선과의 해전을 누구보다 먼저 겪어본 곳이 잉글랜드였던 까닭이다.
더구나 조선에서는 퇴역한 해모수급 전열함을 상당기간 운용해본 잉글랜드는 조선의 발전한 선박건조 기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에스파냐에서 범선의 제작기술을 배워간 나라라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철재를 부분 사용하여 강도를 보강한데다 격실구조로 피탄 피해를 최소화한 조선의 독특한 건조방식은 잉글랜드의 건조 방식에 비해 월등히 발전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선박의 강도 자체가 달랐다. 하긴 조선이 건조하는 모든 선박은 전통적인 전술인 충파에 어느 정도 대비를 하기 때문이다.
초기 하백급 전열함처럼 아예 충파 전술을 적극적으로 시전하기 위해 선수를 장갑판으로 떡칠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투에서 한두 번의 충파를 시전하는 것에는 끄떡없을 정도의 강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뿐인가 전열함 이상 급에서는 상대의 충파에 견딜 수 있도록 옆구리도 강화한다. 그것이 포격전에서 수백발의 폭발탄을 얻어맞고서도 해모수급 전열함이 바다에 떠있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 선진건조 능력을 가진 조선이 만든 신형 함선들로 조직된 함대가 개입할 거란 말은 결국 조선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가져올 끔찍한 결과를 두 나라의 장군들은 어려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탓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문 두 장군에게 이시언 제독이 말을 이었다.
“아국의 폐하께오선 균형을 원하십니다.”
그나마 균형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에서 두 나라의 장군들은 적어도 조선이 어느 한쪽의 편에 서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고는 놀란 마음을 다소나마 가라앉힐 수 있었다.